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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백범 김구 선생이 시해되신 지 어느새 64년이 흘렀다. 그날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암살범 안두희를 둘러싼 백범 시해사건 배후는 아직도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그동안 시계 제로의 컴컴한 암흑 속에서도 암살범을 끈질기게 추적 응징하고, 그 진상을 밝히고자 고군분투한 의인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김용희·곽태영·권중희·박기서 씨 등이다.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지만 나는 기록자로서 2003년부터 곽태영·권중희·박기서씨를 만났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김구 선생 곁을 지킨 비서 선우진 선생도. 그뿐 아니라 <오마이뉴스> 여러 누리꾼의 성원으로 4000여만 원의 성금을 모아 백범 암살배후 진상규명을 위해 2004년 1월 31일부터 그해 3월 17일까지 NARA(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40여 일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다큐 작가·시민기자로서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를 더듬었다. 취재 1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20일에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나는 그때 성금을 보내준 <오마이뉴스> 1000여 누리꾼과 성원을 해주신 올드팬에게 은혜를 보답하고자 그 일부를 연재한다.

만년의 백범 김구 선생
 만년의 백범 김구 선생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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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청년들과 헌병들 경교장을 에워싸다

"아무 일 없습니다. 지금 선생님은 집무실에서 창암학원 여선생님과 담소중이십니다."

이국태 비서는 김덕은씨의 전화를 받고  아무런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전화 감사합니다."

김덕은씨는 그날 아침 인쇄소로 출근하는 길에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아침에 서대문로터리 적십자병원 앞을 지나오는데 그 일대에 헌병 여러 명이 모여 있어 뭔가 예감이 찜찜하여 일부러 경교장 부근까지 갔더니 거기에도 서너 명의 군복청년들이 서성이더라는 얘기였다. 그 친구는 김덕은씨가 백범 측근인 줄 알고 그 얘기를 전하기에 이상 여부를 확인한다고 했다.

안두희는 그 통화 내용을 다 엿듣고서도 의뭉스럽게 비서실 의자에 태연히 앉아 비서들에게 신형 대포 얘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비서들은 안두희의 대포 얘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다. 그 무렵 신형 대포는 대단히 신기하고 생소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비서실로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박동엽 대광학교 교감선생이었다. 박동엽은 그날따라 정문 경호순경이 출입을 허락지 않아 경교장 앞 자연장 다방에서 전화를 건다고 했다.

"제가 바로 경호실로 연락할 테니 곧바로 오십시오."

이풍식 비서는 곧장 전화를 끊고 경호실로 연락했다.

"경호실, 대광학교 박동엽 선생님이 오시면 곧장 들여보내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박동엽은 전날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의 신변을 조심하라고 일렀지만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에 다시 찾아왔다. 웬일인지 그날은 정문 경호순경이 면회를 허락지 않았다. 박동엽은 하는 수 없이 가까운 자연장다방에 가서 비서실에 연락한 뒤에야 경교장으로 들어왔다.

박동엽은 세 비서들과 인사를 나누며 실내를 둘러보자 조금 떨어진 곳에 군인이 앉아 있기에 섬뜩한 마음에 이풍식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누구요?"

이풍식도 귀엣말로 대답했다.

"안두희 소위입니다. 이전부터 김학규 장군과 여러 차례 온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박동엽은 그가 김학규 장군과 여러 번 출입한 군인이라고 하기에 안심했다. 게다가 박동엽이 이미 들은 정보로는 민간인 홍종만을 의심한데다가 김구에게 위해를 가할 자가 대낮에 단독으로 범행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날 박동엽이 경교장을 찾은 것은 비서들에게 그날 저녁을 특별히 경계하라고 일러주고자 왔다. 그래서 박동엽은 더 이상 안두희를 의심치 않았다.

백범 생존 때의 경교장
 백범 생존 때의 경교장
ⓒ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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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잡이

잠시 후 또 다른 군인이 경교장에 불쑥 찾아왔다. 그는 육군 헌병특별수사대 강흥모 대위였다. 그는 김구와 동향인으로 임정시절 백범이 그의 성도군관학교 입학에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는 문산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차에 휘발유가 떨어졌습니다. 한 초롱 얻어 갑시다."
"그러시죠."

선우진 비서는 이국태에게 그가 타고 온 지프차에 휘발유를 넣어 주라고 지시했다. 주유가 끝나자 강흥모는 이국태를 따라 비서실로 들어왔다.

"기왕 왔으니 주석 선생님께 잠깐 인사나 하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선우진이 자리에 일어나 영접했다.

"아, 기다리는 손님이 계시는구먼."

젊은날의 안두희
 젊은날의 안두희
ⓒ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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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안두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누구시죠?"
"포병사령부 소위 안두희입네다."
"나, 헌병 특별수사대 강흥모 대위요."
"아, 네. 반갑습네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인사를 주고받으며 악수했다. 그때 김구 선생님과 얘기를 마친 창암학원 여선생님이 2층에서 내려왔다.

"안 소위 바쁘지 않으면 내게 잠깐만 양보해 주시오. 주석 선생님께 문안인사만 드리고 가지요."
"그러시라요."

강 대위는 2층으로 올라간 뒤 백범 선생에게 문안인사를 드린 다음 곧장 내려왔다.

"안 소위, 양보해 줘서 고맙소."
"뭘요. 일없습네다."

강 대위는 대기실을 나서며 비서들에게도 인사를 남겼다.
(기자 주 : 후일 추적자 김용희 선생의 녹취록에 따르면 이 날 강 대위는 바람잡이로 2층 백범 집무실을 염탐한 뒤 안두희에게 저격 가능 여부를 알려주었다.)

"휘발유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비서들이 합창하듯 배웅 인사를 했다. 강흥모 대위가 떠나자마자 안두희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제 내 차래디요(차례지요)."
"그럼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일없습네다."

선우진은 앞장서 안두희를 2층으로 안내했다. 그때 김구는 책상에서 다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선생님, 포병사령부 안두희 소위가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그래? 가까이 오라고 해."

안두희는 2층 복도에서 거수경례를 한 다음 김구에게 다가갔다. 선우진은 안두희를 그대로 둔 채 점심을 채근하고자 지하 부엌으로 내려갔다.

해방된 역마차

"탕! 탕! 탕! 탕!"
"쨍그랑~"

잠시 후 2층 김구 집무실에서 네 발의 총소리가 연속으로 울렸다. 그리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도.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정작 아래층 대기실에서는 그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그것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 때문이었다. 그날 서울 중앙방송은 12시 정오 뉴스가 끝나자 '정오의 가요' 시간으로, 그 무렵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장세정의 <해방된 역마차>를 방송했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누구를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삼각산 돌아보니 별들이 떴네

자유의 종이 울어 8·15는 왔건만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 우느냐


그 시각 1층 비서실에서는 이국태와 이풍식 비서, 그리고 방문객 박동엽은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날 점심 메뉴는 김구가 좋아하는 만둣국으로, 선우진 비서는 점심 준비를 채근하고자 지하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때 부엌아주머니가 막 만둣국을 다 끓인 뒤 국자로 대접에 옮겨 담고 있었다. 선우진은 가장 먼저 담은 만둣국 대접을 김구 진짓상 소반에 옮겼다.

바로 그때 네 발의 총소리와 함께 경교장 2층 집무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부엌에서도 그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하였다. 천만다행으로 경교장 정문 경호실에서는 그 소리를 들었다. 경호순경 조기행과 유원선은 난데없는 총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후다닥 카빈총에 실탄을 장전한 탄창을 꽂아 들고 총소리가 울린 본관으로 잽싸게 달려왔다.

"방금 2층에서 총소리가 났습니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도 났습니다."

두 경호순경은 1층 비서실 문을 후딱 열어젖히며 다급하게 외쳤다.

"뭐라고요?"
"뭐요, 총소리가!"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경교장으로 달려와 뜰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 미국인 사진작가 칼 마이던스(Carl Mydans) 씨가 경교장 2층 시해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안두희가 쏜 총알 네 발 가운데 두 발의 총알이 김구 선생의 옥체를 관통한 뒤 집무실 유리창을 뚫었다. 유리창에는 두 발의 총알이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다.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경교장으로 달려와 뜰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 미국인 사진작가 칼 마이던스(Carl Mydans) 씨가 경교장 2층 시해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안두희가 쏜 총알 네 발 가운데 두 발의 총알이 김구 선생의 옥체를 관통한 뒤 집무실 유리창을 뚫었다. 유리창에는 두 발의 총알이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다.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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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피격되다

그 순간 비서들의 얼굴은 금세 백지장처럼 변했다. 지하 부엌에 있던 선우진은 그 웅성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후다닥 2층으로 뛰어올라 갔다. 이국태도 쏜살같이 선우진의 뒤를 따랐다.

경호순경들은 군화를 신은 채 비서실로 뛰어들어와 총소리가 난 2층 계단을 향해 카빈총을 겨누었다. 그때 안두희는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허겁지겁 2층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군모도 벗어 던지고, 어깨의 견장도 뜯어 버린 채 얼이 빠진 몰골이었다. 경호순경들은 직감 그가 총을 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카빈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야, 손들어!"
"총 버려!"

안두희는 그제야 손을 든 채 성큼성큼 계단을 다 내려온 뒤 소지한 권총을 의자에 던지고 중얼거렸다.

"내레(내가) 금방 선생님을 쏴시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경호순경들은 안두희에게 다가가 카빈총 개머리판으로 가슴을 쳤다.

"뭐야, 네놈이!"
"야, 이 원수 놈아!"

이풍식과 박동엽도 경호순경과 합세하여 안두희를 두들겨 팼다. 박동엽은 분을 참지 못하고 비서실 의자를 집어 안두희를 내려쳤다.

선우진과 이국태가 2층으로 뛰어올라 가자 한복 차림의 김구는 의자에서 고개를 숙인 채 얼굴과 가슴에서 피를 마구 쏟고 있었다. 두 비서는 떨리는 손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김구를 들어 방바닥에 눕혔다. 그런 뒤 선우진은 이국태에게 소리쳤다.

"이 비서, 어서 의사를!"
"네, 알겠습니다."

이국태는 후다닥 경교장에서 가장 가까운 서대문 네 거리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래층 이풍식 비서는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알고 곧장 성모병원 주치의와 서대문경찰서에 전화를 건 뒤 2층으로 뛰어올라 갔다. 박동엽도 안두희 두들겨 패는 일을 경호순경에게 미루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선생님!"
"백범 선생님!"

비서들과 박동엽이 선생을 부르짖었건만 김구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곧 이국태가 적십자병원 이기섭 외과과장을 데리고 왔다. 이기섭 의사는 김구의 피격 상태를 살핀 뒤 응급처치로 우선 팔에다 강심제를 놓았다. 뒤이어 성모병원 박병래 주치의도 헐레벌떡 달려왔다. 두 의사는 총탄 부분의 피를 거즈로 닦으며 상처를 살피고는 가슴을 누르며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하지만 김구는 의식을 잃은 채 마지막 긴 숨을 "푸~" 뱉었다.

안두희가 쏜 네 발의 총알 가운데 첫 번째 총알은 김구의 코 밑을 뚫고 오른쪽 볼을 빠져나와 유리창을 뚫었고, 두 번째 총알은 김구의 목을 정면으로 뚫은 뒤 유리창에 맞았다. 세 번째 총알은 김구의 오른쪽 가슴을 지나 폐를 뚫었고, 네 번째 총알은 김구의 아랫배를 관통했다.

주치의 박병래 박사는 청진기로 김구의 가슴을 검진하고 눈꺼풀을 뒤집어 눈동자를 살폈다. 적십자병원 이기섭 외과과장도 똑같이 검진을 했다. 두 의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인 뒤 박병래 주치의는 나직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급소를 맞아 많은 출혈로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그때 시침은 1949년 6월 26일 오후 1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그제야 비서들과 박동엽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 동안 숱한 사선을 용케 넘긴 김구는 해방된 조국에서 하필이면 동족의 흉탄으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김구의 춘추(나이) 일흔 넷이었다.

1949. 7. 5. 백범 국민장 장례 행렬이 한국은행 앞 남대문로를 지나고 있다.
 1949. 7. 5. 백범 국민장 장례 행렬이 한국은행 앞 남대문로를 지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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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계속)

[군말]

내가 매회 연재시작 때마다 맨 앞에 백범 선생의 사진을 넣는 것은 그 인품을 매우 존경하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백범 생애를 골똘히 살펴본 바, 한 인간으로 귀감이셨다. 백범 선생은 정치지도자로서의 덕성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혁명가다운 모범을 보이셨다. 매끼 진지도 국과 김치, 나물 등 세 가지 반찬만 올리게 하였고, 옷도 검소하게 주로 한복을 즐겨 입으셨다. 49세에 상처를 하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홀아비로 사셨다.

우리 동양권에서는 영웅호걸은 주색을 좋아한다고 하여, 자식이 있는 조강지처를 생계대책도 마련해 주지 않고 버린 뒤 신여성(어떤 정치지도자는 외국인)과 결혼하는 걸 다반사로 여겼다. 그리하여 전처나 그 자식들은 이국 땅에서 외로이 병사케 방치했거나 평생 그늘진 곳에서 눈물 흘리게 했다. 무지 무명한 백성들은 이러한 반인륜 행위에 대해 예로부터 영웅호걸은 '무치(無恥)'라 하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무슨 훈장처럼 치장, 이를 당연시하거나 관용했다. 그 결과 이 나라 가정문화와 윤리 도덕교육에 크나큰 해악을 끼쳤다.

백범은 이러한 전근대적인 인습을 과감히 혁파한 훌륭한 삶이기에 더욱 우러러 뵙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기사의 연재에서 가능한 백범 선생의 인물사진을 매회 맨 앞에 배치하려고 한다. 그분의 삶이 우리 백성들, 특히 정치지도자에게는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청교도처럼 사신 지도자만이 도덕이 땅에 떨어져 사회기강이 엉망이 된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박도 씀 | 눈빛출판사 | 2013.03. | 1만3000원)



태그:#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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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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