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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죽은 박정희(1917~1979)와 장준하(1919~1975), 그리고 이 두 남자로부터 훌쩍 벗어난 곳에서 살아가던 고상만(1970~현재)!

박정희와 장준하는 동시대를 살았다. 그 최초의 동시대에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극악한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둘로 갈렸다. 일제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 저항파(독립 운동가)와 그들에게 꼬리를 흔든 협조파(친일파)가 그것.
박정희가 혈서와 함께 입교 신청서를 제출하여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과정을 다룬 <만주신문>의 기사
 박정희가 혈서와 함께 입교 신청서를 제출하여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과정을 다룬 <만주신문>의 기사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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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후자를 따랐다. 애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7년 4월부터 경상북도의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교사)로 근무한다. 1939년 어느 날, 시학관(지금의 장학관)의 시찰 행사에 불참한 박정희는 화가 난 교장 등으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한다. 곧 교장에 대한 복수심으로 분노한 그는 그때부터 기꺼이 일제의 협력자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1940년, 드디어 박정희는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서 일본이 세운 괴뢰 만주국의 군관학교에 입학한다.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31일 자 기사에는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52~53쪽)

일본 육군 장교복 차림의 박정희. 이때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일본 육군 장교복 차림의 박정희. 이때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 이름을 쓰고 있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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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 이름으로 천황에 충성을 다하는, 일본의 진정한 '견마(犬馬, 개와 말)'가 되어 갔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 댓가로 일본육사에 유학을 가 군사 교육을 받는 '천은(天恩)'을 받기도 한다. 당시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동족인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러 나갈 때 유난히 흥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생존과 출세를 위해서 주변 사람의 생명을 아랑곳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해방 후 진주한 미국이, 군대에서 암약하던 동료 공산당원 3백여 명을 밀고한 대가로 사형의 위기에서 그 자신을 스스로 구한 박정희에게 '스네이크 박(Snake Park)'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백년 전쟁> 스페셜 에디션 '프레이저 보고서' 참조] 그들에게 박정희는 비열한 '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잡은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반대자들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달랐다. 그는 결코 일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압제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가 걷기로 결심한 길은 철두철미한 레지스탕스였다. 이를 위해 그는 기꺼이 맨몸으로 6000km를 걷기도 했다. 그 6000km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장준하가 부대를 탈출한 후 걸은 거리였다.

1945년, 미국 전략첩보대(OSS)에서 제1기로 훈련을 받던 시절의 장준하(오른쪽). 전 고려대학교 총장 김준엽(가운데), 노능서.
 1945년, 미국 전략첩보대(OSS)에서 제1기로 훈련을 받던 시절의 장준하(오른쪽). 전 고려대학교 총장 김준엽(가운데), 노능서.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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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에는 이범석이 지휘한 광복군 제2지대의 특별 부대에 배속되어 조선 침투를 통한 국권 쟁취의 최일선에 서게 된다. 그 제1기로 미국 전략첩보대(OSS)에서 주관한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운명의 낙하산 침투 날짜는 1945년 8월 20일.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중 침투 작전 5일 전인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은 연합군에게 무조건을 항복을 선언한다.

이후 장준하는 당대 최고 잡지인 <사상계>의 발행인이 되어 비판적 지식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동시에 그는 5.16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가 그 권력을 위해 거짓과 부정과 폭압의 칼날을 휘두를 때 온몸으로 저항한다.

1966년,'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야당인 민중당이 대구에서 주최한 국민 대회에서 박정희를 '밀수 왕초'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듬해인 1967년, 야당 대통령 단일 후보인 윤보선의 대선 지지 유세에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과 공산당원 전력, 월남 파병 결정 등을 사실 그대로 비판한 것 또한 유명하다. 군사 독재 시기인 당시, 박정희는'신성 불가침의 성역'에 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에 대한 비판은 목숨을 내놓는 용기가 없으면 힘든 일이었다.

이와 같은 저항의 대가는 참혹했다. 장준하는 1966년과 1967년에 잇달아 '국가원수모독죄'(지금은 사라진 대표 악법이다)로 구속, 수감되어 모진 고초를 당한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부터 1975년 경기도 포천 운악산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14년 동안 총 아홉 번의 구속과 스물일곱 번의 연행을 당한다.

박정희 정권은 고의 부도 공작을 통해 장준하가 발행인으로 있던 <사상계>도 폐간시켜 버린다. 도청과 미행이 그와 그 가족들을 옥죄기도 했다.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전신)의 비밀 사찰 문서들에 장준하의 가족들이 안방에서 나눈 대화 내용까지 기록해 놓았을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의 감시는 오늘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장준하는 1967년 6월 옥중에서 제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구였다. 상대 후보였던 공화당의 강상욱과의 표 차이는 1만 8000표였다. 당시로서는 압도적인 격차였다. 그 뒤 장준하는 다른 의원들은 꺼리는 국회 국방위원회에 자청하여 국방 현장을 발로 뛰는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펼친다.

1972년에는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그러자 장준하는, 그 이듬해의 성탄절 전야인 1973년 12월 24일에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인 '유신헌법 개헌을 위한 100만인 청원 서명운동'(이하 '1차 개헌 청원 운동')을 선언한다. 그리고 약 보름 후인 1974년 1월 8일 오후 5시, 박정희는 긴급 조치 1호 및 2호를 발표한다. '유신헌법에 대해 반대 또는 개정을 거론하거나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장준하는 이 긴급 조치의 첫 번째 구속자가 되어 군사 법정에서 15년형을 선고받는다.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1차 개헌 청원 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의 모습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1차 개헌 청원 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의 모습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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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의 유신 선포 후 최초로 나온 1974년의 긴급 조치 1, 2호는 오직 한 사람, 곧 장준하를 잡아넣기 위해 발표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고위 책임자의 입에서 나온 진술이었다. 실상 그 1차 개헌 청원 운동은 박정희 정권에게 동물적인 위기감을 안겨 주었다. 소수 명망가 중심의 유신 반대 '활동'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말 그대로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 1차 개헌 청원 운동에서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의 뜨거운 불길을 느끼고 있었다.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일어난 그 운명의 죽음이 일어난 첫 번째 직접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결국 최후를 맞는다. 많은 사람이 그 죽음의 과정에 틀림없이 박정희가 개입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대는 박정희의 폭압이 절정기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의 기록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는 '총통'과 다름 없었다. 유신 시대 초등학생들이 방과후에까지 남아 외운 다음 시구(?!)가 이를 웅변한다.

1 일하시는 대통령
2 이 나라의 지도자
3  삼일 정신 받들어
4 사랑하는 겨레 위해
5 오일육 일으키니
6 육대주에 빛나고
7 칠십 년대 번영은
8 팔도강산 뻗쳤네.
9 구구한 새 역사는
10 시(십)월 유신 정신으로 꽃 피웠네! (77쪽)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것은 모든 것이 금기였다. 그때 그는 '살아 있는 신'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는 법! 장준하가 죽은 지 4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자신의 부하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 후로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사이 세상은 몇 번을 출렁거렸다. 그 몇 번의 출렁임 끝에 장준하의 의문의 죽음이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기인 2000년 10월에 출범한 '제1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 정부 시절인 2003년 7월에 출범한'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서였다.

바로 이즈음 드디어 세 번째 남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고상만이 나타난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는 장준하가 죽은 지 18년만인 1993년에 장준하의 비운의 죽음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배우 문성근이 진행하던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서였다. 그때 고상만은 이 프로그램의 클로징멘트에 귀가 꽂혔다.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2012, 돌베개)의 저자 조상만과 책 표지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2012, 돌베개)의 저자 조상만과 책 표지
ⓒ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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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장막에 가려진 장준하 사건의 한구석을 조금 열어보았을 뿐입니다. 그 속에는 왜곡된 사실과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실이 뒤엉켜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에서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분들께서도 이제는 그 침묵을 깨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진실은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얻은 사회는 역사 앞에 언제나 떳떳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34~35쪽)

특히'진실은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얻은 사회는 역사 앞에 언제나 떳떳할 수 있'다는 마지막 구절은 뜨거운 가슴을 지닌 젊은 그에게 명문장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다음과 같이 간절하고 진실한 바람을 새겨 둔다.

"그렇지 누군가가 반드시 밝혀줘야 할 억울함이니 꼭 밝혀져야지."(35쪽)

그 바람의 힘이었을까. 2002년 5월, 고상만은 '제1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이 된다. 전임 조사관의 결원으로 생긴 자리에 대한 채용 공고에 지원하여 발탁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03년 7월, 그는 운명적으로 장준하를 다시 만난다.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의문사 사건('조사 재개 7호 장준하 사건')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세상 일 참 알 수 없다."(27쪽)

그런 생각을 하며 고상만은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진실을 밝히겠다는 집념과 열정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고상만의 조사는 곳곳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자료 찾기와 증인 탐색 등 모든 일이 험난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최고 정보 기관인 국정원과 국군 기무 부대(옛 보안 사령부)의 비협조는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특히 국문 기무 부대는 의문사위원회에 단 한 건의 자료도 제공해주지 않았을 정도로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여 남짓의 조사 기간 동안 고상만을 비롯한 세 명의 조사관은 숨어 있던 많은 비밀을 밝혀냈다. 장준하가 김용환***과 동행하여 약사봉 정상에 오른 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하산하던 중 암반 벼랑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기존 진술은, 정상적인 등반 상황과 그 모든 일에 걸리는 시간 등을 고려할 때 불가능하므로 신빙성이 없다는 점이 밝혀졌다. 사망 원인인 추락사 또한 현장 재현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 결과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고 당일 장준하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장준하의 죽음을 알린 '괴전화'의 주인공이 김용환 자신임을 밝혀낸 것도 커다란 성과였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운악산 약사봉 전경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운악산 약사봉 전경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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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결국 제1기 때와 마찬가지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다. 애초에 이 '진상규명 불능' 결정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두 차례에 걸친 국가 조사 결과 장준하 사건은 그 진상을 밝힐 수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니, 더 이상 재조사가 필요 없다는 식의 정치 공세에 빌미를 제공해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 고상만은 이 책에서 제법 많은 지면을 할애해 그'진상규명 불능' 결정의 숨은 배경을 최초로 공개하고 있다.(291~297쪽) 그 결정은 한 마디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핵심적인 쟁점들, 곧 목격자인 김용환의 진술이 진실한가의 문제와 장준하 선생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와 원인, 그리고 국가 공권력의 개입 문제 등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차후 좀더 결정적인 재조사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실상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인정', 곧 '공권력의 개입에 의한 타살을 인정한다'로 결정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재조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밝혔듯이, 그렇게 많은 핵심 쟁점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인정' 결정을 내리면 그 쟁점들 아래에 깔린 숨어 있는 진실이 영원히 묻혀버릴 수 있다. 고상만은 바로 그 점을 우려한 것이다.

결국 위원회는 이 문제를 다수결 표결에 부친다. 모두 7명의 위원이 참여한 표결 결과 4 대 3으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된다. 단 한 표 차이였다. 저자는 그 한 표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진술해 놓고 있다. 그 한 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한 표가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밝히는 법적 강제 수단의 유일한 불씨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장준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두 번째의 직접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글을 마무리하자. 많은 사람이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모종의 '거사'가 있었다고 믿고 있다. 장준하가 양심적인 군인들과 함께 무장 게릴라 혁명을 준비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거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진실은 평범하지만 진정으로 '놀라운' 데 있었다. 저자가 밝혀낸 중앙정보부의 비밀 문서(1975년 3월 31일자로 작성된 3급 문서인'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에는, '장준하의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 탐지해 와해, 봉쇄함으로써 조직 확장과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 공작 필요 시 보고 후 실시'로 적혀 있다. 그런데 장준하는 이 보고서가 만들어진 뒤 5개월이 지난 1975년 8월 17일, 약사봉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문서에서 예의'거사'와 관련된 핵심적인 단서는 '장준하의 개헌운동 계획'이다. 저자는 법정 스님의 진술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장준하 선생이 준비했던 모종의 '거사'가 유신 헌법에 대한 개헌 서명 운동, 곧 '제2차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이하 '2차 개헌 청원 운동')이었음을 극적으로 밝혀낸다. 이 '거사'가 애초 1975년 8월 15일을 기해 선포될 예정이었다가, 당시 외유 중이던 야당 정치인 김영삼의 귀국 날짜인 8월 20일로 연기된 사실도 규명되었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은 그 8월 15일과 8월 20일의 딱 중간인 8월 17일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결국 중정과 박정희는 장준하 선생이 주도한 그'거사'를 미리 감지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위의 비밀 문서에서도 기록하고 있는 바, 박정희 정권이 개헌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장준하를 상대로 분명히 '공작'(?!)을 '실시'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의 이윤성 교수가 검사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사진. 두개골에 있는 깨지고 함몰된 부위가 외부 타격에 의한 타살임을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의 이윤성 교수가 검사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사진. 두개골에 있는 깨지고 함몰된 부위가 외부 타격에 의한 타살임을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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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박정희 정권은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 장준하를 상대로 잔인하게 '공작'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100만인'이라는 숫자가 주는 위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박정희는 이미 1973년에 장준하가 주도한 제1차 서명 운동에서 운동 시작 10여일만에 30만 명이 동참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속도였고, 경이로운 숫자였다.

실상 '총통' 같은 박정희에게 그 100만 명을 이루는 최소 단위인 '1명'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문과 조작을 통해 감옥에 처넣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1명', '1명'이 백만 번 모여 이루어진 '100만 명'은 그 어떤 왕이나 총통이나 독재자도 막을 수 없는 숫자였다.

'거사'의 진실이 평범하지만 놀랍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독재자'의 딸(strongman's daughter)이 대통령이 된 지도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그를 찍지 않은 48%의 한켠에서는 새로운 파시즘이 도래했으니 공포 시대가 머지 않았다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독재든 파시즘이든 그것을 이겨내는 '놀라운 진실'의 힘이 아주 평범한 데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장준하 선생이 죽음으로써 웅변하고 있는 사실, 4.19와 광주의 5.18에서 도도히 밀려 나왔던 그 수많은 민중들의 외침을 말이다. 새해 벽두 며칠 간,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에서 내가 찾아낸 '놀라운 진실'은 그렇게 평범한 사실에 숨어 있었다.

*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1966년 5월 24일, 현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경남 울산에 '한국비료' 공장을 세우면서 정부 허가에 따라 일본에서 건설 자재를 들여온다면서 사카린 55톤을 밀수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삼성이라는 한 회사의 기업 비리가 아니라 박정희 정권이 막후에 개입한 권력형 비리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67년 9월, 청산리 전투의 독립 투사인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국회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정일권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뿌린 사건도 이와 관련돼 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2년 12월 공포된 유신  헌법에 근거하여 조직된 헌법 기관으로, 이 기구의 대의원 2,000~5,000명이 대통령과 국회 의원 3분의 1을 선출하였다. 1980년 10월, 제5 공화국의 헌법 부칙에 따라 해산된다. 박정희는 이 기구를 통해 모두 두 번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72년 12월과 1978년 7월의 제8, 9대 대통령 선거에서였다. 이 두 대선에서 단독 입후보한 박정희의 득표율은 동일하게 99.9%였다. 제8대 선거에서는 2,359명의 대의원 중 찬성표가 2,357표, 기권표가 2표 나왔다. 그 두 기권표조차 북한 김일성의 지지율(북한도 선거를 통해 수령을 선출하는데, 찬성은 하얀 투표함에, 반대는 까만 투표함에 넣는 공개 투표이기 때문에 김일성의 지지율은 늘 100% 찬성이었다)을 의식한 '조작'이라는 신빙성 있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제9대 선거 또한 99.9%(무표 1표, 기권 3표)의 찬성율이 나왔다.

*** 김용환: 1967년, 장준하가 옥중에서 제7대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한 뒤 지구당 사무실에 우연히 찾아와 자원 봉사를 자원한 이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사고 현장의 유일한 직접 목격자이기도 한데, 죽음 직후부터 최근에 나온 모든 진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의혹만 더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고상만의 자료 조사에 따르면, 김용환은 중정의 민간인 프락치(밀정)로 이용되었거나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문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고상만 지음,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2012, 돌베개. 12,000원.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http://blog.ohmynews.com/saesil/489880)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의 대국민 보고서

고상만 지음, 돌베개(2012)


태그:#장준하, #고상만,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박정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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