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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양동 통샘마을 벽화 골목길.
 광주 양동 통샘마을 벽화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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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의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여전히 가파르고 좁았다. 앞서 걷는 그는 낮술에 취했는지 허위허위 손짓을 섞어가며 사설인지 노래인지 구분이 안 가는 가락을 탔다. 도시에서 제일 먼저 달과 만나서 '달동네'라던가. 흐린 하늘에 낮달이 떴다.

흔히 달동네라고 불리는 '도시 저소득층 집단밀집 주거지역'은 일제 강점기가 시초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이들이 주인 없는 산비탈이나 개천가에 허가 받지 않고 집을 짓고 살았다. 이를 '토막민촌'이라 했다.

토막민촌의 뒤를 잇는 것이 이른바 '판자촌'이다. 해방 이후엔 전재민(戰災民)들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피난민들이 주로 판자촌에 모여 살았다. 또 1945년 '농지개혁법' 시행으로 농촌의 지주층이 도시로 옮겨오면서 이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저소득층 주민들이 판자촌으로 옮겨가 살기도 했다.

달동네(산동네)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들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른바 산업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이농향도(離農向都)' 현상이 원인이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당시 도시인구는 연간 4.5%∼7.2%씩 증가했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방치된 국·공유지에 무허가 정착촌을 형성하거나 도심 외곽지역의 산등성이에 '달동네'를 만들어 살았다.

광주에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달동네가 있다. 열 댓 곳이 넘던 광주의 달동네는 '재개발' 사업으로 이젠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하지만 광주천을 따라 걷다 보면 그나마 터를 유지하는 달동네 두 곳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양동 통샘마을과 발산마을이다.

사이좋은 남매처럼 나란히 자리잡은 달동네 두 곳

이제 달동네의 터줏대감은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고양이다. 발산마을 주택 담벼락에 나란히 앉아 있는 고양이들.
 이제 달동네의 터줏대감은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고양이다. 발산마을 주택 담벼락에 나란히 앉아 있는 고양이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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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 양유교를 지나면 우측 천변에 버드나무길이 이어져 있다. 양유(良柳)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광주천변 버드나무는 좋았던 모양이다. 지난 시절 사진자료를 보면 치렁치렁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 아래로 광주천이 조랑조랑 흐르는 모습이 발랄하다. 그 버드나무길 건너편에 광주의 달동네 통샘마을과 발산마을이 사이좋은 남매처럼 자리 잡고 있다.

산비탈 마을에 우물이 세 곳이나 있었다는 통샘마을. 마을 골목길엔 벽화를 비롯해 여러 공공미술 작품들이 동네 분위기를 산뜻하게 만들고 있다. 버려진 항아리엔 예쁜 꽃모양이 그려졌고, 밤이면 텃밭 울타리는 조명기구로 변신한다.

경남 통영 동피랑 마을이나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처럼 관광객이 많이 찾진 않지만 방문객은 끊이지 않는다. 지역 미술작가와 주민들이 골목길 장독과 담벼락 등에 '통샘마을 소망의 빛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진행했던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그렇게 작은 성과를 내고 있다.

발산마을은 한집 건넌 이웃처럼 통샘마을 옆에 있다. 버짐꽃 핀 아이들이 숨 차는 줄 모르고 뛰어다녔던 골목길은 여전하다. 발산마을에 산 지 30년이 넘었다는 중년의 사내가 마을 길잡이를 자처했다. 하지만 그는 낮술에 취해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산동네 마실을 대신한다.

발산마을에서 바라본 일신방직 공장.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여공들은 광주천 뽕뽕다리를 건너 출퇴근을 했다.
 발산마을에서 바라본 일신방직 공장.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여공들은 광주천 뽕뽕다리를 건너 출퇴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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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방직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들. 광주지역 화가들이 참여했다.
 일신방직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들. 광주지역 화가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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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사원 아파트'가 발산마을의 '랜드 마크'였던 시절이 있었다. 전방은 전남방직이 바꾼 이름이다. 전남방직은 면방전문회사로 1935년 일본 '가네보(鐘紡 종방)' 전남공장이 그 전신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 가네보는 주인이 없어 한동안 종업원들이 자주 관리를 했다. 이를 미 군정 통역관이었던 김형남 전 숭실대 총장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1953년 미 군정청으로부터 정식으로 불하받았다.

이 컨소시엄엔 모두 세 명이 참여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 총괄본부장이었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의원의 아버지 김용주 전 대한해운공사 사장과 이한원 대한제분 창업자도 김 전 총장과 함께 참여했다. 형식은 3명이 참여했지만 실제로는 두 김씨의 지분이 막강했다.

전남방직은 성장을 거듭하다가 1961년 두 개의 회사로 나뉜다. 이북이 고향이었던 실질적인 창업주 김형남씨는 '일신방직'이라는 새 회사로 분리독립했다. 대신 전남방직의 정문을 얻었다.

경남 함양이 고향인 김무성 전 의원의 아버지 김용주씨는 '전남방직'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승계하는 대신 광주천변으로 난 문을 회사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두 동업자의 절묘하고 상징적인 갈라서기였다. 전남방직주식회사는 1970년 이름을 '전방주식회사'로 바꿨다. 지금은 전방 공장이 있던 자리에 중고차 매매단지가 들어서 있다.

공장 담벼락 따라 거닐던 여공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일신방직 담벼락엔 여공의 꿈처럼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일신방직 담벼락엔 여공의 꿈처럼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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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사원 아파트가 발산마을에 있는 것이 암시하듯 많은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직원들은 발산마을에서 출퇴근을 했다. 그들이 광주천을 건너다니던 다리 이름은 '뽕뽕다리'. 건설현장에서 사용하던 구멍이 뚫린 철제자재를 다리 대신 놓아 붙은 애교 있는 이름이다. 지금의 발산교는 이 뽕뽕다리 자리에 1973년 처음 개설됐다.

지금도 가동되는 일신방직 공장 가림벽에도 벽화가 한창이다. 지난 2010년 우제길 화백 등 광주의 중견작가가 참여해 열 작품을 일신방직 가림벽에 그려 넣었다. 가림벽이 흉물스럽다며 철거 논란까지 일자 지역 작가들이 "벽에 남은 무수한 흔적들은 그 자체로 우리 광주의 역사이자 작품"이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길고 높은 공장 담벼락을 따라 거닐던 여공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고된 노동으로 지쳤던 그가 꿈꿨던 소망은 모두 이뤄졌을까. 오늘도 공장 담벼락엔 예쁜 여공의 꿈처럼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광주천 따라 걷기 4-3코스는 '양유교-버드나무길-통샘마을-양동교-발산마을-발산교-서림교회-전방-일신방직 벽화길-전방 자동차매매단지-광천1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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