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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태어난 첫째가 본능적으로 젖을 물었다
▲ 밥차의 시작 갓 태어난 첫째가 본능적으로 젖을 물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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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에 결혼해 오누이를 낳고 벌써 학부형이 된 친구가 서른둘에 첫 아이를 임신한 내게 출산이 임박하자 책 한권을 선물했다. 그리고 덧붙인 경험담.

"출산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모유수유의 고통은 아주 오래 지속되는 외로운 것이란다."

출산을 한 달 여 앞두고 모유수유 책을 읽었지만 겨울방학 때 혼자 미리 보는 다음 학년 교과서 같기만 했다. 그러나 출산 후 퉁퉁 붓고 화끈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치 성서를 보듯 밑줄 그어가며 그 책을 보고 또 봤다.

그렇게 시작된 길고 긴 모유수유의 날들. 2009년 11월 22일에 시작한 모유수유는 2013년 3월까지 계속되어 1200일을 넘겼다. 셋째 두 돌까지는 모유를 먹일 계획이니 앞으로 700일은 더 수유티를 입고 살아야 한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젖 먹이기는 셋째 출산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조금 익숙해졌다. 1200여 일간의 모유수유 경험담을 짧게나마 정리해본다.

1200여 일간의 '밥차' 기록

친정 엄마도, 시어머님도 젖이 충분했고 젖 물리며 아픈 일은 없었고 한다. 그래서 첫 아이 낳고 젖 물리며 비명까지 질러가며 우는 나를 의아하게 여겼다. 두 어머니들이 이러하신데 젖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살찐 가슴만 가진 남편은 나의 고통을 한 방울도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들 중에도 나처럼 고통속에 젖을 물린 경우는 겨우 두 명. 한 명은 나와 같은 편평유두, 다른 한 명은 더 심한 함몰유두, 그들만이 내게 눈물의 위로를 건넸다.

내가 아이가 젖을 물기 쉬운 유두가 아닌 편평한 모양의 유두를 가졌기 때문에 첫 아이는 매번 젖을 물 때마다 씨름을 했고, 겨우 문 유두를 놓지 않기 위해 제 모든 힘을 다했다. 이것이야말로 '젖 먹던 힘'이구나 싶었다. 그 덕분에 백일이 넘도록 내 유두는 갈라져 피가 나고, 딱지가 앉을 새도 없이 아이가 또 젖을 빨아대는 통에 아기는 내 피까지 먹곤 했다. (모유수유 책을 찾아보니 유두에 상처가 나도 계속 젖을 물려야 하며, 상처의 피는 먹어도 된다고 한다.)

  젖을 먹고 사랑을 확인하고
▲ 나란히 수유 젖을 먹고 사랑을 확인하고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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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고통을 참고 또 참고

하루에 많게는 스무 번 가까이, 매번 20~30분씩 젖을 빨아야 하는 아기도, 그를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엄마도 다 힘 들었다. 백일이 지나서야 유두의 상처는 가라앉았지만, 일반적인 유두 모양은 둘째 돌을 지나서야 어느 정도의 모양을 갖췄고, 젖을 물릴 때마다 찾아오는 유두의 통증은 셋째 출산 후 한 달이 되어서야 가셨다. 엄마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만 3년이 넘게 젖 물릴 시간이 다가오면, 닥쳐올 나의 통증이 두려워 나만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등을 돌리고 싶었다. (최근에야 편평유두를 수술로 개선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유두보호기를 착용하면 유두의 고통도 덜해지고 아기도 젖 빨기가 수월해지는데, 불행히도 첫 아이와 둘째 모두 유두보호기를 거부해 이마저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아마도 첫 아이를 임신한 많은 산모는 '완모'에 집착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완모', 모유만으로 아이를 기르겠다는, 분유는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엄마들의 결연한 의지를 '완모'라고들 한다. 젖을 짜서 젖병에 넣어 먹일 수 있지만, 그러면 엄마 젖꼭지와 젖병 젖꼭지를 혼동해 젖병보다 빨기 힘든 엄마 젖꼭지를 거부하는 유두혼동이 올 수 있다기에, 피 나고 살이 갈라지는 고통을 참았다.

그렇게 무리한 결과 첫 아이 출산 후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어느날 새벽. 나는 위경련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다. 진통제와 위염약을 먹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분유를 먹였다. 그러나 분유 알러지로 아이의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결국 하루 반 만에 위염약을 끊고 다시 젖을 물려야 했다.

반면 아기가 그렇게 쉽게 엄마 젖꼭지와 젖병 젖꼭지를 혼동하는 일은 없다는 걸, 오직 '완모'만이 정답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되도록이면 모유가 좋지만 엄마와 아기의 건강을 두루 살피며 적절한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

 나를 먹고 자라거라 쑥쑥!
▲ 나는 너희들의 밥차 나를 먹고 자라거라 쑥쑥!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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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산모들보다 초유도 일찍 돌고 양이 많아 다행이었지만, 갓 태어난 아기는 한쪽 젖을 다 비우기도 벅찼다. 양이 많은 경우엔 유축기로 짜서 고인 젖을 다 빼내야 한다는 의견과 짜면 짤수록 양이 많아지니 안 된다는 상반된 의견 속에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자 가슴은 젖으로 가득 차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출산의 진통만큼 엄마들을 힘들게 한다는 젖몸살과 유선염이 찾아온 것이다.

젖을 다 빼내지 못해 유선에 젖이 오래 고여 염증이 생기는 유선염. 심할 경우 항생제를 먹어야 하지만 대개의 경우 맛사지와 지속적인 젖 물리기로 유선염은 나아진다. 차가운 양배추를 얹어 열기를 가시게 하고, 맛사지를 해 뭉친 젖을 빼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아기가 젖을 계속 빨아 먹는 것. 배고프다 우는 아기를 안고 아프다고 엉엉 울며 젖을 물리는 엄마. 코메디 같지만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이다.

세 아이 키우면서 모두 유선염이 찾아왔는데, 둘째 때 가장 심했다. 마치 진통을 하듯 온몸이 아파 방바닥을 굴렀고, 40도까지 오른 열은 약을 먹어도 이틀이 넘게 지속되었다. 그래도 물려야 하는 젖. 더구나 둘째는 젖 먹는 양이 적었고, 그마저도 매번 소화를 잘 못시켜 토하고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또 젖을 찾았다. 유선염이 온 엄마도 힘들고, 유선염이 온 젖을 무는 아기도 힘들었던 세 번의 경험으로 먹고 사는 일이, 먹이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절박한 것인지 통감했다.

모두를 위한 선택 나란히 수유

세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 한 1200일 넘게 하루도 쉬지 않고 어떻게 수유를 계속했을까? 대부분의 경우 수유 중에 임신을 하면 수유를 중단한다. 수유 중 임신이 안전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유산이나 조산의 과거력, 쌍둥이 이상의 다태아임신, 자궁출혈, 임신 중 체중증가 불량, 조산의 징후가 있는 경우는 모유수유를 중단할 것을 권한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임신, 출산을 했던 나는 굳이 수유를 중단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수유중에 임신을 하니 유두와 가슴 통증은 더 심해졌고 젖 물리기도 힘겨웠다. 하지만 편평유두에 넘쳐나는 젖으로 고생했던 터라 고민 끝에 나란히 수유를 결심했다. 계속 젖을 먹여야 편평 유두가 조금이라도 자리를 잡을 수 있겠다 생각했고, 쉬었다 다시 젖을 먹이면 또 다시 유두가 헐고 피나는 고통을 겪을 것 같아 내린 결론이었다.

둘째를 집에서 낳다보니 진통하는 엄마를 지켜봤던 첫째의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젖을 물리는 일뿐이었다. 때문에 둘째를 낳자마자 우는 첫째와 둘째 모두를 안아 젖을 물렸다. 둘째 출산 후, 두어 달 넘게 양쪽으로 두 아이를 끼고 젖을 물려 아이들을 재웠었다. 젖가슴이 두 개인 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젖가슴이
▲ 둘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젖가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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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출산 후에도 첫째, 둘째 모두 젖을 먹였다. 첫째는 만 25개월에 자연스럽게 젖을 뗐지만 가끔 생각나면 한 번씩 젖을 먹곤 했다. 배가 고파 젖을 찾는 게 아니라 엄마품이 그리워서, 엄마 사랑을 확인하고픈 갈망이었다. 셋째 출산 이후 감정 기복이 심해진 둘째를 달래는데 최고는 당연히 젖을 물려주는 일이었다. 누나와 동생에게 치여 서럽게 엉엉 울다가도 "찌찌 먹자"는 말 한마디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한 웃음을 날리며 내게 안기는 둘째 녀석.

세 아이 모두 젖을 먹는다는 말에 친정엄마는 딸 건강 걱정에 한숨을 쉬셨지만, 세 아이가 돌아가며 젖을 빨아준 덕분에 셋째 때 찾아온 유선염은 비교적 수월하게 지나갔다. 산모의 건강이 허락한다면 나란히 수유를 권하고 싶다. 젖 먹이는 즐거움은 아이가 자라서 의사표현을 분명히 할 때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젖을 빨다 말고 "엄마 찌찌 맛있다. 엄마 찌찌 참 좋아!"라며 싱긋 웃어주는 아이를 안고 있노라면 그간 겪어온 고통들이 다 녹아내린다. 

나는 너의 밥, 나는 너의 생명줄

24시간 대기조처럼 언제 어디서든 가슴을 풀어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 날들. 처음엔 수유실을 찾아 젖을 물렸지만, 급할 때는 식당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젖을 물리며 아이들을 키워오고 있다. 간혹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젖병으로 분유를 먹이는 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가슴을 들춰 젖을 먹이는 건 왜 조심해야 하는 일인지 의문이다. 다 먹고 살자는 일인데 말이다.

 먹여 살리기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먹여 살리기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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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이의 밥이고 생명"이라는 어느 젖먹이 엄마의 말처럼 나는 아이들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것이다. 힘들고 아프다고 등을 돌려버리면 어린 젖먹이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모유가 아닌 분유를 먹인다 해도 매 시간 분유를 타 아이를 안고 정성들여 먹이는 엄마 그 자체가 아이의 밥, 아이의 생명줄이다.

셋째여서 더 모든 게 놀랍고 경이로운 육아의 날들이다. 셋 중에 가장 힘차게 젖을 빨고 많이 먹는 셋째가 젖을 배 불리 먹고 잠든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젖병 빠는 것 보다 60배나 힘들다 하는 엄마 젖 빨기. 내 젖꼭지가 헐고 피가 났던 것처럼 아이의 윗입술도 허물이 벗겨지고 또 벗겨지고 있었다. 20여 분 동안 벌리고 있었던 입 주위가 벌겋다. 아프다 힘들다 말도 못하고, 저 어린 것이 살겠다고, 자라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느껴진다. 젖을 먹으면 배가 불러 자는 줄 알았는데 고단해 자는 이유도 크겠다 싶다.

 너도 수고가 많다
▲ 젖 먹던 힘 너도 수고가 많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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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밥차 왔다!

내가 많은 부분 희생해서, 내 많은 부분을 나눠줘서, 내 피 같은 젖을 짜준 덕분에 아기가 자란다 생각했는데, 아이는 오로지 살기 위한, 자라기 위한 노력만으로 하루를 가득 채우며 살고 있다 생각된다. 앙상하던 아이는 한 달 만에 살이 올라 턱이 두 개가 되었고 볼도 부풀어 오르고 있다. 여전히 젖 먹이고 나면 등도 손목도 가슴도 다 편치 않지만 아이가 통통하게 자라듯 나도 단단하고 여유로운 엄마로 자라고 있으리라 믿으며 힘을 낸다.

남편은 여전히 농담처럼 "얘들아, 밥차왔다!"며 웃어대지만 아이들의 밥차로 사는 요 몇 년이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생명력 넘치는 건강한 시절이 아닐까 싶다. 목욕하고 한숨 푹 자던 셋째가 힘차게 울어재낀다. 그래, 간다. 너의 밥차가 간다! 나를 먹고 쑥쑥 자라거라.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마. 다만 한 가지 청이 있다면 네가 먹는 만큼 내 살도 좀 빠졌으면 좋겠구나. 부탁이다, 제발. 

 나도 엄마로 자라고 있다
▲ 아이가 자라듯 나도 엄마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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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유수유, #육아일기, #나란히수유, #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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