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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풀이 묻은 더러운 추리닝에 일주일 째 안 감은 머리, 쌓여있는 만화책과 24시간 꺼지지 않는 컴퓨터. 백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인터넷 검색 창에 '백수'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니 같은 말에 백수건달이 뜬다.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

나는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생, 그러니까 새내기 백수가 됐다. 그리고 원하지도 않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백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을 만난다.

백수라는 타이틀을 인정합니다

취업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와 <샐러리맨 초한지>의 한 장면.
 취업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SBS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와 <샐러리맨 초한지>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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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을 졸업한 지 한달 째, 어느 날 '조교실'이라는 이름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매년 학교에서는 전 학생들의 취업률과 각 과의 취업실적을 조사한다는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려 취업유무를 확인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취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는 일주일 내내 계속 됐고 나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며칠 뒤 친한 친구와 카톡을 하던 도중 친구가 말했다.

"OO이가 취업률 조사하는데 너 전화 안 받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원래 걔는 연락 잘 안 돼~ 이랬어."

대변인이 돼 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안심하고 있는데, 얼마 못 가 결국 전공교수님께 전화가 오는 바람에 고분고분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취업은?"
"아직 못 했어요." 
"생각하고 있는 데는 있니?"
"네. 준비하고 있어요."

전화를 끊은 뒤, '2013 졸업생의 취업률조사'에서 실업자 명단의 한 켠에 조용히 오르는 내 이름이 머릿속에 그려져 나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2. 일주일 전, 나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건강미 넘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러닝머신을 뛰고 있는데, 처음 본 트레이너가 반갑게 웃으며 내게 왔다.

"학생이세요?"
"아뇨, 취업준비중이에요."

그러자 트레이너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안 됐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더한다.

"아 그러시구나. 빨리 취업하셔야죠. "

운동을 다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들어가자 한 아주머니께서 내게 말을 걸었다.

"원래 낮에는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네. 저는 늘 이 때 오는데 항상 이래요~"
"그렇구나. 학생이에요?"
"아뇨... 이번에 졸업해서 취업준비중이에요."

그러자 이번에도 아주머니께선 쓴웃음을 지으며 충고의 한 마디를 더한다.

"취업준비? 열심히 운동해서 몸매 가꿔야겠네, 면접보려면."

#3.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모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기 위해 내 신상정보를 입력하다 '회원유형'이라는 칸에서 나도 모르게 학생을 클릭했다. '맞다 나 졸업했지' 하고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슬며시 마우스를 옮겼다. 순간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트레이너와 쓴웃음을 짓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학생과 직장인 사이에 끼어있는 취업준비생란을 클릭한다.
▲ 회원유형 학생과 직장인 사이에 끼어있는 취업준비생란을 클릭한다.
ⓒ 김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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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률조사를 한다는 학교의 전화에서, 처음 등록한 헬스클럽의 트레이너에게서, 처음 보는 아주머니에게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서, 취업하셨냐는 후배의 문자에서, 학원 상담원과의 전화에서, 심지어 인터넷에서 회원가입을 할 때조차 나는 백수라는 화려하지 못한 내 상황을 직시하고 만다.

나는 내 삶에 당당해지고 싶은데 백수라는 이름표를 단 이후 나는 어딜 가나 안쓰러움의 대상이 되고 만다.

20대 백수의 삶에서 빠지지 않는 '자기계발서'

얼마 전 일본에 있는 아는 오빠에게 '그것은 알기 싫다'라는 팟캐스트를 추천받았다. 제일 재미있어 보이는 방송을 찾다가 '안 아픈데 청춘이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와 클릭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딘 청년들은 끊임없이 힐링과 멘토를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20대 청년들은 자기계발서를 탐독한다.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들 때는 늘 자기계발서를 펼쳐 들고 밑줄을 긋는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위로의 말을 찾기 위해, 뒤늦게라도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혹은 빨리 성공하는 법이 있는지, 있다면 그 법을 배우기 위해 늘 자기계발서에 적힌 희망의 말을 찾는다. 나에게 반문해본다. 나도 그럴까?

문득 내 수첩을 들여다 봤다. 평소 자기계발서적을 쉼 없이 비판하던 내 수첩에는 '~하라'는 누군가의 조언과 '걱정하지 말라'는 힐링의 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수첩을 가득 채운 힐링의 말
▲ 내 수첩 수첩을 가득 채운 힐링의 말
ⓒ 김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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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외국어 공부를 하고 컴퓨터학원에 가고 꼬박꼬박 신문을 챙겨보며 일주일에 세 번 운동을 하고 책은 최소 한 권 이상 읽는다.

물론 이 일들은 뒤늦게 찾은 내 꿈을 위해서다. 놀고 먹는 백수건달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바쁘고 그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백수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하다. 백수가 된 이후로 '한 번 만나자'는 친구들의 전화에도 나는 '일주일에 한 명만'이라는 계획을 정해놓고 수많은 제안을 거절한다.

누군가 내게 뭐하냐고 물으면 취업준비 한다는 말과 함께 '이제 막 졸업했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 '잉여스럽지 않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혹은 '안쓰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백수라는 타이틀을 인식하게 될 때면 나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때마다 책이나 트위터를 뒤지며 위로의 한 줄을 찾아 수첩에 옮긴다. 20대 취업난, 청년실업 100만, 매서운 고용한파 등의 끔찍한 문구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젊은이들이여 힘을 내라'는 등의 꿈 같은 한마디로 눈을 돌린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 꿈꾸고 싶은 개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수첩에 적힌 위로의 말을 보며 한달차 새내기 백수는 오늘도 꿈을 꾼다. 백수라는 불안함에 쫓기지 않고 나아갈 수 있기를. 노력한 만큼 성과가 늘 따르기를.


태그:#취업, #백수,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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