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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도를 여섯 번 다녀왔다. 신혼여행 때 한 번, 아이들 수학여행 인솔하러 네 번, 학교 선생님들과 한 번. 그래서 제주도는 나에게 다만 추억이거나 사진이었다. 제주도는 사진 속에 담긴 노란 유채꽃 밭이며, 환한 웃음과 함께 떨어지는 천지연 폭포였으며, 아이들과 성산일출봉에서 머리카락 날리며 찍은 사진 안의 바람이었으며, 응당 거쳐 가는 용머리 해안이었다.

또한 제주도는 앨범 안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잡으며 가만히 담겨진 마라도였고, 섭지코지였으며, 때로는 산굼부리와 여미지 식물원과 산방산이었다. 결국 나에게 제주도는 한 번 가볼 만 한 곳, 그래서 한 번 다녀가는 곳, 그것도 여행이 아닌 그저 관광지였고 풍경이었을 뿐이었다.

그랬던 제주도가 어느 때부터인가 서서히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제주도의 역사가 보였고, 풍경만이 아니라 삶이 조금씩 보였으며, 삶의 구체적인 모습인 흙과, 나무와 돌담을 가슴으로 느꼈다. 그리고 산과 오름과 바다가 더욱 절실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추측해보면 아마도 그것은 제주도 올레길과 강정 마을을 알게 되면서부터이지 않았을까. 아니 더 거슬러 가면 4대강의 신음 소리를 들을 때부터, 아니 아니 더 거슬러가서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때부터, 부안 핵폐기장 사태 때부터, 새만금 공사 반대 때부터, 천성산 천 년 늪의 도롱뇽 소송 때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자본과 권력의 확장,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파괴와 아픔을 겪는 동안 내 무딘 가슴에도 어느덧 내쫓기지 않고, 파헤쳐지지 않고, 깨지거나 갈라지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는 평화에 대한 갈망이 싹튼 것일 게다. 그 갈망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이며, 느리고 순한 삶을 기꺼워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강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책

<그대 강정>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 <그대 강정>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 북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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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43명과 사진작가 7인이 제주 강정에 띄운 연애편지와 그림엽서를 모은 책 <그대, 강정>은 2013년 4월 3일에 발간되었다.

발행일과 작가 수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제주의 역사적 상징이 된 4.3항쟁의 고통과 현재 해군기지 건설로 인해 누백 년 살아온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 강정마을의 고통이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엔 누구나 '평화의 섬' 제주에 해군기지라니, 하는 매우 상식적인 질문으로 강정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제주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경관을 갖고 있으며,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강정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반대하는 해군기지를 설마 건설하려고 할까, 설마 건설을 강행할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정마을에, 구럼비 바위에, 바위를 쓰다듬는 바다에 검고 우울한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평화가 근본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시인, 소설가, 사진작가들은 강정의 분노와 슬픔을 담아 강천천처럼, 강정천 은어처럼 맑은 글과 사진으로써 세상의 '평화감수성'을 일깨우고, 아름다운 강정을 재인식할 수 있도록 한 책이 <그대, 강정>이다.

책을 펼치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담은 사진이 먼저 다가온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126편의 사진 속에 제주의 바다와 하늘, 어머니 젖가슴 같은 오름들, 들녘의 보리밭과 정겨운 돌담이 있다. 새벽과 석양과 바람이 있다. 그리고 싸워 지키는 사람들의 맑은 눈망울과 깊은 주름, 강정은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바닷물고기와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 파도치는 구럼비 바위 위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맨발의 오체투지가 있다.

가슴 뭉클함은 이내 분노로 변한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곳에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다니,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쫓겨나고, 바위는 깨부숴지고, 바다는 오염되고, 기지 주변에는 기지촌이 생기고, 평화의 섬은 온데간데없이 긴장과 통제만이, 군비경쟁과 대결의 갈등이 상존하는 곳으로 만들려 하다니!

작가들도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 뭉클함과 애틋함과 분노가 그들에게 펜을 들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사한지 안부를 묻고(김근), 구럼비를 온전히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책망하고 참회하기도 하며(김희정), 강정을 살려줍서, 구럼비를 살려줍서 하며 호소하기도 한다(박일환).

또한 강정과 내가 둘이 아님을 선언하기도 하고(송기역), 구럼비 바위를 화자로 내세워 제 어깨가 부서지는 아픔을 말하고(신혜진), 강정에 많이 서식하는 환경보호종 맹꽁이가 되어 아이들에게 평화엽서를 띄우는(이미애) 동화 같은 글도 있다.

 제주 구럼비
 제주 구럼비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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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는 단순히 강정마을에 있는 바위에 붙인 이름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강정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꿈이며, 생명의 바다를 소중히 남기려는 간절한 바람이며, 지구 위에 평화의 영토를 한 뼘이라도 더 늘리려는 세계인들의 고마운 성원에 붙일 이름이라며(최규화), 강정마을 구럼비의 의미를 무한히 확장하기도 한다.

그랬다. 시인의 감수성은 먼 바다 건너 제주도의 강정 마을 구럼비 바위와 붉은발말똥게와 연산호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 모두는 다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우주적 인식이 바로 생명과 평화의 본질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송기역 시인은 미국의 시인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의 말을 인용하며 둘 아닌 이치를 전한다.

"우리가 땅에 하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하는 일입니다."

여러 언론들이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 제주도로 들어와 불복종 평화 운동을 펼치는 이들을 '외부인'이라고 지칭할 때 시인은 그런 인식을 단호히 거부한다.

"사람은 자연의 외부인이 아닙니다. 평화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강정마을은 하와이, 오키나와와 연결되어 있고, 제주는 내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강정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강정의 '외부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구별 어디에도 외부인이란 없습니다."(본문 109쪽)

그러므로 구럼비와 한 몸이 된 시인들의 맑은 눈엔 해군기지 건설의 동기와 절차가 아무리 '안보'라는 언술로 치장하고 '국책사업'이라고 강변해도, 결국 반생명이며, 반평화의 전쟁포고로 비친다. 해군기지 건설은 천연기념물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들에 대한 학살이고, 주민들의 민주적 절차가 완전히 생략된 반민주주의 폭거이며, 오랜 전통을 가진 마을공동체를 붕괴하고, 평화를 수호하겠다며 도리어 전쟁 기지를 짓는 어불성설에다, 아시아 평화에 대한 실제적인 위협, 그리고 건설공사를 수주한 거대 자본의 탐욕(김선우)이라고 규정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단순한 감상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실천을 도모한다. 그것은 그동안 평화를 남의 일이며, 남이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어서 오라고, 함께 해 달라는 구체적인 주문이었다.

"이 땅의 작가들은 강정마을을 책으로 포위하려고 합니다. 무기와 군함이 아니라 책으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 군대가 아니라 문화 예술의 축제로! 강정마을 전체를 평화의 도서관으로, 평화의 책마을로 만들려는 꿈이 시작되고 있는 여기가, 또 한 번 기적의 자리입니다. 맨 밑바닥에 무릎을 모은 기도용 깔개 위로 강정의 노을이 지고 또 태어납니다."(본문 44쪽)

어쩌면 제주와 강정과 구럼비는 생명과 평화의 삶에 무지하였거나 눈감고 모른 척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슬프도록 아픈 경고인지 모른다. 깨어있으라고, 깨어있지 않으면 이렇게 도둑맞을 수 있다고. 실천하라고, 실천하지 않으면 이렇게 강탈당할 수 있다고. 생명의 바다가 넘실대는 것처럼, 평화의 바위가 거기 그대로 평온하게 자리 잡은 것처럼, 탐욕을 버리고 공감과 연대의 삶을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참혹해질 수 있다고. 망가지면서, 무너지면서 온몸으로 전하는 간절한 호소인지 모른다.

"돌멩이 하나, 꽃 한 송이도 건드리지 마라."

그래서 이 말은 거창한 미래가 아닌 조용한 평화를 꿈꾸는(유현아) 시인이나, 한라산이나, 제주 바다나, 성산일출봉이나, 제주새뱅이, 맹꽁이, 주홍미끈망둑과 뭇 생명들의 마음을 담은, 가장 극명한 평화의 선언이어야 하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로 위무하는 시인의 증명에 나도 동참하고 싶어졌다.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어야 사랑이려니 그대가 다급하게 부르기 전에 가련다. 가난해서 아름다운 가슴을 지키련다. 그들보다 힘없다 해서 약한 것은 아니라는 증명에 동참하련다. 더할 것 없어 아름다운 그대의 안위를 보호하겠다. 사랑은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바깥에서 번지는 눈물이지만 어깨 겯고 체온을 나누듯이 함께여야만 한다. 그대의 허리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지고 늑골 사이마다 거친 발자국이 찍혀도 끝장은 아니다. 눈물로 염장된 내력이라서 누대를 두고 지속될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대, 강정, 제주."(본문 183쪽)

(추신 : 책의 뒷부분에는 「강정 전사前史」를 덧붙여 놓았다. 지난 2007년 4월부터 시작된 이 연보엔 그동안 자행된 불법, 탈법과 인권유린과 날치기와 모의와 분열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해군기지가 미군의 핵추진항공모함을 위한 미군 해군기지이며, 강정에 이어서 세화, 성산, 대정, 산방산이 공군기지와 해병대기지로 변할 충격적인 계획도 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그대, 강정> 강기희 외, 북멘토, 2013년 4월 3일, 1만 3천 원 (이 책의 작가 인세 전액과 출판사 수익금 10퍼센트는 '제주팸플릿작가'의 팸플릿 운동을 위한 제작비와 강정 평화활동에 쓰인다고 한다. 따뜻한 연대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대, 강정 -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북멘토 편집부 엮음, 도서출판 북멘토(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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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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