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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예송해수욕장
 보길도 예송해수욕장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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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1587년에 태어나 1671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쟁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이런저런 관직도 맡았지만 세 차례에 걸쳐 16년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을 만큼 불우하게 살았다(1616∼1623, 1638, 1659∼1667).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윤선도는 그저 '자연 시인'일 뿐이다. 남해 푸른 바닷가에 살면서 유유자적하게 <어부사시사>를 노래한 시인.

사실 윤선도가 전남 완도의 보길도에 살게 된 것은 시인적 풍류의 발휘와 정반대되는 까닭 때문이었다. 그는 투옥과 귀양살이에서 벗어난 직후 앞으로는 여생을 조용하게 보내리라 마음먹고 제주도로 출발했다. 가던 도중에 만난 보길도. 너무나 풍광이 아름다웠다. 윤선도는 가던 길을 멈춘 채 그곳에 살았고, 마을에도 이름을 붙였다. 부용동(芙蓉洞), 연꽃을 닮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산 것은 13년 안팎으로, 자신의 유배 기간보다도 짧았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윤선도가 눈부신 경치를 자랑하는 보길도에 엄청난 정자를 지어놓고 평생에 걸쳐 한가로이 시조나 읊으며 살았던 귀족으로 오인한다. 윤선도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그는 관직에 오르기도 전인 성균관 유생 때에 이미 광해군에게 이이첨 등 권신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선비였다. 그 일로 자신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아버지는 관찰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전혀 유유자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 선비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어부사시사>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 연시조를 남김으로써 국민들의 머리에 스스로를 '자연 시인'으로 완벽하게 각인하고 말았으니 본의 아닌 자승자박인 것을.

해남의 윤선도 고택 '녹우당'
 해남의 윤선도 고택 '녹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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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漁村(어촌) 두어집이 냇속의 나락들락
말가한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나다

모두 40수나 되는 연시조 대작인 <어부사시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각각 10수씩 노래한다. 위의 시조는 봄 노래 중의 한 수다. 고어(古語)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는 독자라 하더라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작품이므로 '더 이상 한가할 수 없는 마음을 절묘한 시어로 읊고 있다' 정도의 평가는 가능하다. 정말 그렇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시를 보면서 지은이의 생애가 귀양살이로 온통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보통의 시인들은 '버꾸기가 울고 버들숲이 푸르다'고 노래한다. 심지어 우리나라 최고의 이별노래로 우러름을 받는 정지상의 <送人(송인)>조차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라고 표현했다. '비 갠 긴 언덕에 풀빛이 푸르다'는 뜻이니 아무래도 시인의 판단이 문장의 '주인'이다.

그러나 윤선도는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윤선도는 '버꾸기가 울고 버들숲이 푸르다'고 말하지도 않지만 '우는 것이 버꾸기이고 푸른 것이 버들숲'이라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우는 것이 버꾸기인지, 푸른 것이 버들숲인지, 어촌의 집이 몇 채인지, 물속의 고기 이름이 무엇인지, 그것은 윤선도에게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사람 세상에는 집들이 '냇속에 들락날락' 하고 수중세상에는 '온갇' 고기들이, 그것도 가만히 있지 않고 '뛰노'는 풍경이라 윤선도로서는 알 수도 없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알 수 없는 풍경, 알 욕심도 일어나지 않는 풍경에 윤선도는 취해 있다. 제목 그대로 이 노래가 어부의 사계를 노래하였다면 어찌 그가 바닷가 집이 몇 채인지, 물 속에 노니는 고기들과 하늘의 새들, 그리고 물가 숲 나무들의 종류를 모를 것인가. 그러므로 당연히, 현대인의 눈에 윤선도는 끝없이 비인간(非人間)의 유유자적을 노래하고 있는 음유 시인으로 비친다. <어부사시사> 자체가 귀양살이 냄새라고는 한 오라기 아지랑이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노래인 까닭이다.

여름 노래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윤선도는 '년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쟝만마라/ 靑蒻笠(청약립)은 써 잇노라 綠蓑衣(녹사의) 가져오나/ 無心(무심)한 白鷗(백구)난 내 좃난가 제 좃난가' 하고 노래한다. 반찬도 없이 맨밥을 연잎에 싸서 들고 바다를 노니는데 내가 새를 쫓는 것인지 새가 나를 쫓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목적도 목표도 없는 사람만이 그런 자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윤선도의 정자 '세연정'.
 윤선도의 정자 '세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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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의 내부
 세연정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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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노래에서 '物外(물외)에 조흔일이 漁父生涯(어부 생애) 아니런가' 하고 노래한 윤선도는 겨울 노래에서는 눈이 내리니 '仙界(선계)ㄴ가 佛界(불계)ㄴ가 人間(인간)이 아니로다' 하고 찬탄한다. 세상살이에 부대끼며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간군상들의 정치적 경제적 생활보다는 신선 세계 같은 바닷가 어부의 삶이 훨씬 좋다는 가치관이다. 역시 현실세계를 저만큼 벗어난 '자연' 시인의 노래답다.

그런데 보길도에 가보면 윤선도가 억지로 음풍농월의 자연시를 지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당쟁과 귀양살이에 지친 윤선도가 그런 주제의 노래를 읊은 것이야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우여곡절의 세상풍파를 겪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보길도에 들어오면 누구나 <어부사시사> 종류의 정서에 젖게 된다는 말이다. 그만큼 보길도는 아름답다. 제주도로 가던 윤선도가 이곳 보길도에 주저앉은 까닭이 저절로 헤아려진다.

세연정에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 산 중턱까지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사람 혼자 앉아 있을 만한 작은 집이 홀로 서 있다. 윤선도는 '동천석실'이라 부르는 이곳에 혼자 앉아 글을 읽고 썼다고 한다.
 세연정에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 산 중턱까지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사람 혼자 앉아 있을 만한 작은 집이 홀로 서 있다. 윤선도는 '동천석실'이라 부르는 이곳에 혼자 앉아 글을 읽고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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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풍경. 윤선도는 이곳을 보길도 최고의 절경으로 평가했다.
 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풍경. 윤선도는 이곳을 보길도 최고의 절경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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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증거해주는 이가 바로, 정말 역설적이게도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윤선도를 나이 81세가 되도록 유배시킨 장본인이다. 그런 송시열이 뒷날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도중 보길도에 들렀다가 바닷가에 절벽처럼 우뚝 선 거대 바위 벽면에 시를 새겨 남겼다. 이보다 더 보길도의 절경을 뚜렷하게 말해줄 자료가 어디 또 있을까.

송시열은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팔십셋 늙은이 만리 바다 에 떠 있네)'로 시작되는 한시를 바위에 새겨 놓았다. 송시열의 작품은 한시이므로 한국문학사의 대걸작인 <어부사시사>와는 결코 견줄 바가 못 되지만, 그래도 보길도는 그가 남긴 한시에 힘입어 한층 유명세 얻게 되었다. 그와 윤선도 사이에 서린 정치적 악연이 사람들 사이에 더욱 널리 회자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 일대는 보길도 중에서도 삼대 명승이라 할 만큼 눈이 시린 절경지다. 따라서 보길도에 가서 이 글씐바위를 보지 않고 돌아왔다면 심봉사가 따로 없다는 말을 들어도 달리 변명을 말아야 한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경치가 절묘하게 한데 어우러진 곳을 어찌 놓칠 것인가.

송시열이 유배를 가던 도중에 글을 남겨 놓은 보길도의 '글씐바위'. 사진의 바위절벽 아랫부분에 보이는 검은 흔적이 송시열의 시가 새겨져 있는 곳이다.
 송시열이 유배를 가던 도중에 글을 남겨 놓은 보길도의 '글씐바위'. 사진의 바위절벽 아랫부분에 보이는 검은 흔적이 송시열의 시가 새겨져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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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글씐바위' 가는 길목에 놓인 안내판의 한시.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 가는 길목에 놓인 안내판의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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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에서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을 두 군데 더 든다면 윤선도 유적지인 세연정과 동천석실, 그리고 말 그대로 비취 빛깔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여주는 예송해수욕장이다. 세연정은 상당한 규모의 연못까지 거느리고 있어 윤선도에게 '귀족 자연 시인'의 이미지를 덧씌운 정자이고, 동천석실은 윤선도가 글 공부를 한 산 중턱의 작은 누각이다. 동천석실은 윤선도가 경치를 극찬한 곳이기도 하지만, 아래로 부용동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망지라는 점에서 반드시 올라보아야 할 유적지라 하겠다.

동천석실에서 부용동 전경을 내려다보거나, 고개를 넘으면서 예송해수욕장의 굽은 바닷가를 아래로 바라보노라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만이 아니라 송시열이 남긴 시조까지 문득 떠오른다. 멋진 자연 앞에 서면 사람은 누구나 자연친화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늙고 그리고 죽어 사라질 짧은 인생을 살면서 무에 그리 권력과 재물을 탐한단 말인가.

나는 보길도의 동천석실 아래 부용동이나 예송해수욕장을 아득히 내려다볼 때면, 평생에 걸쳐 당쟁에 매달린 끝에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이나 오를 만큼 권력을 휘둘렀던 송시열이 남긴 '뜻밖의 시조' 한 편을 읊어본다. 

靑山(청산)도 절로절로 綠水(녹수)도 절로절로
山(산) 절로 水(수) 절로 山水間(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덧붙이는 글 |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면 30분 정도 지나 노화도에 닿습니다. 노화도는 우리나라 최대의 전복 생산지입니다. 자동차를 배에 싣고 왔다면 노화도에서 보길도 사이에 놓인 다리를 건넙니다. 1.5km 정도 직진하면 세연정에 닿고, 동천석실은 그 뒤에 있습니다. 송시열 유적은 7km가량 떨어진 섬 동쪽 끝에 있습니다. '글씐바위'로 들어가는 입구에 주차장 마련되어 있습니다.



태그:#윤선도, #보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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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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