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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고조된 남북간 정치·군사적 갈등이 결국, 개성공단 잠정 중단이라는 파국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부 장관에 북한 전문가를 발탁하면서 남북관계가 호전될 거란 기대도 높았지만, 이번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는 북한 전문가의 존재감이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다.

지난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북한연구학회장이기도 한 류길재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를 박근혜 정부 첫 통일부장관 후보자로 발표했을 당시에는 새 정부가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의 측근이나 외교분야 쪽 인사들을 임명했던 이명박 정부와는 차이가 확연했기 때문이다.

또 류 장관이 평소 남북간 교류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물론, 야당도 그에 대해 별다른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팀에서 류 장관이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면 이명박 정부 때 악화된 남북관계를 회복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남북 갈등이 개성공단 잠정 중단 사태로 치닫는 과정에서 통일부 장관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거나 외교·안보 최고위 정책결정 과정에서 이미 설 자리를 잃은 것 아니냐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잇따른 정부의 대북 조치에 북한 전문가인 류 장관이나 통일부의 의견이 반영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수용할 리 없는 회담제안... "통일부·안보실 역할 실종"

북한이 정부의 개성공단 실무회담 제의를 거절한 가운데 26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에서 임진강 이북과 연결된 통일의 관문이 바리케이드 너머로 보이고 있다.
 북한이 정부의 개성공단 실무회담 제의를 거절한 가운데 26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에서 임진강 이북과 연결된 통일의 관문이 바리케이드 너머로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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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인 예가 지난달 25일 류 장관이 발표한 정부 성명에서 북한에 하루 남짓한 시간을 주며 '실무회담제안에 응하지 않으면 중대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일이다. 정부의 '최후통첩식 성명'이 발표되자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북한이 이런 식의 제안에 응해올 리 없다', '남한이 제시한 시한을 지난 뒤에 북한이 회담제의 내용을 비난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는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당시는 한·미연합 독수리연습이 진행 중이었고, 이런 군사훈련 중에는 북한이 남한과의 대화에 응한 예가 없기 때문에 북한이 순순히 '그래, 회담하자'고 나선다고 예상하긴 어려웠다. 더구나 하루 남짓한 시간 안에 회담에 응하라는 으름장에 북한의 반응은 불보듯 뻔했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북한 전문가가 통일부 장관을 맡고 있는 정부에서 이같이 '턱도 없는' 회담 제의가 나온 것이다.

이 회담 제의를 북한이 비난하자 청와대가 나서서 이를 '대화 거부'로 단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남한이 제시한 시한을 2시간 15분 가량 넘겨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실무회담 제안을 "알맹이 없는 껍데기 제안"이라고 비난했다. 또 한편으로는 "개성공단은 6·15의 고귀한 전취물"이라며 자신들이 개성공단을 사업을 위해 노력한 부분도 강조했다.

26일 북한이 반응이 나온 직후 통일부는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고 좀 더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날 밤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나서서 "대통령의 뜻"이라며 "북한이 우리 정부의 대화 제의를 거부한 것은 참으로 유감"이라는 정부의 공식 입장을 내놨다.

남북관계의 주무부처인 통일부가 조심스레 실무회담 성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던 걸 청와대가 나서서 '북한의 입장은 회담 거부'라고 못 박은 것. 이어 '중대 조치'인 개성공단 내 남한 체류 인원 전원 귀환 결정이 내려지면서 개성공단사업이 잠정 중단되는 사태로 치달았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남북관계의 주무부처는 통일부인데, 그 역할이 실종된 것 같다"며 "최근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보면 통일부나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분석과 판단보다는 모든 상황을 대통령이 주도하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통일부가 업무를 관장하고 국가안보실이 콘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대통령에게 대응책을 제시하면 대통령은 최종결심을 하는 구조가 아니라, 대통령이 먼저 결심하면 국가안보실이나 통일부가 그대로 실행하는 구조로 보인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류길재 장관을 발탁했을 땐 보수적인 시각을 가졌지만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의 필요성을 잘 아는 분이어서 기대가 높았는데, 지금은 장관이 대통령을 설득을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대통령이 너무 일일이 지시만 해서 그런지 실망스럽다"며 "통일부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남북관계는 전문가인 통일부가 주도할 수 있게 해야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군 출신에 고립될까 걱정"... "대북정책은 통일부 주도로"

지난 4월 6일, "우리 국민 보호를 위해 개성공단 잔류인원 전원을 귀환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의 '대한민국 정부 성명'을 발표한 류길재 통일부장관.
 지난 4월 6일, "우리 국민 보호를 위해 개성공단 잔류인원 전원을 귀환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의 '대한민국 정부 성명'을 발표한 류길재 통일부장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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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황으로 봐선 류길재 장관이나 통일부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진다. 다만, 그 원인에 대해 류 장관이 역할을 못해서라기 보다는  북한 관련 최고위 정책결정구조에서 통일부장관이 배제되고 있지 않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팀에 군인 출신이 너무 많다. 밀리터리 마인드(군사적 사고방식)과 시빌리언 마인드(민간 사고방식)가 서로 부딪힐 때 통일부 장관이 너무 외롭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관진 국방부장관, 남재준 국정원장 등 군 출신이 숫자도 많은데다가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어서 학자 출신인 류 장관이 고립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류길재 장관은 어려운 환경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는 "류 장관이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지금 역할을 못한다고 비난한다면 전투도 벌이기 전에 복장 불량을 이유로 얼차려를 시키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최 교수는 "어떻게든 대북정책이 통일부 주도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개성공단이 저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국방부에서 '개성공단 인질' 발언이나 '지휘부 원점 타격' 등의 발언이 북한을 자극한 것 아니냐"고 했다.


태그:#개성공단, #통일부, #북한,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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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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