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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낙담

1940. 9. 17. 김구 주석이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결성식에 축사하는 중국군 류우치 장군을 바라보고 있다.
 1940. 9. 17. 김구 주석이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결성식에 축사하는 중국군 류우치 장군을 바라보고 있다.
ⓒ 눈빛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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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0일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광복군 2지대가 있는 중국 서안에서 미군 OSS(Office of Straegic Service, 미국 전략사무국) 총책임자 도노반 장군과 고국으로 밀파할 공작을 협의하였다. 도노반 장군이 정중하게 선언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되었다."

김구는 미군과 함께 국내 진공공작을 꾀하던 가운데 일본의 패망소식을 들었다.

"아! 왜적이 항복을?"

이 소식에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공들여 대일참전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김구는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무기를 주어 중국 산둥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보내 국내의 요소를 점령한 후,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국내 진격작전을 한번 해보지도 못한 채 왜적이 항복해 버렸다. 진실로 전공(前功)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이 되는 것은 우리 광복군이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라디오에서는 정오를 알리는 시보가 울린 다음, 곧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다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 영· 소· 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

일본제국주의가 마침내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대동아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항복방송이었다. 삼천만 백성들에게는 압제의 사슬을 끊는 환호의 항복방송이었지만 김구에게는 참으로 애석한 일왕의 항복이었다.

김구와 임시정부의 귀국은 일제 패망 이후 석 달 이상 지연되었다. 그 핵심 이유는 임시정부에 대한 인정 문제로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그 요인들을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편입하고자 했다. 11월 19일 결국 김구는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며, 귀국 이후에도 정부로서 행세하지 않으며, 미군정에 협조한다"는 서약서를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제출해야 했다.

김구의 환국 후 한반도 남과 북에는 두 개의 이질적인 단독정부가 들어설 기미가 짙었다. 김구는 이를 막고자 온 몸을 던졌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해방 후 나는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였다면 최소한 분단국가를 막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신탁통치 안은 미소 강대국들이 그들의 야욕을 감추기 위해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던진 하나의 미끼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일본의 패망 전부터 일본이 통째로 삼키고 있는 한반도를 그들 전리품으로 염두에 둔 채 지구본을 바라보며 침을 흘렸다. 전쟁의 승기가 보이기 시작하자 이들 강대국들은 곧장 지구본에서 북위 38도선으로 한반도를 두 토막을 낸 뒤 자기네끼리 흥정하여 땅 따먹기를 마쳤다. 그러고는 각자 자기네들의 마음에 드는 친미, 친소국가 건설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이승만, 김일성을 친미정부, 친소정부의 우두머리로 점지해 뒀다. 그렇다면 단독정부를 끝내 거부한 김구는 미국에게도, 소련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고집이 센 골치 아픈 민족주의자로 그들로서는 끝내 제거해야 할 첫 번째 대상 인물이었을 것이다.

김구는 왜 죽음을 피하지 않았을까

1949. 17. 5. 백범 김구 국민장 장례행렬이 남대문로를 지나고 있다.
 1949. 17. 5. 백범 김구 국민장 장례행렬이 남대문로를 지나고 있다.
ⓒ NARA(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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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그 모든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김구는 당신이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마지막 독립운동인 북행을 감행했다. 하지만 실낱같은 당신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구는 현실정치의 패자였다. 당신에게는 외세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그 다음 당신이 어떻게 되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해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고 풍찬노숙으로 온갖 쓴 맛을 다 본 독립운동의 선봉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어찌 그 정도 모르겠는가. 평생동지 조소앙이, 측근(김덕은 ․ 박동엽)들이, 심지어는 당신 아들조차도 죽음의 그림자가 구름처럼 몰려오니 몸을 피하라고 당부했지만 김구는 끝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김구는 국토가 두 조각난 38선 위에 누군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기꺼이 그 제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누군가 분단의 제물로 장엄하게 피를 흘려야 이 나라에 그나마 민족혼이 살아남을 거라고 김구는 진작부터 헤아리고 있었다.

김구는 망명지 중국에서 환국 후 늘 이봉창, 윤봉길 등 젊은 한인애국단원 동지들을 사지로 보낸 것이 죄스러웠다. 김구는 환국 후 남도 순회에 나서 1946년 4월 26일에는 예산 윤봉길 의사 생가를 찾아 부인에게 큰절을 드리며 사죄했다. 당신이 죽고 젊은 그들이 살아 돌아와야 했는데 당신이 살아오고 그들을 사지에 보낸 게 늘 미안했다.

그런 가운데 안두희의 권총이 당신의 심장을 겨누었다. 예로부터 영웅은 죽을 자리를 알았다. 김구는 그 총알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당신은 이 나라와 겨레, 그리고 후세 역사를 위하여 희생양이 되신 거다.

첫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조국의 수호신에게 바쳤다.
두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당신이 사지로 보낸 동지들에게 바쳤다.
세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바쳤다.
네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이 나라 후세들에게 바쳤다.

누가 김구를 죽였는가?

몇 해 전 아무개 그룹 회장이 술집에서 폭행당한 차남의 보복을 위해 청계산에서 직접 쇠파이프를 들어 종업원을 폭행했다. 그 뒤 그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 직접 보복 행위는 회장의 체신머리 떨어진 행위로 많은 사람의 조소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그룹 총수의 수준과 체면을 여지없이 구겼다. 어떻게 보면 그는 칠푼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랄까, 아니면 순진한 인물이다.

그가 만일 영악한 사람이었다면 자기는 뒷짐을 진 채 비서들에게 한마디 했을 것이다.

"야, 니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내 자식 놈이 종업원에게 묵사발이 됐는데…. 당장 그만 둬."
"회장님! 미련한 놈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

비서는 조폭들에게 돈 몇 푼 던져주면 그 정도 일은 아무 말썽도 없이 끝났을 것이다. 회장님이 굳이 유치장에 가지도 않았을 거니와 돈도 훨씬 적게 들고 사회에 물의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개 회장은 손 안대고 코 푸는 방법을 모르는 돌머리 바보였다.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이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문서를 열람하는 것임을 알고 여러 누리꾼들이 성금을 모아줘 나는 그분을 모시고  NARA에 갔다. 하지만 NARA의 아키비스트(Archivist, 문서관리자)는 2001년 9.11사태 이후 반미를 자극할 수 있는 문서는 대부분 미 국무성이나 CIA 같은 곳에서 수거해 갔거나 'Destroyed(파기)'되었다고 하여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그때 우리를 지도해준 재미사학자 이도영 박사의 안내로 권중희 선생과 나는 2004년 2월 25일, 버지니아 주 남쪽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 갔다. 그곳에 비치된  앨범에는 1945년부터 한국전쟁 끝날 때까지 사진 자료가 많았다.

한국전쟁 중 농사꾼인 부역자들을 산골짜기로 데려간 뒤 그들에게 땅을 파게 한 다음 헌병들이 총살하고 삽으로 묻는 장면이다. 왼쪽 작업모를 쓴 이는 미 군사고문관이다.
 한국전쟁 중 농사꾼인 부역자들을 산골짜기로 데려간 뒤 그들에게 땅을 파게 한 다음 헌병들이 총살하고 삽으로 묻는 장면이다. 왼쪽 작업모를 쓴 이는 미 군사고문관이다.
ⓒ NARA(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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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좌익사범이나 부역자 처형은 하나 같이 한국 군인이나 경찰이 이를 집행했다. 그 숱한 총살 사진 가운데는 간혹 미국 군사고문관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도영 박사는 사진 속의 미국 군사고문관을 가리킨 뒤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고, 권 선생과 나는 아무런 말없이 한동안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누가 백범을 죽였는가? 안두희가 죽였다. 그럼 안두희는 누군가. 그는 우리 백성이었다.

글을 마치며

"But one can usually assume that where there is smoke there may be fire."
"하지만 연기가 있는 곳에는 불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쉽게 가정할 수 있다."
- 미 육군정보문서(Army Intelligence Documents) 1949년 6월 29일자 전문 398호 (문서번호 895.00/6-2949)

1946. 11. 환국 직전 장제스 총통이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 중국 상하이.
▲ 백범 김구 1946. 11. 환국 직전 장제스 총통이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 중국 상하이.
ⓒ 눈빛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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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세계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통상 점조직이며, 암살지령은 암시나 이심전심의 화법으로 내리는 게 불문율이다. 그래야 지령을 내린 자는 증거를 남기지 않고, 후일 상황에 따라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리발을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심전심의 화법은 동서고금 암살 세계의 기본상식이다.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표지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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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그 자는 새조국 건설에 방해되는 자야."

"000, 그 놈은 내 과거 목격자로 그 자식 주둥아리 때문에 아주 골치가 아파."
등등...

절대 권력자가 잔머리를 굴려 심복들 앞에서 이런 말을 뱉으면 그들은 스스로 알아서 긴다. 그러기에 그들을 심복(心腹)이라고 한다. 또 그래야 심복들은 그 자리를 유지할뿐더러, 숱한 이권과 호가호위의 권력을 휘두룰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 월간지에서 지난날 오랫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이후락이 그 장수의 비결로 "모시는 분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고백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심복 앞에서 불쑥 뱉은 이 한 마디는 바로 이심전심 화법으로 암살 암시요, 지령으로 돌변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김구 선생의 암살자와 추적자들의 고래 힘줄 같은 끈질긴 이야기 그리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다녀온 이야기를 오롯이 담으면서 암살 배후의 거대한 실체를 희미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독자들은 이 책의 행간 속에서 암살의 배후와 실체를 더듬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백범 김구 선생,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 그리고 암살자 안두희의 배후를 캐고자 끝까지 추적하여 그의 입을 연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선생 이야기다. 끝으로 마침내 안두희를 정의봉 몽둥이 찜질로 응징 처단한 박기서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1992. 2. 추적자 권중희 씨가 암살자 안두희(선글라스를 낀 이)를 백범 묘소로 데리고 간 뒤 왼쪽 곁에서 기자 회견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1992. 2. 추적자 권중희 씨가 암살자 안두희(선글라스를 낀 이)를 백범 묘소로 데리고 간 뒤 왼쪽 곁에서 기자 회견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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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안두희(1917~1996)]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 초기에 토지측량기사로 큰돈을 번 졸부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안두희 집안은 모든 재산을 공산당에게 몰수당했다. 안두희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그들 가족은 신의주바닥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청천강 강마을로 피신했으나 거기서도 쫓겨났다. 다시 의주로 갔으나 거기서도 쫓겨났다. 안두희는 공산당에게 세 번이나 쫓겨난 뒤 월남했다.

1947년 안두희 가족은 신의주에서 출발하여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온 뒤 한동안 처제네 집에서 묵었다. 안두희는 곧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이 무렵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의 정보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 11월, 안두희는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한 뒤 3개월 후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 4월, 안두희는 동향 홍종만의 주선으로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의 추천을 받아 당원이 되었다. 이는 김구 살해사건의 원인을 한독당 당내 내분으로 조작하려는 치밀한 음모였다. 마침내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한낮 경교장에서 그가 소지한 미제45구경 권총으로 김구를 향해 방아쇠를 네 번 당겼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43조(정치관여)와 제48조(살인)를 적용하여 총살형을 구형 받았다. 곧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종신형을 판결 받고 수감되었다.

안두희는 복역 3개월만인 1949년 11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상신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종신형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조치를 내렸다. 그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틀 뒤인 6월 27일 대전 육군형무소에 육군정보국 김창룡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육군형무소장에게 국방부장관의 안두희 잔형집행정지처분 명령서를 전하자 즉시 안두희는 석방되었다.

안두희는 1950년 7월 10일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방부 특명 제4호에 의거하여 육군 소위로 복직했다. 1952년 12월 25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새로 이기붕이 발탁되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두희를 그대로 두면 민심이 더욱 흉흉하다고 건의하여 안두희를 국방부 특명 제229호로 예편과 동시에 1계급 특진시켜 육군 소령으로 군복을 벗겼다.

이후 안두희는 김창룡, 그의 사후에는 이재학, 김진만, 이상철 등 자유당 권력 실세들의 비호로 강원도 양구에다 군납공장을 차려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기세등등하게 우리 사회 주류로 살았다.

[김용희(1921~2001)]

4·19 혁명 이후 백범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김용희 간사가 안두희를 잡는데 직접 발 벗고 나섰다. 이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에 중국 서주에서 광복군 지하공작원(김용희)과 냉면집 주인(안두희)으로 만난 구연이 있었다. 그래서 김용희 간사는 오래 전부터 안두희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김용희 간사는 1961년 4월 19일, 안두희가 어린 아들과 함께 종로2가에 모종을 사러 나온 것을 확인하고 거기서부터 신설동까지 지프차와 택시로 쫓기고 쫓는 추격전을 벌였다. 마침내 김용희 간사는 동묘 앞에서 안두희를 붙잡아 사건의 전말을 네댓시간 녹취했다. 이 녹취록으로 백범 암살 진상 일부가 세상에 밝혀졌다. 1995년 12월 국회법제사법위원회 백범암살진상조사위원회에서는 이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하기도 했다.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 선 곽태영 선생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 선 곽태영 선생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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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영(1936~2008)]

1965년 12월 중순, 전북 김제군 출신의 청년 곽태영 씨는 안두희를 응징하고자 수소문 끝에 강원도 양구로 잠입하였다. 곽씨는 안두희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행상차림으로 찾아 나섰다. 그는 안두희 군납공장이 있는 동네에다 하숙을 얻었다. 그 집에서는 안두희 공장이 환히 내려다보였다.

그는 동네사람에게 장사꾼이라고 속인 뒤 실제 그렇게 보이려고 이웃 여러 민가에 양말, 장갑 등을 팔기도 했다. 그러면서 안두희 공장에도 들러 군납공장 내부 구조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런 가운데 그해 12월 22일 마침내 군납공장에서 안두희를 발견하여 두 사람이 격투로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마침내 곽씨가 안두희 배 위를 올라탄 뒤 우물 옆에 있던 돌로 안두희의 머리를 내리치고 칼로 옆구리를 찔렀다.

곽태영씨는 곧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연행되고 안두희는 긴급히 서울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두 차례나 뇌수술을 받았다. 곽태영씨가 안두희를 두들겨 팬 상해죄로 1966년 7월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선고를 받은 뒤 풀려났다.

경교장 앞에 선 권중희 선생
 경교장 앞에 선 권중희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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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1936~2007)]

경북 안동 태생으로 1983년부터 10여 년간 안두희를 끈질기게 추적 응징했다. 1987년 3월 27일 낮 1시 10분경 서울마포구 성산동 마포구청 앞 버스정류장에서 권중희씨는 정의봉이라는 몽둥이로 안두희의 온몸을 두들겨 머리가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혔다.

이후에도 권중희씨는 계속 범인을 추적하여 안두희로부터 장은산 포병사령관에게 직접 지령을 받았다는 얘기, 사건 전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는 얘기, 미 정보장교로부터 지령이나 다름이 없는 암시를 받았다는 얘기 등 결정적인 자백 받았다.

하지만 곧 안두희는 기자회견장에서 '권중희의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다고 이를 전면 부인했다. 권중희씨는 안두희 사후에도 백범진상 배후를 규명하고자 2004년 1월 <오마이뉴스> 누리꾼의 성금으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까지 다녀왔다.

자신의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기서 선생
 자신의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기서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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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서(1948~)]

전북 정읍 태생으로 당시 경기도 부천에서 버스기사로 종사했다. 암살범 안두희를 자연사만은 시켜서 안 된다는 굳은 신념으로 1996년 10월 23일 안두희 집에 잠입하여 그 정의봉을 휘둘러 처단했다.

박기서씨는 곧 자수한 뒤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고,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 받았다. 청주교도소에서 6개월여 복역 중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현재 박기서 선생은 부천에서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는 바,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과 부패한 극우무리들이 활개치고 사는 세상보다 오히려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다고 했다.

덧붙이는 글 |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박도 씀 | 눈빛출판사 | 2013.03. | 1만3000원)



태그:#김구 , #암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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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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