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야 임마! 차에서 안 내려?"

대대장의 불호령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서야 식은땀이 몸을 적시고 있음을 느꼈다. 차에서 내려보니 내가 운전한 군용 지프차가 '싸제(군대에서 군대 외 물품을 이르는 말)' SUV 차량을 박살낸 것. 입대 5개월 차 이등병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상황이었다.

'아... 군생활 끝났구나.'

이등병이 생각하는 '군생활의 끝'은 말년 병장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법이다.

장롱 면허 소지자가 운전병이라고?

2007년 9월 18일, 친구 세 놈과 함께 비를 맞으며 의정부 306보충대로 입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끔찍한 일을 겪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07년 9월 18일, 친구 세 놈과 함께 비를 맞으며 의정부 306보충대로 입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끔찍한 일을 겪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소중한

관련사진보기


2007년 9월, 머리를 박박 민 채 의정부 306보충대로 입대했다. 대개 보충대에서 3일 정도 머무는데 떠나기 전날 배치받을 훈련소와 자대를 알려준다. 내 이름 옆에는 '20사단, 3야수교'라고 적혀 있었다. 훈련을 받게 될 '20사단'은 군인이 아니어도 알 만했다. 하지만 '3야수교'는 도통 감이 안 잡혔다. 주변인이라고 해봤자 고만고만한 '장정'(보충대에 머무는 동안 입대자는 장정이라 불린다)들이라 물어볼 곳도 없었다. 그러던 중 보충대 생활 초기부터 해박한 군대 지식을 풀어놓던 무테안경 녀석이 한 마디를 던졌다.

"너 운전병이네."

3야수교는 '제3야전수송교육단'의 줄임말로 운전병이 자대에 가기 전, 운전 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장롱 면허' 소지자가 운전병이라니... 남들은 '땡보'라며 부러워 했지만 영 찜찜했다.

흔히 몇 안 되는 '남자의 로망' 중 차를 많이 꼽지만 내게 그것은 관심 밖이었다. 외제차를 독일차·미국차·일본차 정도로 분류하던 게 내 수준이었다. 어릴 적 집에 있던 '각 그랜저'라 불리던 구형 승용차 외엔 다 똑같은 승용차로 보였다. 하지만 3야수교의 동기들은 반대였다. 외제차 이름을 줄줄 외는 건 기본, '배기량이 어쩌니, 엔진 출력이 저쩌니' 하는 게 내게 위화감을 줄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3야수교에서의 교육을 마치고 도하공병대대란 곳으로 배치됐다. 부대의 주된 임무는 병력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드는 것. 교량가설단정(보트)을 이용해 '교절'이라 불리는 다리 조각을 조립했다. 보트와 교절들을 5톤 무게의 대형차량에 싣고 다녔기 때문에 도하공병대대는 병력의 약 70%가 운전병이었다.

그런데 자대 배치를 받은 날, 어쩌면 군생활 중 운전을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하공병대대에 있는 대부분의 차량은 보트와 교절을 실은 대형차량인데 나는 소형차량 운전병이었기 때문이다. 운전병은 소형·중형·대형차량 운전병으로 나뉜다. 대형차량 운전병이 소형차량을 운전할 순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소형차 운전병의 정원이 생겨야, 즉 소형차를 모는 운전병이 전역을 해야 운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대에 소형차는 고작 3대 뿐. 최악의 경우 야전공병과 함께 다리를 조립하는 임무를 맡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군토나', 내 애마가 되다

2010년 초, '100일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며 기차역에서 찍은 사진. 복귀 후 대대장 운전병으로 '간택'됐다.
 2010년 초, '100일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며 기차역에서 찍은 사진. 복귀 후 대대장 운전병으로 '간택'됐다.
ⓒ 소중한

관련사진보기


그러던 중 대대장 운전병이 전역을 앞두고 있다는 '희소식'이 들렸다. 대대장은 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보통 계급은 중령이다. 영관급 지휘관에겐 지휘차량이 보급되는데 이는 내가 운전할 수 있는 소형차량에 속했다. 운전병에게 영관급 지휘관의 운전병이 된다는 것은 최상의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대대장 운전병은 한 명의 병사가 오래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인지 막 자대배치를 받은 내가 후보군의 물망에 올랐다는 말이 오갔다. 다른 후보자들과 면접까지 가는 경쟁 끝에 나는 대대장 운전병으로 낙점됐다. 흔히 '대대 1호차'라 불리는 대대장의 지휘차량이 내 '애마'가 된 순간이었다.

'군토나'라고 불리는 K-131.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한 '레토나'의 군용 버전이다.
 '군토나'라고 불리는 K-131.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한 '레토나'의 군용 버전이다.
ⓒ 위키백과

관련사진보기


최근 케이블 채널 tvN의 '푸른거탑'에서 소개된 '군토나'가 내가 몰게 된 애마였다. 정식 명칭은 'K-131'로 기아자동차의 지프차 '레토나'를 군용으로 개조한 것이라 군토나로 불린다. 주로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용 차량이나 참모·순찰·행정용 차량으로 사용된다.

군토나는 1988cc 4기통 수랭식 가솔린 엔진에 전진 5단·후진 1단의 변속기를 지녔다. 최고속도 144km/h를 낼 수 있으며 타이어 펑크 시에도 교체 없이 45km/h 속도로 48km 이상 이동이 가능하다. 군대 차량 중 가장 기동력이 좋으며 비교적 '높은 사람'이 타기 때문에 고급차로 통한다. 더군다나 내가 몰게 된 군토나는 2004년식이라 군용차치고는 신형 중에서도 'A급' 신형이었다. 클러치 유격(헐거운 정도)의 느낌도 요샛말로 '살아 있었다'.

사이드미러의 거짓말... 박살 난 '싸제' 차

'군토나'는 최근 캐이블 채널 <tvN> '푸른커탑'의 소재로 사용되면서 이슈가 됐다.
 '군토나'는 최근 캐이블 채널 <tvN> '푸른커탑'의 소재로 사용되면서 이슈가 됐다.
ⓒ tvN

관련사진보기


운전병에게 '내 차'가 생겼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운전병 중에서도 차를 배정받지 못해 이 차, 저 차를 전전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운전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개중에 운전하는 게 좋아서 운전병으로 '지원 입대'를 했는데 행정 업무를 보느라 아예 컴퓨터 앞에 죽치고 있어야 하거나, 정비만 하다가 군생활이 끝나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지원한 게 아닌 차출된 나로서는 대대장 운전병이라는 명확한 직명이 생긴 건 복이었다.

하지만 걱정거리는 있었다. 일단 운전에 자신이 없었다. 취득한 지 1년도 안 된, 그것도 장롱 면허 소지자가 수동 변속의 자동차를 몰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나는 비교적 '길치'에 속했다.

얼마 후, 사수(전임 대대장 운전병)가 전역하고 나는 비교적 큰 탈 없이 운전병의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주로 대대장이 영내 상급부대로 회의를 가면 그곳을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된 그날도 평소와 같이 회의가 끝나길 기다리며 주차장에 머물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여러 지휘관들이 나왔다. 대대장 운전병은 똑같은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지휘관'을 찾는 감각이 있어야 했다. 룸미러를 통해 후방에 있는 대대장의 위치를 확인했다. 사수가 인수인계를 하며 "대대장을 최대한 안 걷게 하는 게 중요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대로 후진을 했다.

초보들은 운전을 하다 보면 룸미러와 사이드미러가 가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실제보다 멀리 있게 보이거나, 직선으로 움직여도 그렇지 않게 보인다. 대대장을 향해 후진을 하는데 자꾸 사선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핸들을 조금씩 틀었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음료수캔이 지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당황한 나는 다시 차를 앞으로 몰았다. 또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찌그러진 음료수캔을 다시 펴다가 아예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격려와 위로,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소대원들 덕분에 즐겁게 마무리 한 군생활.
 소대원들 덕분에 즐겁게 마무리 한 군생활.
ⓒ 소중한

관련사진보기


일반 차량의 얇은 강판과는 달리 군용차는 말 그대로 '쇳덩이'다. 다른 차가 와서 들이받아도 군용차는 멀쩡하고 들이받은 차가 큰 파손을 입는 경우가 많다. 그런 쇳덩이로 일반 차량을 대패로 갈 듯 짓이겼으니 그 차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뒤처리가 잘 됐느니, 보험료로 얼마가 나왔느니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들렸다. 내 관심은 오로지 내 신변의 문제였다. 사고를 낸 후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생활관에 격리되다시피 앉아 있는데 선임들이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난 생활관의 막내였다. 긴장감이 밀려왔다. 분명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선임들에게도 전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4개월 차이가 나는 선임의 첫 마디는 의외였다.

"야, 괜찮냐?"

처음엔 하도 주눅이 들어 '내가 괜찮냐는 건지, 차가 괜찮냐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다른 소대원들도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이등병 때 사고 난 적 있어"라고 격려를 해줬다. 비로소 마음이 좀 놓였다. 대대장도 사고 당시엔 불호령을 내렸지만 "좀 더 교육을 시켜서 다시 올려보내"라고 중대장에게 명령했다. 질타보단 공감과 격려를 보내준 소대원들과 기회라는 가능성 준 대대장 덕분이 나는 책임감과 자신감을 얻었다.

우스갯소리로 '좌천'이라 표현했지만 운전교육도 하고, 정비도 배우면서 소대원들과 뒹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5개월 정도의 시간은 매우 소중했다. 사실 대대장 운전병을 하면 대대장실 앞에서 항상 대기를 했기 때문에 소대원들과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다. 같은 소대원임에도 그들이 일과시간 중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5개월간의 좌천 생활과 대대장이 다시 운전병으로 불러준 덕택에 나의 군생활은 탈 없이 마무리됐다.

지금도 간혹 이 일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방식이 '좋은 것'인지를 생각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효과'와 '효율'을 핑계 삼아 사람을 기계 취급하는 경우를 본다. 내가 만약 엉터리 운전병으로 낙인 찍혀 필라멘트 끊어진 전구마냥 버려졌다면, 개인적인 자존감은 물론, 조직을 위해서도 이롭지 않았을 것이다. 강제로 다듬어진 충성도와 자연스레 생긴 충성도는 그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역하던 날, 군토나의 조그만 흉터를 마지막으로 보고 나왔다. 남들은 잘 모르는, 나만 아는 흉터였다. 사고 당시엔 끔찍했지만, 그 흉터가 내게 준 것은 참으로 컸다.


태그:#군토나, #운전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