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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의 글 중에 <국립도서관>이라는 시가 있다. 6연 26행으로 된 제법 긴 작품이다. 창작 연도는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5년 8월이다. 1955년이면 전쟁의 참화가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때다. 먹고 사는 일 자체가 여전히 '전쟁'과도 같은 시기였다. 전쟁의 총성은 멎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현실은 극도로 피폐했다.

이 시에는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좋은 일이다. 공부야말로 그 전쟁 같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수단일 테니까. 그런데 시인은 그런 게 못마땅했나 보다. 그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며 '설움'을 느끼고, "모독당한 과거"(1연 8행)와 "약탈된 소유권"(9행)을 생각한다. 이유가 뭘까.

도서관의 "우대(尤大)한 서책들"(4연)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역설적으로 "죽어 있"(4연)다. 그것들은 전쟁의 비극을 막아내지도 못했고, 지금의 피폐한 현실을 타개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 죽은 책들을 놓고 공부하는 일이 무슨 소용인가. 결국 세상은 "예언자가 나지 않는 거리"(5연)가 돼버렸는데 말이다. 김수영 시인은 그렇게 지혜로운 이가 사라진 현실을 외면한 채 죽은 책으로 헛된 공부나 하고 있는 1950년대의 청년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던진 것이다.

교육부는 전쟁 곧 날 거라 생각하나

교육부가 펴낸 학교현장 위기대응 매뉴얼 표지.
 교육부가 펴낸 학교현장 위기대응 매뉴얼 표지.
ⓒ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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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운 2013년 4월의 한반도에, 김수영 시인이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일이 펼쳐지고 있다. 전쟁 중에도 학생들의 교육과 공부를 세심하게 배려하겠다는 '친절한 교육부씨'가 그 주인공이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차분히 살펴보자.

어제(11일) 오후였다. 우연히 눈길이 간 출석부 꽂이함에 검정색 철끈으로 묶여 있는 종이 서류가 보였다. '학교현장 위기대응 매뉴얼 - 학교 및 교사용'이라는 제목의 7장짜리 매뉴얼이었다. 두 대의 다연장 로켓포와 포화로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건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표지가 무척 선정적이었다. 섬뜩함이 느껴지기조차 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매뉴얼을 찬찬히 살펴봤다. 매뉴얼 본문은 '후방지역 학교 위기대응'과 '인접지역 위기상황 발생 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등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위기 상황 발생 시에 학교와 교사가 취해야 할 조치 사항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에 내 눈길을 잡아끄는 내용이 있었다. '후방지역 학교 위기대응'의 '4. 직접적인 피해 중단 시'의 하위 단락인 '휴업 시 학습 대책, 계기교육 준비'(학교 조치사항) '계기교육 자료 및 수업계획 작성'(교사 조치사항) 등이 그것.

얼마나 친절하고 고마운 교육부인가. 그 어떤 나라의 교육부가 전쟁 중의 아이들 학습과 수업 결손을 막기 위해 이리도 세심한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매뉴얼을 전국 모든 학교의 누리집에 게시해 학생과 학부모로 하여금 보게 하는 정부 부처가 전세계에 또 있을까. 나는 우리나라 교육부가 학교를 온통 '매뉴얼'로 도배해 교사와 학생들을 그에 따라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로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런 교육부의 진가가 이번에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우리에게 전쟁이 일어날까. 아마 교육부는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좋다. 언론을 보면 분명히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휩싸여 있다.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그러니 어린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매뉴얼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선의로 볼 구석이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걱정이다, 되레 아이들이 더 불안해 할까봐

매뉴얼에는 상황별 조치사항이 명시돼 있다. 위 이미지는 '인접지역 위기상황 발생 시' 교사 조치사항 내용.
 매뉴얼에는 상황별 조치사항이 명시돼 있다. 위 이미지는 '인접지역 위기상황 발생 시' 교사 조치사항 내용.
ⓒ 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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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번 찬찬히 따져 보자. 과연 전쟁 중에 매뉴얼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혹여 매뉴얼을 잘 숙지해 그대로 한다고 해서 포화의 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가령 대한민국 학교에는 있지도 않은 지하대피시설에 어떻게 들어가란 말이며, 구경조차 못해 본 방독면은 또 어디 가서 구해다 쓰란 말인가. 매뉴얼을 따른다고 한참 진행되던 포격이나 공습이 중단됐을 때 건물과 건물 사이로 대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도대체 이런 내용들이 교육부의 누구 머리에서 어떻게 나와 매뉴얼을 채우게 됐는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이런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매뉴얼을 만들어 보급하겠다고 나선 교육부의 행태가 더 한심스럽다. 600만 명이 넘는 대한민국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정부 부처이니 무엇인들 소홀히 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이런 형편 없는 매뉴얼을 보고 차분하게 전쟁을 대비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히려 이런 매뉴얼이 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대다수 교사와 학생들을 불안하게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철끈에 묶인 이 매뉴얼을 들고 가 우리 반에 걸어둬야 한다. 교무부장의 말을 들어 보니 교육청을 통해 내려온 교육부의 공문에 그런 지시 사항이 있었다고 한다. 지시 사항이니 따라야겠지만, 우리 반 아이들 반응이 걱정된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 나면 우리 모두 죽어요?" 불안스레 묻는 일부 아이들이 더 예민해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대다수는 '이건 뭥미?' 하며 냉소적으로 바라보겠지만 말이다.

하기야 대한민국에는 전쟁이야 나든 말든 자기 공부만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훨씬 많으니, 이런 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교육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교육부의 말을 듣지 말고 그들과 반대로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장 물정을 잘 모르는 책상머리 교육 관료들이 휘황하게 치장된 교육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양산하는 행태를 꼬집는 말이다. 그러니 멀쩡한 아이들 위한답시고 매뉴얼을 만들어 보급하는 '고마운 교육부씨'에게 한마디 해 주고 싶다.

"제발 너나 잘하세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위기 대응 매뉴얼, #전쟁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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