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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현 (주)오토 부회장
 김선현 (주)오토 부회장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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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김구 선생이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하던, '임정의 어머니'라고도 불린 독립운동가. 이쯤 소개하면 '수당 정정화'라는 답이 나와야 당연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랑스런 역사를 만든 선조를 잘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00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난 정정화는 부친 정주영이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로 낙향하면서 예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1살에 결혼한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한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남편 성엄 김의한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을 돌보고 한국애국부인회·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결성에도 참여했다. 그는 5척 단신 여성의 몸으로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에서 서울·예산 등을 오가며 목숨걸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의 외아들 김자동까지 독립운동에 가담한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그리고 정정화 선생의 손녀인 김선현(55)씨는 현재 삽교농공단지 안에 있는 ㈜오토의 부회장으로서 전문경영인의 길을 걷고 있다. '할머니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예산과 인연을 맺은 김 부회장을 지난 21일 만나 정정화 선생을 비롯한 선대의 독립운동사와 가족사를 들었다. 마침 3·1절을 앞두고 있는 이 때 말이다.

- 할머니로부터 독립운동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자랐나?
"내가 서른네 살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 할머니랑 방을 같이 썼다. 어려서부터 할머니로부터 독립운동사를 일상적으로 듣고 자랐다. 그 때는 몰랐는데 커서야 그게 역사라는 것을 알게됐다. 그래서 그 때 좀 더 들어둘 껄, 관심갖고 여쭤볼 껄 하며 후회한다."

- 정정화 선생은 9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할머니는 어떤 분 이셨나?
"돌아가시기 전에 딱 한 달만 편찮으셨다. 평소에 젊은 사람들보다도 더 행동이 빠르실 정도로 부지런하시고, 뭐든 직접 하셨다. 성품이 굉장히 대범하셔서 어떤 일에도 놀라는 일이 없고 침착하게 대처하셨다. 또 뭐든 주저함이 없이 남에게 다 주셨다. 어머니가 정성껏 해드린 옷도 며칠 못가 남에게 주시곤 해서 가끔 어머니가 서운해 하시기도 했다. 고부간인데도 어머니는 지금도 할머니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신다. 예전에 외할머니·이모도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사돈인 할머니를 참 좋아하셨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할머니는 모든 이에게 마음이 크셨던, 남녀를 불문하고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완성에 가까운 분이시다. 할머니를 닮고 싶다."

'사회에 보탬이 되라'는 뜻으로 3대가 독립운동 한 집안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정화 선생과 김자동 선생(당시 6세).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선생, 여섯번째가 김의한 선생이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정화 선생과 김자동 선생(당시 6세).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선생, 여섯번째가 김의한 선생이다.
ⓒ 김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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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가 독립운동을 한 대단한 가문이다. 선대들의 삶이 김 부회장에게 미친 영향은?
"우리 형제들은 모두 우리 집안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 있다. 반면 스스로에게 시달리기도 한다. 나이가 들 수록 선대에 비해 부족하다는 열등감이 들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올해 85세로 정정하시다. 지난해에 <상하이 일기 - 임정의 품안에서>라는 제목의 책을 내셨다(김자동 선생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비롯해 <레닌의 회상> <모택동전기 1~4>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사)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사)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고문 등을 맡고 있다).

2006년에는 납북되신 할아버지의 묘소 참배를 위해 북에 다녀왔다. 할머니 산소에서 흙 한 줌 가져 가 뿌려 드렸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성묘단을 만들어 내가 일곱 차례 실무교섭에 나서기도 했다.

증조부께서는 상해에서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는데 유해가 아직도 중국에 있다. 당시 임시정부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묘를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 문화혁명 때 훼손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번이 있어 지금이라도 측량을 통해 찾을 수 있는데 정부가 서훈을 안해줘 추진 못하고 있다. 일제가 일방적으로 조선의 고위관료들에게 작위를 수여한 것을 문제 삼아 서훈을 20년째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의 대가가 아니라, 억지로 준 작위를 거부하고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을 이리도 폄하하니 일제 역사를 높이 평가하는 나라가 아니고서는 어찌 이럴 수 있는가(김 부회장의 차분한 목소리가 딱 한 번 격앙됐다. 임정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될 정도로 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 증조부인 김가진 선생이고, 할머니 정정화 선생도 시부의 유해를 모셔오지 못해 돌아가실 때까지 맘에 걸려하셨다고 한다. 아버지 김자동 선생은 조부도 받지 못한 서훈을 받을 수 없다면서 자신의 서훈신청을 않고 있다니 누가 들어도 통탄할 일이다).

우리가 필요한 건 훈장이 아니다. 훈장을 받지 못해도 독립운동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라도 유해를 모셔오고 싶은데 아버지께서 반대하신다. 나라를 위해 일하신 분을 격에 맞게 모셔와야 한다면서. 아버지께서 연로하셔서 마음이 급한데 정부는 네 번의 신청을 모두 보류했다."   

- 가훈은?
"가훈이라고 어디에 써붙여놓은 것은 아니고, 할머니와 부모님께서 어릴적부터 강조하신 말씀은 '나라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집에 증조부께서 쓰신 글씨가 걸려있는데 '義重山岳'(의중산악·옳음이 산악처럼 중하다)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는 뜻으로 새기고 있다."

- 할머니로부터 예산과 관련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나?
"뒷산에서 나물을 캐고, 앞에 있는 개울을 건널 때는 오빠가 업어서 건너줬다시면서 어린시절을 회상하시곤 했다. 할머니 친정이 만석 부자였는데 나중에는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으셔서 남은 재산이 없었다. 아쉬운 것은 할머니가 사시던 대술 시산리 집이 2009년에 헐렸다고 한다. 내가 2008년에 예산에 왔는데, 진작 찾아볼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그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온다."

"물질적으로 잘사는 나라보다 정신적 자부심 갖는 나라 돼야"

- 공장의 위치를 예산으로 결정하는데 할머니 영향이 있었나?
"우리가 납품하는 현대자동차 파워텍이 서산에 있어 처음에는 서산과 당진 쪽을 알아봤는데, 자꾸 예산에 마음이 가더라. 대술쪽을 알아보다가 여의치 않아 현재 위치로 자리잡았다."

- 매출규모가 큰 중소기업으로 알고 있다. 기업을 일구기까지 과정과 경영원칙이 궁금하다.
"우리 회사는 서울 본사에 10명 정도 근무를 하고, 1998년 설립한 경주공장에 100여 명, 2008년에 세운 예산공장에 300여 명, 베트남공장에 200여 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IMF직후 부도위기에 처한 현대자동차 계열사에 아버지께서 소액주주로 참여하고 계셨는데, 직원들이 찾아와 회사경영을 부탁하면서 시작했다. 당시에 가족 모두가 반대했지만,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시는 성품이시라 결국 수락하셨다. 초창기에 정말 어려움이 많았다. 현재는 자동차부품변속기 기어와 샤프트를 제작해 현대자동차에 납품하고 있다.

과거 외국계 은행에 다닐때 노조활동을 했던 적이 있다. 기업을 경영을 하면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 행복한 일터 만들기를 실현하고 싶었다. 우리 회사는 오토발전협의회를 한달에 한 번씩 연다. 각 분야(사무직·생산직·주간·야간·임원 등) 대표들이 만나 대화하고 소통해 그 내용을 리스트업한 뒤 회사측 입장과 전망을 밝혀 게시한다.

경영모토라면 '자주 경영'이다. 스스로 행복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기업이면 좋겠다. 회사 이름 '오토'의 뜻도 원투원(one to one), 즉 직원 한 사람이 고객 한 사람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스스로 회사를 운영해 나가자는 취지다. 다행히 직원들이 '퇴직할 때 까지 다니고 싶다'고 한다.

매년 봄·가을 두 번씩 희망하는 직원에 한해 마라톤대회에 나가고 있다. 한번에 약 60-70명 정도가 참가하는데, 회사가 1km마다 1만 원씩 격려금을 준다. 그 중에 절반액수는 다시 모아 예산군내 초등학교에 도서구입비로 희사하고 있다."(김선현 부회장의 경영철학과 노동운동 활동에 관한 이야기는 <프레시안> 2012년 4월 17일 치 '3000억 매출기업 CEO가 된 철의 노조위원장' 인터뷰 기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 앞으로 계획하고 있거나 꼭 실현하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할머니는 힘든 임정 시절에도 유치원을 세워 후세 교육에 힘쓰셨다.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가정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교육, 특히 역사교육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우리나라만큼 오랫동안 식민지상태에 있고 또 우리나라 만큼 오랫동안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나라가 없는데 소중한 역사를 몰라서 안타깝다. 물질적으로 잘사는 나라보다 정신적 자부심을 갖는 나라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증조부 호를 딴 동농재단을 설립해 역사교육과 역사연구를 하고, 할머니 이름을 딴 정정화재단을 설립해 미혼모와 아동들의 장학사업을 하고 싶다. 현재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인터뷰 뒤안길
'눈빛이 형형하다'는게 이런 거구나. 김 부회장과 눈맞춤 하고 인터뷰를 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1시간 20여 분 동안의 길지 않은 인터뷰를 마치고 또 이 생각을 했다. 좋은 가문이란, 기품있는 사람이란 이런 거구나. 이야기 하는 내내 함께 생각이 깊어지고,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온전히 함께 해온 가족사, 그 많은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압축해 듣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좀 더 깊이있는 내용들을 챙겨보고 싶은 마음은 욕심일 뿐.

할머니 정정화 선생과 증조부 유해송환 문제 등을 말할 때 설핏 김 부회장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이야기가 더 깊어지지는 않았다. 예산지역과 관련한 소소한 이야기로 주제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 부회장은 정성껏 대답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은 정정화 선생이 쓴 <장강일기>와 김자동 선생이 쓴 <상하이 일기>로 만나는 것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예산지역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선현, #정정화, #독립운동가, #김자동,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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