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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일장에 처음 참가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가 다닌 학교는 섬진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회는 순천에서 열렸다. 순천은, 우리 학교를 나와 재를 하나 넘어서면 있는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탄 후 30~40분을 달려야 당도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때 순천은 내게는 결코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대도시'였던 셈이다.

나는 그 순천에서 열린 한 백일장에 나가기 위해 선발된 학교 대표들 중의 하나였다. 어떤 경위로 내가 학교 대표가 되었는지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어쨌든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대표가 되어 외부 백일장 대회에 가는 건 나름대로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영광'을 떠올리기에 나는 그때 아직 많이 어렸다. 그보다는 순수(?)했다고 해야 하나. 소박한 산자락 사이의 시골 학교를 다닌 내게 학교 밖을 나서는 일, 그것도 '대도시' 순천으로 가는 일은 무서운 긴장일 뿐이었다. 나는 그때 영락없는 촌놈이었던 것이다.

 어제(4일) 열린 백일장에서 나란히 앉아 진지하게 글을 쓰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
 어제(4일) 열린 백일장에서 나란히 앉아 진지하게 글을 쓰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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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그 전날에 선생님께서 내게 몇 시까지 역으로 나오라고 하신 말씀은 까맣게 잊고-처음부터 아예 의식하지 않았다고 해야 맞다-아버지, 어머니, 누나들과 함께 마을 뒤편에 있던 된비알(몹시 험한 비탈) 밭으로 갔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식구 모두가 일손을 합해 그 비탈밭에 콩을 파종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을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담임 선생님께서 헉헉거리며 밭쪽으로 올라오고 계시는 것이었다. 백일장 대회에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헐레벌떡 동네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역에서 우리 마을까지는 잰걸음으로 해도 20여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선생님께서는 나보다 더 깜짝 놀라시는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말씀하시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렇지만 그때 아버지 표정은 얼마나 기쁨으로 넘치셨던가. 변변찮은 시골 촌놈 하나를 백일장에 데려가자고 선생님이 직접 달려왔으니 그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셨겠는가.

하지만 정작 나는 죽을 맛이었다. 순천은 내게는 낯선 대도시(?)였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두려움과 긴장을 떨칠 수 없었다. 동순천 역에 내려 백일장 대회가 열리던 순천 죽도봉 공원으로 걸어 올라갈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백일장이 열리고 있던 공원 팔각정 주변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멘붕' 상태였다.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팔각정 다락 위로 이끄셨다. 그제서야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란스러운 듯 고요히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크고 작은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 기다랗게 뻗은 순천시내 모습도 보였다. 나는 마음이 곧 자차분해졌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갖다주신 원고지에 이름을 쓰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나는 그때서야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내 살갗을 간질이던 시원한 초여름 바람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낯선 도시의 이름 모를 아이들 사이에 있었지만 나는 한껏 기분이 부풀어 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모두 한꺼번에 고개를 파묻고 글을 쓰는 광경에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취향(?)에 맞게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 최대한 자유롭게, 많이 참여해라

 학교 강당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글을 쓰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 최대한 편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글을 쓰도록 했다.
 학교 강당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글을 쓰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 최대한 편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글을 쓰도록 했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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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학교에서 백일장과 논술대회를 열었다. 이번에는 전체 학년 합해서 모두 200여 명 가까운 아이들이 참가했다. 이 숫자는 작년보다 늘어난 것이다. 그제까지만 해도 참가 희망자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갑작스레 각 반별로 신청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백일장과 논술대회는 최근 몇 년째 내가 직접 꾸려오고 있다. 행사 기획과 기안, 실제 행사 준비 및 실행 등을 혼자하고 있는 것이다. 국어과 선생님들과 협의하여 진행하면 품이 줄어들긴 한다. 대신에 서로 조율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내 취향(?)에 맞게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홀로 꾸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취향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먼저, 되도록 많은 아이들이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일장이나 논술대회는 일 년 이맘때쯤에 딱 한 번 있는 행사다. 자주 있더라도 백일장이나 논술대회는 글쓰기에 관심이 있거나 재주가 좀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경연장쯤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이들 행사를 무슨 '특별한' 연례 행사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이 싫었다.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는 아주 바쁘고 빈틈없이 돌아간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금방 쓰러질 지경이다. 숨돌릴 겨를도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을 가다듬는 여유를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백일장이나 논술대회는 그런 사색과 성찰 등을 펼칠 수 있는 마당으로 딱 그만이다.

다음으로 백일장의 일반적인 틀을 허물고 조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글제를 제시하지만 제목을 자유롭게 하게 하는 것이나, 형식과 분량을 되도록 엄격하게 하지 않는 것 등은 사소하지만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아이들이 널찍한 강당에 삼삼오오 모여 앉거나 둥근 모양으로 엎드린 채 글을 쓰는 광경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친구와 함께 담요를 덮고 바닥에 배를 깐 채 편한 자세로 글을 쓰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 편안하면서도 진지한 상황에서 솔직하고 멋진 글이 나온다.
 친구와 함께 담요를 덮고 바닥에 배를 깐 채 편한 자세로 글을 쓰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 편안하면서도 진지한 상황에서 솔직하고 멋진 글이 나온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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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아이들은 대체로 글쓰기 경험이 많지 않다. 학교에서 글쓰기를 하더라도 정해진 격식과 틀에 맞춰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억지로 써 내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초등학교 일부 교실에서는 담임이 아이들에게 일기 제목을 미리 제시하여 과제로 써오게 하는 데가 적지 않다. 아이들이 일기쓰기를 싫어하고, 더 나아가 글쓰기 자체를 힘들어하는 데 이런 교육방식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글쓰기는, 그것이 백일장이든 수업 시간 중의 작문 활동이든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자유롭게 쓰게 하는 게 좋다.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 타래를 마음껏 풀어 헤치고 깊은 속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렇게 쓰이는 글이 내면을 성숙하게 하고, 혹여 상처 입은 영혼을 진정으로 치유하게 되는 건 아닐까.

백일장(白日場)은 옛날 유생들이 글재주를 겨루어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펼쳤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관리 임용과는 무관하게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의 학업을 장려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주로 대낮에 했기 때문에 '백일장'이라는 말이 붙었는데, 밤에 하는 '망월장(望月場)'도 있었다고 한다. 그 어떤 경우든 글쓰기를 장려하자는 기본 정신만은 돋보이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런데 요즘의 글쓰기 행사들은 그것이 백일장이 되었든 논술대회가 되었든 글쓰기 자체가 중시되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조직)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글쓰기에 참가하는 이들도 이력 관리 차원에서 동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글쓰기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자기 성찰과 사색 등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제 내가 백일장 글제를 '나'로 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순천 죽도봉 공원에서 있었던 내 생애 첫 백일장의 기억은 조그만 상장 하나로 마무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유 없이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중고등학교 때는 국어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질문 세례를 퍼붓더니, 결국은 대학을 '국물도 없는'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게 되고, 급기야는 국어 교사를 평생 직업으로 갖게 된 내 삶의 맨 첫 지점에 바로 그 백일장의 강렬한 기억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맨 첫 지점에 바로 그 백일장의 강렬한 기억이 자리잡아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열심히 글쓰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어제 백일장에 참가한 우리 학교 아이들 모두에게 특별한 느낌의 한 순간이 왔기를 바란다.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열심히 글쓰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어제 백일장에 참가한 우리 학교 아이들 모두에게 특별한 느낌의 한 순간이 왔기를 바란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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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가공할 '입시 지옥'에서 질식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온통 성적과 진학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들이 생의 어떤 강렬한 한 순간, 깊은 인상을 받고 감동을 얻기도 하는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내가 팔각정의 다락에서 느낀 그 벅찬 감동을, 단 한 순간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화롭고 여유로운 강당 백일장을 앞으로 더욱 알차게 꾸려가겠다면서 함께 떠올려본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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