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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나 민가나 꽃밭을 꾸미는 정서는 매한가지다
▲ 봉하마을 노무현대통령생가 꽃밭 궁궐이나 민가나 꽃밭을 꾸미는 정서는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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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나 살림집, 절집에는 꽃계단(花階)이나 꽃밭(화단)이 있다. 이는 정원을 꾸미는 중요한 요소로 궁궐이나 민가나 꾸미는 스타일만 다르지 정서는 모두 같다.

죽은 자를 위한 엄숙한 공간인 능원이나 종묘에는 단풍나무와 같이 화려한 나무를 심지 않았고 꽃밭을 두지 않았다. 절집에도 엄격한 질서나 엄숙한 공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꽃밭을 두지 않았다. 화계나 꽃밭은 이런 분위기와 반대되는 정서가 있다.

우리나라 집은 주로 산등성에 기대어 짓게 되므로 집 뒤쪽은 비탈 진 곳이 많다. 이런 비탈을 그냥 놔두지 않고 화계라 하여 층계모양으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 꽃밭을 만들었다. 화계는 주로 궁궐에 있지만 드물게 살림집이나 절집에도 있다.

궁궐의 화계

화계는 주로 왕비의 침전 뒤뜰에 꾸며졌다. 화계는 바깥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들만의 공간이다. 경복궁 아미산 화계와 창덕궁 대조전 화계 그리고 낙선재 화계가 대표적인 궁궐의 화계다. 

아미산 화계는 경회루 연못을 만들 때 퍼낸 흙으로 동산을 만들고 그 동산에 네 개의 단을 쌓아 만든 것이다. 화계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 석분과 괴석, 석조 등 석물을 배치하였다. 그 중 세 번째 단에 굴뚝을 놓았다.

꽃담과 굴뚝 모두 주황색이어서 화계가 화려하다
▲ 아미산화계 꽃담과 굴뚝 모두 주황색이어서 화계가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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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만을 고집하지 않고 계절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꽃과 나무를 심었다. 이른 봄엔 진달래와 미선나무가, 그 다음 주자로 앵두가 늦봄이나 초여름엔 모란이 꽃을 피운다. 가을엔 국화가 피어 긴 꽃 여정을 마무리한다. 잎이 모두 진 겨울이면 뽀얀 석물과 황토색 굴뚝이 제 빛을 찾는다.

굴뚝은 주황색 벽돌로 쌓아 화려하되 유치하지 않다. 교태전 꽃담과 어울려 주변을 환하게 한다. 구들이라는 독특한 난방구조물은 굴뚝이 없을 수 없는데, 우리는 굴뚝을 보기 싫다고 하여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내 놓아 굴뚝을 하나의 장식물로 이용하였다.

아미산 화계가 화려하다면 낙선재 화계는 세련미가 있다. 낙선재는 본래 상중에 있는 왕후들이 소복차림으로 기거하던 곳이어서 단청도 하지 않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지 않은 대신 화계를 둘러싸고 있는 담엔 회백색 꽃무늬나 길상무늬를 놓아 세련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낙선재의 화계를 궁궐의 화계 중 최고로 치는 사람이 많다.

아미산화계와 달리 꽃담과 굴뚝 모두 회백색이어서 화계가 세련미가 있다
▲ 낙선재화계 아미산화계와 달리 꽃담과 굴뚝 모두 회백색이어서 화계가 세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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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에는 앵두, 모란, 조팝나무 등을 심고 석분과 괴석, 세연지 등 석물과 굴뚝을 배치하였다. 굴뚝도 꽃담과 화계와 같이 잿빛을 띠고 있어 아미산의 화려한 굴뚝과 대조를 이룬다. 이래서 낙선재 앞마당에는 비교적 화려한 꽃밭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낙선재와 달리 앞마당은 비교적 화려하다
▲ 낙선재 앞마당 꽃밭 낙선재와 달리 앞마당은 비교적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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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과 낙선재 화계의 중간 정도가 대조전의 화계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낙선재처럼 잿빛의 화계는 아니다. 굴뚝과 꽃담 모두 연한 회색에 주황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다른 화계와 달리 단이 높은데 낙선재와 아미산에 비해 격을 높일 의도는 아니다. 대조전의 후원은 지세가 급하여 단을 높게 쌓았다.

아미산화계마냥 화려하지 않지만 낙선재처럼 잿빛 화계도 아니다
▲ 대조전화계 아미산화계마냥 화려하지 않지만 낙선재처럼 잿빛 화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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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집의 화계

화계는 궁궐에만 만든 게 아니다. 민가에서는 주로 화계보다는 기와나 돌로 꽃밭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으나 창녕 술정리에 있는 초가(창녕술정리초가)는 다르다. 초가 뒷동산에다 장대석 대신 막돌로 허튼층쌓기로 그럴듯한 화계를 만들었다.

 막돌 허튼층쌓기로 그럴듯한 화계를 만들었다
▲ 창녕술정리초가 화계 막돌 허튼층쌓기로 그럴듯한 화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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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나무와 모란, 도라지, 수국, 무화과, 다알리아, 맨드라미, 국화, 호박, 맥문동, 원추리 등 화초를 꼼꼼하게 심어 놓았다. 화계를 오르내리는 막돌은 이 집 마루만큼이나 윤기가 자르르하다. 이 집은 장독대며 마루와 화계 등 윤기 없는 메마른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정원이나 원림에도 화계가 있다. 소쇄원에 매대(梅臺)라는 화계가 있다. 화계에도 이름을 붙여주었으니 화계는 소쇄원을 꾸미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화계에도 ‘매대(梅臺)’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 소쇄원 화계 화계에도 ‘매대(梅臺)’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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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대 위에는 담을 쌓고 그 담에도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라 이름 붙였다. 매화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선비를 상징한다면 처사는 벼슬을 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를 나타내므로 화계와 담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담과 화계에는 집 주인의 의지가 담겨있다
▲ 소쇄원 화계 담 담과 화계에는 집 주인의 의지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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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하게 절개와 지조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정원이 있다. 영양에 있는 서석지다. 네모난 연못가에 '凹' 모양으로 볼록하게 석축을 쌓아 거기에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심어 사우단(四友檀)이라 이름 붙였다.

사우단은 정통 화계는 아니지만 집주인의 강한의지가 담겨있어 서석지의 조원(造苑)에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 영양 서석지 사우단 사우단은 정통 화계는 아니지만 집주인의 강한의지가 담겨있어 서석지의 조원(造苑)에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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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원을 꾸민 정영방은 사우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이 사우단을 꾸민 의지를 드러내었다.

매화와 국화는 눈 속에서 뜻을 두고
소나무, 대나무는 서리가 내린 후에 제 빛을 낸다
(매국설중의 송황상후색, 梅菊雪中意 松篁霜後色).

사우단은 정통화계는 아니지만 단은 집주인의 의지가 잘 드러나, 조원(造苑)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절집의 화계

절집은 거의 화계를 만들지 않는다. 화계가 비탈에 층을 내어 공간을 넓히는 기능을 하는데 절집의 경우 이런 기능은 필요치 않다. 절집에서 대웅전은 절집 가운데 제일 높은 곳, 끝에 존재하여 더 이상 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화계 대신 주로 석축을 쌓아 마무리한다.  

절집은 화계 대신에 한쪽에 기와나 돌로 꽃밭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해남 대둔사 천불전 뒤뜰에는 화계를 쌓지 않았지만 꽃담과 함께 예쁜 꽃밭을 만들었고 봉선사와 같이 '보고 가는 꽃밭'이라 이름붙인 꽃밭도 있다. 모두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 꽃밭들이다.

꽃담과 꽃밭이 하나가 되었다
▲ 해남 대둔사천불전 뒤뜰꽃밭 꽃담과 꽃밭이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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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으로 정겨운 살림집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강진 무위사의 경우, 천왕문에서 극락보전 앞마당까지 완만한 길 양옆에 살림집 마냥 소박한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동백나무, 단풍나무, 배롱나무와 몇 가지 화초를 심었다. 몇 걸음 안 되는 길이 아까워 느릿느릿 걷게 된다. 욕심을 모두 떨칠 수 있는 아주 소박한 길이요, 소박한 화단이다.

이제 이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 강진 무위사 이제 이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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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런 소박한 것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부자절 티를 내는가 보다. 화단은 석축이 대신하고 느릿한 경사 길은 보제루가 가로막고 있다. 이제 사진을 통해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살림집 같은 절집으로 안동 봉정사 영산암만한 곳이 없다. 우화루, 응진전, 삼성각, 요사채가 빈틈없이 배치되어 아주 짜임새가 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꽃밭이 살림집분위기를 내는 데 한몫하고 있다. 좀 허전하다 싶으면 한갓진 곳에 돌과 기와로 꽃밭을 만들고 비탈진 곳에 돌계단을 놓아 윗마당과 아래마당을 연결하였다.

꽃밭과 화단, 돌계단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어도 번잡스럽지 않다
▲ 안동 봉정사 영산암 마당 꽃밭과 화단, 돌계단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어도 번잡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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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주변에 소나무와 불두화, 배롱나무, 나리꽃 원추리를 심었고 마당 경사면엔 단을 만들어 화단을 꾸미고 함박꽃 등 화초류를 심었다. 꽃밭과 화단, 돌계단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어도 번잡스럽지 않다. 오히려 우화루 마루에 앉아 눈길을 요리조리 주는 재미가 있다. 

절집의 화계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드나 화계를 꾸민 절집이 있다. 세조의 원찰인 봉선사는 원찰의 이름답게 큰법당(봉선사는 대웅전을 큰법당으로 표기하고 있다) 뒤편에 화계가 있다. 막돌이 아닌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화계를 만들었다. 화계위엔 삼성각과 조사전이 있다.

화계가 있는 절집은 봉선사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 봉선사 화계 화계가 있는 절집은 봉선사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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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사찰의 경우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이나 돌기둥이 있긴 하지만 화계를 쌓은 절집은 봉선사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이래서 봉선사 화계는 이색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절집의 조경주체가 왕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화계는 주로 궁궐에 만들어 졌으나 절집이나 살림집에도 만들어졌다. 궁궐이 아무나 쉽게 드나들지 못하는 금궐(禁闕)이긴 하지만 화계를 비롯한 정원의 조원 사상이나 원리는 민간이나 궁궐이라 하여 서로 다르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화계, #꽃계단, #궁궐의 화계, #절집의 화계, #민가의 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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