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2월 19일 대선 결과는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박근혜 시대 5년, 이 사회에서 진보의 앞날을 고민하는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오마이뉴스>는 정치, 사회 각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진보의 길을 모색하는 기획을 수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말]
이철수 판화가가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철수 판화가가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김병기

관련사진보기


"저한테 진보의 갈 길을 물으면 길이 보이겠어요?"

이철수 판화가는 작업실에 앉자마자 웃었다. 이번 기획 인터뷰 등장인물로는 적절치 않다는 뜻이다. 그동안 보수와 진보를 갈라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고, 진보진영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기도 적절하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사실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판화가였던 그가 제천으로 이사 온 뒤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작은 생명의 노래였다. 성찰의 목소리였다. 그런 그에게서 정치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하는 기자도 다소 곤혹스러웠다. 잠시 난감했던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이는 부인 이여경씨였다.    

"팥죽은 안줘요? 난 팥죽 먹고 싶은데…."
"이따가 줄게요. 방금 밥 먹었잖아요."

홍시와 커피를 작업실로 가져온 이씨에게 이철수 판화가는 보채 듯 말했다. 그는 유리그릇에 담긴 홍시를 후루룩거리면서 입에 털어 넣은 뒤 담배를 빼어 물었다. 처음부터 정치 이야기를 묻기 시작하면 또다시 난감한 답변이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근황부터 물었다.

목판 삼매경?

이철수 판화가가 대문 밖으로 나와 배웅하고 있다. 이씨 부부는 집 앞에 눈이 쌓인 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철수 판화가가 대문 밖으로 나와 배웅하고 있다. 이씨 부부는 집 앞에 눈이 쌓인 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김병기

관련사진보기


- 박달재에 들어온 지 27년 됐는데, 이제 사람들을 만나면 농사꾼 소리를 듣나? 대문 앞 논에 눈이 수북이 쌓였던데, 요즘도 2000여 평 농사를 짓고 있나?
"2000 평도 안 된다. 힘들어서 농사를 줄였다. 난 내 입으로 농사꾼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냥 공부삼아 농사를 짓는다고 이야기한다. 몸이 힘들다고 농사를 줄이는 농사꾼 봤나?" 

- 곽재구 시인이 오래 전에 쓴 글을 보면 이철수 화백이 '목판 삼매'에 빠졌다는 표현이 나온다. 농사를 줄였으면, 목판 작업에 더 몰입하나? 
"삼매는 무슨 삼매? 그냥이지! 바쁘면 바쁘게, 한가하면 여유 있게 일한다."  

- 2002년 10월부터 시작해 10년 넘도록 매일 '나뭇잎 편지'를 홈페이지에 올린다. 지금까지 3000여 개가 넘는 판화와 엽서를 올렸다. 삼매경에 빠지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잠자기 전에 손발을 씻는 것처럼 그렇게 썼다. 세상과 약속한 일이어서 저녁시간이면 무작정 쓴다. 멀리 출타했다가 자정 넘겨서 집에 들어와도 작업장에 들러서 엽서 한 장 쓰고 난 뒤에 건너간다. 끈기 있어서 아침마다 세수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 나뭇잎 편지를 받아보는 사람은 몇 명인가?
"여보 몇 명이지요?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이여경씨가 "지금 시각 7만186명"이라고 알려줬다.) 십년에 걸친 일이라 많다고 하긴 어렵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추천한 회원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홈페이지(매일 쓰는 판화 엽서. www.mokpan.com)에 들어와서 직접 회원 가입하신 분들이어서 나에게는 의미가 큰 존재들이다."

- '나뭇잎 편지' 한 통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림이 복잡한 날은 한 시간 넘게 걸린다. 붓으로 휙휙 그리거나 단순하게 그릴 때는 10-20분에도 끝난다. 어렵지 않게 하는 일이다."

법정 스님의 생전에 자신의 방 안에 걸어뒀다는 '좌탈' 이라는 제목의 이철수 판화가 작품이다.
 법정 스님의 생전에 자신의 방 안에 걸어뒀다는 '좌탈' 이라는 제목의 이철수 판화가 작품이다.
ⓒ 이철수

관련사진보기


- 법정스님은 이철수의 글에서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산골에서 쇠여물 삶는 질박하고 구수한 그런 냄새가 난다. 판화 그림에서는 선미가 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 나뭇잎 편지에 올린 작품을 보니 세상을 향해 할 말이 많아진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화면에 글씨가 가득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그랬다. 안 그래도 아내가 '말이 너무 많다'고 자주 지적한다. 그런데 선문답처럼 툭툭 치면 늘 오해가 많아진다. 엽서 한 장이지만 살아가면서 힘이 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그냥 선문답으로는 안 되더라. 구차한 세상 일이라 자꾸 부연 설명하려다 보니 길어졌다. 잘 한 짓은 못 되지. 앞으로는 조금씩 달라지려고 한다. 이명박 할아비가 나와도, 내 작품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험한 음식차림을 계속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다. 이제 좀 길게 보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다. 호흡 조절 좀 하려고!"

-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은 비교적 차분하게 자신을 되돌아보자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과거 <거리에서>를 그릴 때처럼 분노가 솟구칠 때도 있지 않나? 격정적으로 토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내 안의 욕심을 지켜보자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보다 더 크게 외칠 이야기는 없을 것 같다."

- '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가?
"10여 년 동안 계속 그 생각하면서 산다."

요즘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싶다

- 무엇으로 마음을 흔들고 싶은가?
"대단한 선동을 하려는 건 아니다. 마음은 말 안 듣는 애 같다. 조금만 방심하면 금을 넘거나 위험한 선택을 한다. 가령, 마당을 고르려면 비 올 때 마당에 나가서 섬세하게 물길을 내야 한다. 그래야 웅덩이가 생기지 않는다. 마음 길도 그렇다. 수시로 물길을 내야 한다. 나남 없이 바쁘게 살아야 하는 세상 아닌가? 살면서 자신을 돌아볼 겨를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문제다. 울퉁불퉁한 마음 뜰을 불편해 하지 않는 사람들과 나눌 이야기가 많다."

- 자신의 작품 중 제일 애정이 가는 그림 3개를 꼽으라면?
"제일 애정이 간달 건 아니지만, 근년에 그린 작품들 중에 '백장법문' '아이들 뒤따라 올 텐데......', '길을 내!'를 꼽고 싶다.

이철수 판화가의 '길을 내' 작품.
 이철수 판화가의 '길을 내' 작품.
ⓒ 이철수

관련사진보기


내가 갈 길을 가르쳐 줄 능력은 안 되고, 삶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에게 용기를 내서 '길을 내!'라고 말하고 싶었다. 젊은 친구들에게 자기가 살아야 할 미래니까 스스로 길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다소 무책임한 권유다.

이철수 판화가의 '아이들 뒤따라 올 텐데' 작품.
 이철수 판화가의 '아이들 뒤따라 올 텐데' 작품.
ⓒ 이철수

관련사진보기


'아이들 뒤따라 올 텐데......'라는 작품은, 바람 부는 날 바람 타는 나무숲에 부부가 아이들 걱정하면서 걸어가는 모습이다. 젊음을 믿어보자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철수 판화가의 '백장법문' 작품.
 이철수 판화가의 '백장법문' 작품.
ⓒ 이철수

관련사진보기


'백장법문'은 호미 들고 일하는 사람을 단순하게 새겼는데, 노동을 잃어버리거나 노동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땀 흘리지 않고 사는 걸 제일인 줄 아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판화다. 백장 선사의 '이일부작 일일불식'을 좋아해서 그 분의 입을 슬쩍 빌어다가 그렸다."

- 법정스님은 '좌탈'이라는 작품을 좋아했다던데.
"혼자서 고전적인 마음공부에 몰입할 때 그렸던 연작 판화인데, 마음을 살피는 기술 또는 요령이 많이 함축돼 있다. 법정 스님은 그런 요령이 재미있으셨던가 보다. 그래서 좋아하셨던 것 같다."

목판이 나에게 말을 건다

- 이철수 판화가에게 조각칼이란?
"젓가락 같은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집어 올리는 데 쓰는 도구다."

- 그럼 판화란?
"길동무 같다. 30년 넘게 작업해서 그만큼 익숙해졌다. 좋은 친구에게는 할 말, 못할 말 다 하고 듣기도 하는 것 아닌가? 판화 속에 대개는 내 이야기를 담게 되는데, 가끔은 판화 작품이 나한테 이야기를 걸어올 때도 있다. 아니 자주 그런다. 내가 판화를 통해 했던 이야기를 두고 '그림으로 말한 만큼 잘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 말이 진심이었느냐?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고도 물어온다."

- 요즘 소위 '칼 맛'은 어떤가?
"칼이 너무 익숙해졌다는 느낌이다. 칼질에 관해서도 칼맛에 관해서도 별 고민을 하지 않는다. 반성 없이 칼질을 한다. 사실 난 판화가 답지 않은 사람이다. 판화가라면 판화 자체를 고민하고 예술적으로 매력 있게 만들어야 하는 데 그런 고민을 할 줄 모른다."

- 판화 작업할 때 가장 큰 고민은?
"일방적으로 내용만 고민한다.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작품은 내용을 담는 단순한 그릇이라고 여긴다. 그릇에 관한 고민은 따로 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그릇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는데…."

- 이주헌 미술평론가의 글에서 봤다. '이철수의 판화는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라'고 평한 대목이 있던데 어떤 경계를 허물고 싶은가?
"일상을 살아가는 마음과 예술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 예술뿐이 아니지. 마음도 일상의 범속한 그 자리 버리지 않고 평범한 거기서 존재와 삶의 깊은 뜻을 길어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느 것도 우리가 포기 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 아닌가?"

이철수 판화가가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이철수 판화가가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 김병기

관련사진보기


- 앞으로 계획은?
"일단 <대종경>(원불교 경전) 작업을 필사적으로 해야 할 상황이다. 지난해 권정생 선생의 <몽실언니>,<점득이네> 판화작업 마무리 하느라고 많이 늦어졌다. <대종경> 연작은 마무리까지 2년 반 쯤 생각하고 있다. '무문관'(중국 남송의 선승 무문 혜개가 지은 불서)이라는 선종 공안집에 대한 작품 메모도 끝나 있어서 그 작업도 계속 할 생각이다.

그 뒤에는 신약성서를 가지고 해보려고 준비 중이다. 종교 관련 텍스트들이지만, 그 속에서 세상 이야기도 환기시키고 나 자신을 지켜 갈 안간힘으로써의 지혜도 모색하려고 한다. 마음의 불모는 면해야 사막 같은 이 현실을 건널 수 있지 않겠나. 그 틈에도 어디서 4대강 사업 같은 것 불거지면 반대 캠페인 작품은 만들게 되겠지."


태그:#이철수 판화가, #진보의 갈 길을 묻다, #대선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환경과 사람에 관심이 많은 오마이뉴스 기자입니다. 10만인클럽에 가입해서 응원해주세요^^ http://omn.kr/acj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