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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럽에서 한국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힘든 적이 있었다. 이런 현상이 동유럽에서는 더 심각했다. 그러나 한류가 전파되면서 이제 동유럽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더 이상 자동차나 IT 수출국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한류의 성공으로, 한국은 아시아 문화를 이끌어가는 문화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한국의 이러한 인지도가 대중문화산업에 집중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중문화산업을 뺀 다른 문화는 과연 유럽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을까?  리투아니아를 놓고 보자면 간간히 정트리오나 조수미 등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을 매장에서 볼 수 있으며 한국의 전통무용을 선보이는 예술인들의 방문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싸이나 소녀시대 등의 위치와 비교할 때 그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다.

리투아니아 서적박람회에 초대받은 소설가 하일지

리투아니아 대표적 일간지 중 하나인 15min과의 인터뷰에서 소설가 하일지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피력했다.
▲ "소설 <우주피스...>를 내가 사랑하는 리투아니아에 바칩니다" 리투아니아 대표적 일간지 중 하나인 15min과의 인터뷰에서 소설가 하일지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피력했다.
ⓒ 15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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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 문학은 어떨까?

리투아니아에서는 지난 2월 21일부터 24일까지 매년 열리는 서적박람회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리투아니아 출판시장의 현황을 점검하고 세계의 저명한 작가들을 직접 만나서 소통할 수 있는 무대가 바로 이 서적박람회다. 올해는 아주 특별한 한국작가 한 명이 서적박람회를 찾았다. 소설 <경마장 가는 길>로 유명한 소설가 하일지(본명 임종주)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방문을 하게 된 것. 2009년 한국에서 출판한 장편소설 <우주피스 공화국>의 리투아니아어 번역본 발간을 기념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작가협회 공식초청으로 독자들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 작품은 빌뉴스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인 '우주피스' 마을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강 건너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곳은 한때 빌뉴스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손꼽혔지만 최근 십여 년간 예술가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에 독특한 풍경을 만들었고,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빌뉴스 구시가지 이상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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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의 한 겨울, 이곳에 살고 있던 미국인 시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무런 준비 없이 찾아왔던 여행길의 추억에서 영감을 얻은 하일지는, 이 우중충하기 그지없는 리투아니아의 겨울을 환상의 무대로 바꾸어놓았다.

소설 <우주피스 공화국>에는 40대의 동양인 남자 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어린 시절, 가상국가 우주피스 공화국의 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서 유년을 보낸다. 그러나 우주피스는 주변국에 점령되었고 할의 가족은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우주피스 공화국이 마침내 독립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할은 아버지의 유골을 우주피스에 묻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입국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이 소설 속에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작가가 처음 리투아니아 방문 당시 친해진 리투아니아 친구들이 등장해 흥미를 끈다. 그 중에는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시인인 코르넬류스 플라텔리스도 있고 배우 겸 작가인 알비다스 실레피카스도 있다.

작년 12월에 리투아니아어로 출판된 이 소설을 직접 읽었거나 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독자들이 하일지 작가를 찾아와 행사는 큰 성공을 거뒀고, 빌뉴스, 카우나스, 샤울례이 등 리투아니아 주요 도시의 대학교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역시 성황을 이뤘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전에 없던 양국간 문학협력사업에 대한 뜻을 모은 것은 물론이다.

자신의 책을 가지고 온 리투아니아 독자들에게 일일히 서명을 해주는 작가 하일지.
 자신의 책을 가지고 온 리투아니아 독자들에게 일일히 서명을 해주는 작가 하일지.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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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단의 평가는 좋지만, 판매는 별로... 이유는?

그러나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 문학의 리투아니아 진출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됐다. 실제로 김영하의 단편집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가 2009년 필자가 참여해 리투아니아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흥부와 놀부, 심청전, 콩쥐팥쥐 같은 주옥 같은 한국의 이야기를 모은 민담집이 2004년에, 주몽신화, 단군신화, 바리데기무가 같은 신화가 수록된 한국의 신화집이 2006년에 각각 발간되어 문화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김영하의 작품은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일간지에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동급으로 비교될 정도로 수준 높은 작가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김영하 작품이나 이번 하일지 작품 모두 리투아니아 번역가협회에서 주는 그 해 '최고의 번역문학'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하의 경우는 애석하게도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외 여러 작품이 폴란드를 비롯한 스페인, 스웨덴, 독일, 프랑스 등에서 번역되어 큰 성공을 거뒀으나 리투아니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김영하의 소설집을 출판했던 출판사 관계자는 "출판 초기에 서점마다 가장 보기 좋은 곳에 게시를 하고 여러 매체에 집중적인 광고를 했지만, 비평가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판매로까지 연결시키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서적박람회에서 만난 출판사 관계자는 "아마 리투아니아의 유명작가가 한국에서 책을 발간했어도 이와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면서 "좀더 근본적인 문학의 교류가 있지 않으면 단순한 번역작업만으로는 성공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리투아니아가 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 좀더 구체적인 작가들의 교류가 있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는 남한이 아닌 북한 문학과의 교류였다.

1970년 대에는 소련 민족간 화합을 증진하는 차원에서 여러 소수민족의 동화집이 발간된 적이 있는데, 그때 <세가지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한국민담집이 출판된 적이 있다. 그 안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민담 뿐이 아니라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같은 우리의 고전이 소개된 적이 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바로 리투아니아의 유명 시인들이 우리나라를 주제로 한 시를 창작해 공동작품집을 낸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사회주의였던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북한에 대한 작품이 종종 발표되긴 했다, 얼마 전 타계한 폴란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도 사회주의 시절 '한국에서'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보면 '조선에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리투아니아에서 발간된 한국시선집 표지.
 리투아니아에서 발간된 한국시선집 표지.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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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처럼 한 나라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공동으로 시를 창작하여 헌정시집을 발간한 예는 극히 드물다. 1951년, 15명의 유명시인들이 공동으로 창작한 <조선에 관한 시들>이란 제목으로 틸비티스, 시리요스 기라, 쿠빌린스카스 등 대표적 시인들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이 작가들은 현재까지도 리투아니아 곳곳에 공원이 조성돼 있을 정도로 문학사에서는 인정 받는 인물들이다.

이들 시들은 한국전쟁을 소재로한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대부분 한반도를 침공한 미국의 사악함과 비인간적인 만행을 비판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에 관한 시들>은 현재는 단 한권만이 리투아니아 국립도서관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 책에 남아있는 자료에 의하면 도서관에 납본된 이후 아무런 대여사실도 찾아볼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리투아니아어로 번역된 <한국시선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남과 북을 통틀어서 가장 작품성 있는 작품을 모아놓았고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작품들도 실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오장환, 백인준 등을 빼놓고는 전혀 연혁이나 작품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작가가 없다.  <한국시선집>작품들에는 소련과 사회주의 영웅들, 김일성 같은 북한해방의 영웅들, 일제 당시 참혹했던 한국의 현실,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새로운 침략자들을 향한 증오의 메시지 등이 담겨 있다.

유럽에서 한국문학의 성공...리투아니아에서는?

유럽의 전반적인 상황에 비추어보면 리투아니아의 현실이 전혀 개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한국문학의 해외보급을 담당하는 한국문학번역원의 관계자에 따르면 황석영 의 <심청>, 오정희의 <유년의 뜰>, 이청준의 <이청준 소설선>, 김주영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등이 유럽 전반적으로 비교적 판매량이 많고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김영하, 조경란을 비롯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독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2003년 오정희의 <새>가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조직위원회가 수여하는 리베라투어 문학상을 받았고 2010년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여름휴가에 가져가야 할 문학도서 10종 중 황석영의 <심청>을 1순위로 꼽아 주목을 끌었다. 2012년에는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이 폴란드에서 '올해의 최고도서'로 선정되는 쾌거를 누리기도 했다. 발트3국에서는 에스토니아어로 한국의 신화집이 2011년에 출판되었고, 2012년 한무숙의 <역사는 흐른다>가 번역출판되어 한국문학이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세계문학의 보편성을 담지하면서도 한국문학의 고유성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 현지 독자들의 관심을 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최근 한국 젊은 작가들은 세계독자와 직접 호흡할 수 있는 보편성 있는 소재와 주제, 문체 등으로 인하여 한국문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리투아니아 같은 한국문학의 불모지인 지역에도 한국문학이 좀더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다양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함과 동시에, '소수민족'의 언어를 구사하는 인력이 드문 한계도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하일지의 차기작 역시 리투아니아어로 번역될 것으로 보이고, 이문열의 <리투아니아 여인> 역시 리투아니아어 번역작업 중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계속 이어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태그:#리투아니아, #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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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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