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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나는 내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부유한 사람의 하나였던, 어느 유명 의사의 딸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물질적으로 워낙 풍요로운 덕에 인생을 단순하고 낙천적으로 보고 살아가는 착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혼돈의 바다를 질주해야 하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을 몰랐지만, 자라온 환경이 그러니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 본인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약점이었지만, 당자사인 그 아이도 부모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이는 어차피 공부에 별 뜻이 없으니 너무 이름 없는 대학만 안 가면 된다는 입장이었고, 부모는 정 안되면 최후에 선택할 수 있는 외국의 대학까지 물색을 마친 상태였다.

아이 집안의 재력으로 보자면, 조그만 화장품에서 가방에 이르기까지 그 아이의 모든 물건이 명품으로 치장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명품사랑은 끝이 날 줄을 모르는 듯했다. 더 새로운 것, 더 희귀한 것을 찾아 계속 목록이 작성되고 있었고, 대학 진학 후에 부모를 졸라 얻어낼 명품의 명단이 일찌감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즐비한 명품들을 가지고도 또 명품을 사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나로서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아이에게 진지하게 명품이란 과연 무엇인지, 왜 그렇게 명품이 가지고 싶은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아이는 정말 진지하게, 내 사무실에 있던 책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명품을 즐겼던 아이의 질문... 그리고 난 깨달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이 많은 책들을 뭐 하러 사세요? 저는 정말 그게 잘 이해가 안 되요."
"책은 오래 가잖아. 지식도 주고. 간접 경험도 하고... "
이렇게 말하면서도 난 속으로 '이런 철없는 것아'하고 깔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책은 그냥 빌려보면 되잖아요. 도서관도 있고요. 저도 정말 궁금한데요, 한 번 본 책을 또 다시 보기도 하세요?"
"좋은 책은 여러 번 볼 때도 있어."
"그래도 대부분은 다시 안 보죠?"

그건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책은 한 번 읽으면 다시 보지 않았거니와, 어떤 책은 처음에 보고 너무 실망하거나 지루해서 아예 끝까지 보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 아이가 말했다.

"저는 이런 책 사는 거나 제가 명품 사는 거나 똑같이 가치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세요. 루이비통 가방 하나에 싸게는 70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는데, 한 번 사면 최소한 10년은 쓰거든요. 최소 10년 동안 만족하면서 질 좋은 가방을 살 수 있는데, 그게 책보다 가치가 없지는 않잖아요. 선생님께서는 책을 사는 게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죠? 꼭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렇다. 나는 한 번도 명품이 책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명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숨기거나 말하더라도 부끄러워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명품에 목숨 거는 여자들을 비웃었으며 명품을 사랑하는 세상을 비난하곤 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내게 그날의 대화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는 까닭은 당.연.히. 책이, 지식이, 명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여겨온 나의 가치관도 하나의 고정관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살까 말까, 살까 말까

나는 지금 명품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도 있을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피렌체에 와 있다. 이곳의 수준 높은 가죽 세공 기술 덕에, 쇼핑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수도인 로마보다도 더 많다고 한다. 색색의 어여쁜 핸드백에서부터 지갑, 부드럽게 무두질한 가죽 자켓과 코트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절부터 금 세공품으로 유명했고 현대의 대표적 명품 브랜드인 구찌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두오모 성당과 우피치 미술관에만 관광객이 끓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관광객이 베키오 다리위의 보석 가게나 명품 아울렛을 위해 이곳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보티첼리와 카라바조의 진품 그림을 보는 것이 명품 쇼핑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는 것은 나의 지나친 생각일까?

오늘 나는 광장의 한 켠에 커다란 유리문을 달아놓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프랑스의 한 명품 매장 앞을 서성였다. 시어머니께 명품 가방을 선물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의 의무에 가까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시어머니께서 평소답지 않게 매우 분개한 표정으로 내게 했던 말들이 뇌리를 휘감아 왔다.

"얘, 그 뭐냐... 그 샤넬인가 뭔가 하는 게 그렇게 좋은 거니?"

안경을 새로 한 벌 하시겠다고 동네 안경점에 다녀오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샤넬 안경테가 너무 예뻐서 그걸 집으셨다가 그 놀라운 가격에 기절초풍하신 후, 이게 뭐 그렇게 비싸냐고 따지셨다가 무안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샤넬도 모르시냐고, 종업원이 은근히 깔보는 듯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님을 기분 나쁘게 한 명품의 추억은 사실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백화점 매장을 걷다가 맘에 쏙 드는 빨간 핸드백을 보니 가격이 30만 원대였다는 것. 이 정도면 사야겠다 싶어 들어가서 카드를 그으려고 했더니 사실은 300만 원이었다는 것. 이까짓 게 어떻게 300만 원이나 하냐고, 역시 매장 종업원에게 따지듯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촌뜨기가 된 것 같아 몹시 무안했다는 것.

당시 살아계셨던 시아버님께서도 0자 하나를 잘못 보신 탓에 호기롭게 지갑을 꺼내셨다가 결국은 지갑을 만지작거리기만 하시고는 그냥 매장을 나오셨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그리고는 명품이라는 것들과 그것을 사는 정신 나간 인간들에 대한 길고 긴 성토가 이어졌으며 그럴 돈이 있으면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도와야 한다는 윤리적 지침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시어머니께 명품 가방을 건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가 오늘 피렌체의 명품 매장에서 서성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얼마 전 어머님의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내 감정 때문이었다. 그 감정은 솔직히, 그리고 정확히 '어머님이 안됐다'라는 바로 그것이다. 일생에 단 한 번도 명품이라는 것을 손에 잡아보지 못한 여인에 대한 연민의 정이었다. 일생에 단 한 번도 가지고 싶은 예쁜 핸드백을 가지지 못한 여자는 불쌍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 매장에서 눈을 딱 감고, 앞으로 몇 년은 내 앞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시어머니께 명품의 로고가 찍힌 가방을 건네 드린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어머님, 이게 그 유명한 명품 핸드백이에요. 큰 맘 먹고 샀어요"라고 말하면 어머님은 아마도 "너 미쳤니. 이런 걸 뭐하러 사 오니. 얘, 너나 써라" 하고 짐짓 사양하실 것이 뻔하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어머님, 어머님은 이런 거 가지실 자격이 충분해요."

예쁘다. 그러나 재래식 시장보다는 명품 아울렛을 기웃거린 이유는?
▲ 피렌체 시장에 걸린 가죽 가방들 예쁘다. 그러나 재래식 시장보다는 명품 아울렛을 기웃거린 이유는?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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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인가, 유럽 출장을 다녀온 올케가 선물한 버버리 코트를 당당히 걸치고 모임에 나가던 친정 엄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일부러 버버리 매장을 가서 그 무거운 코트를 사 가지고 온 올케에게 진정으로 고마웠었다.

그렇다. 나도 우리 시어머니께 명품 핸드백이나 좋은 옷을 해 드리고 싶다. 평생 사치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오신 어머님들이 기를 펴는 모습이 보고 싶다. "이게 바로 우리 며느리가 이탈리아 여행가서 사 가지 온 바로 그..."라고 시작되는 자랑과, "에구, 며느리 덕에 호강하네"하며 감탄하실 동네 어른들의 모습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러한 고가의 제품을 안겨드리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나의 모습도 그려진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상상이 처음이 아니다. 새로 차를 사면 어떨까. 주변에서 어떻게 보아줄까. 새 아파트에 들어가면 어떨까. 지인들이 뭐라고 할까. 새 컴퓨터를 사고 위스키를 마시면... 끝없이 이어진다. 모두가 다 같은 본질이다.

내 욕망의 참모습

명품 매장의 유리문은 정말 크고 무거웠다. 힘들게 그 문을 열자마자 말쑥한 수트를 차려입은 백인 매니저가 고개를 내민다. "마담..." 어쩌구 하면서 "아이엠 쏘리"를 연발하며, 그 백인 매니저는 시간당 몇 명의 고객만 매장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아차, 그런가 싶어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뿔싸, 나의 뒤로 긴 줄이 서 있는 것을 나는 미쳐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놀라고 말았으니, 그 긴 줄에는 서양인이나 흑인이 전혀 없었다. 오늘만의 일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줄에는 모두 아시아에서 온 여자들 뿐이었다. 중국, 한국, 일본... 중국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편은 비웃는다. 중국 사람들이 이제 좀 살 만하니까 유럽까지 와서 명품 매장을 휩쓸고 다닌다고 말이다. 비웃을 일일까. 남편이 존경하는 명진스님의 책에 분명히 "아반떼면 충분한 것을 왜 소나타 타고 그랜저 타야 하냐"고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년 내내 10년이 훌쩍 넘었으나 그런 대로 잘 굴러가는 아반떼와 작별하고 싶어 몸이 달았던 것이 누구였는가?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나는 결국 줄을 서지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결국은 명품 획득의 기회를 잃어버린 시어머니를 그리고 나를 생각하니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의 '그러나'가 사그라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그래, 이런 소비는 바람직하지 않아. 유럽의 자본주의 상술에 천박한 심리가 어울려서 빚어낸 못 된 현상이야. 명품이란 말 자체가 틀려먹었지. 그냥 고가품일 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 진열장의 핸드백은 내게 계속 외쳐댄다.

"나를 사요!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줘!"

명품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많은 사람로 붐비던 곳이다.
▲ 나를 망설이게 했던 샤넬 매장 명품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많은 사람로 붐비던 곳이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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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만난, 열심히 명품 쇼핑을 하고 온 어떤 아주머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남편 담배 피우지?"
"네."
"그럼 담배 피우고 오라고 내보내고 그 사이에 얼른 카드를 그어 버리는 거야. 아양 한 번 떨고...벌써 샀는데 뭘 어쩔 거냐구. 그냥 질러. 이런 기회가 일생에 몇 번이나 되겠어."

그 말을 남편에게 해 주었다. 여자들의 명품 쇼핑을 비웃는 남편의 서슬퍼런 비판이 나를 정신차리게 할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해. 내가 그런 거 하나 사주지도 못하고... 사고 싶으면 어머님이랑 자기 꺼랑 하나씩 사.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든 메울 테니까. 그냥 사. 정말이야."

그의 눈빛에는 샤넬을 몰랐던 시어머니를 측은히 바라보던 나의 눈빛과 닮은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그냥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나야말로, 정말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부담줘서 정말 미안해.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기 전 친정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사고 싶은 거 안 산다고 갑자기 부자 되는 거 아니라고. 사고 싶은 거 사면서 살라고. 그래야 하나?
▲ 우피치 미술관에서 바라본 보석 가게들 떠나기 전 친정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사고 싶은 거 안 산다고 갑자기 부자 되는 거 아니라고. 사고 싶은 거 사면서 살라고. 그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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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 타클라마칸이나 네팔 혹은 미얀마의 허름한 가게들이나 누추한 공항에서는 명품 따윈 구경도 할 수 없었으니 욕망도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니 없는 줄 알았던 소비에의 욕망이 불끈 치솟는다. 누군가는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욕망을 실현하면서 살라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욕망에 굴복하지 말고 인생의 정신적 가치와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며 살라고 한다.

누구 말이 맞는 것인지, 어떤 욕망이 추구할 욕망이며 어떤 욕망은 참아야 할 욕망인지, 참으로 구별하기 힘든 세상이다. 나의 욕망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나는 또 어떤 사람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태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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