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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 되고 있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축하꽃다발을 건네받은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 되고 있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축하꽃다발을 건네받은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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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 당선인이 확정 발표된 그날 새벽,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적지 않게 피곤했고,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지만 쉬이 잠들지 못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되레 그 새벽에 스마트폰은 연신 지인들이 보낸 메시지 신호음을 지저귀고 있었다. 하나같이 '멘붕'을 토로하고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나도 '멘붕'에 빠진 걸까. 승자는 가까스로 이겼고, 패자는 아쉽게 졌다. 기실 대선일 직전 공표된 여론조사 결과에서 보았듯 초박빙 구도였으니 누가 이기든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굳히기냐, 대역전이냐라는 극적인 재미는 있을지언정, 애초 승패는 근소한 차이로 날 수밖에 없는 선거전이었다.

전혀 예상 못한 결과도 아닌데, 그럼 무엇 때문에 지금껏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불문율이 예상외로 깨져서? 아니면, 지지한 후보가 40대 이하 젊은 세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음에도 낙선해서? 이도 아니면, 거듭되는 실정으로 사상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현 정부에 면죄부를 주게 된 꼴이라서?

'박근혜의 아름다운 퇴장'... 내가 바라던 시나리오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모든 언론에서 앞다퉈 쏟아낸 여론조사 결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은 탓에 심심풀이 땅콩처럼 여길 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또, 지지한 후보가 낙선한 경험이 하도 많아서 조금 서운할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현 정부의 평가는 머지않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에 당선인이 몇 년 두루뭉술 눈감아준다고 해도 까짓것 참을 수 있다.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간절함보다 어쩌면 이 땅의 장삼이사들은 적어도 나와 비슷한 인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보수든 진보든 간에 어차피 천지가 개벽을 해도 꿈적도 하지 않을 골수들이야 늘 있기 마련이지만, 선거의 판세는 그들이 결코 좌우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음이 판명됐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또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 입장에서 이번 대선이 지닌 의미는 자못 크다고 봤다. 우파니 좌파니, 보혁구도니, 성대결이니 하는 뜬구름 잡는 얘기는 집어치우고, 선거 결과에 따라 한 세대가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교체될 수 있는 절묘한 경쟁구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내가 예측한 대선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두 후보가 피 말리는 접전을 벌이다 근소한 차이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 그렇지만 기실 국민의 절반이 반대표를 던진 셈이니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통합이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아깝게 고배를 마셨지만 패자라고 할 수도 없는 박근혜 후보는 우리 사회 극심한 분열과 갈등의 원인을 모두 자신이 떠안고 가겠노라는 낙선 사례를 발표하며 아름다운 퇴장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완벽한 '시나리오'는 없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결과는 완벽하게 정반대다. 물론, 문재인 후보는 '패배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라고만 강조할 뿐, 위와 같은 낙선 사례를 발표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말할 '책임'도, '자격'도 애초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박근혜 당선인만이 얘기할 수 있는 몫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인이 마주할 세 가지 문제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때 분향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모습.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때 분향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모습.
ⓒ 새누리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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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0여 년, 우리 현대사는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호사가들이 말하길 다른 나라라면 600여 년 동안 겪었을 일을 불과 60여 년간 다 경험했다고 할 정도다. 역사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 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가져온 원인을 현대사에서 찾아본다면 무엇이 될까. 단언컨대, 그 모든 것은 이 세 가지로 수렴된다.

첫째는 친일 청산의 문제요, 둘째는 군사독재정권이 남긴 유산의 문제이며, 마지막으로 영·호남 간 극심한 지역갈등을 들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개별적인 과거사 문제임과 동시에 서로 인과관계로 얽혀있는 난제기도 하다. 입만 열면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가자'고 외쳐대지만, 이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기대할 수도, 미래를 논할 수도 없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다.

이들은 하나같이 진심 어린 용서와 화해, 그리고 뼈아픈 성찰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흔히 말하듯 '시간이 약'이라면, 애초 역사 같은 건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통의 과거사는 덮는다고 묻히거나, 가린다고 숨겨질 수 없는 법이다. 되레 정부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체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야말로 근본적인 치유와 해결의 지름길이다.

문제는 그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박근혜 당선인이라는 점이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의 과오를 딸에게 책임 지우는 건 온당치 않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노릇이다. 과연 최고 국정 책임자로서, 박근혜 당선인은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을 수 있을까.

나는 단언컨대 불가능하다고 봤다. '5·16과 유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고 고통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인식에 줄곧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모순된 이 언급은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는 딸이자 공인으로서 밝힐 수 있는 사실상의 최대치다.

박근혜 당선인은 통합을 국정 운영의 첫 번째 과제로 손꼽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 할수록, 그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의 과오가 들춰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곧, 아버지의 공적을 높이 기리면서 우리 사회가 통합되기를 바란다면 모순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동원'일 수밖에 없는 탓이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위 세 가지 난제 중 어느 것 하나 거리낄 게 없는 인물이었다. 본인이 피해자였을지언정 결코 그에게 책임을 물을 게 없다는 이야기. 따라서 책임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그가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난제들을 주저함 없이 돌파해낼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고, 이것이 내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이번 선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땅의 장삼이사들에게 질곡의 현대사는 어디까지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역사'일 뿐이고, 선거는 '바로 오늘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것이 더 많은 유권자가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박근혜만 현실을 논했다? 5년 전과 달라진 게 없군요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멘붕'을 치유하려니, 인터넷에서는 전문가라 자처하는 이들이 민주당의 패인을 분석한 기사와 앞으로를 전망하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그중 '박근혜가 현실을 이야기할 때, 문재인은 정치와 과거사만 외쳤다'는 어느 수도권 중산층 유권자의 주장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재인 후보가 승부처인 수도권에서 밀린 이유를 거기에서 찾은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는 팍팍한 현실이 기실 잘못된 정치고 비롯된 것인데도 정치와 현실을 전혀 무관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5년 전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만 원짜리 지폐 몇 장 찔러줄 것'으로 기대하며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던 기준과 사고방식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이다.

순간 사학과에 진학하겠다는 자녀에게 '역사가 밥 먹여주냐'고 발끈하며 학교로 전화해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는 어느 학부모와, 수능에 선택도 하지 않을 과목을 굳이 수업해야 하는지를 따져 묻는 어느 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선거판에서 정치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후보는 반드시 낙선한다는 불문율이 생길까 두렵다.

'민주당'이란 고유명사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

"박근혜 지지율이 70~80%인 지역에서 호남 사람들이 문재인에게 90% 몰표를 던졌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오십 보 백 보' 아닐까?"
 "박근혜 지지율이 70~80%인 지역에서 호남 사람들이 문재인에게 90% 몰표를 던졌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오십 보 백 보' 아닐까?"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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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잠이 오지 않아 노트북 앞에 앉았다. 어느덧 또다시 오전 2시를 넘기고 있다. 이 시간에 부산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황당한 전화가 걸려왔다.

"광주 사람들 웃음을 잃고 모두 멘붕이라며? 거기만 짙은 초록색이고 나머지는 모두 빨간색이던데... 나 같으면 두려워서 다른 지역으로 못 놀러 가겠더라. 여기도 전라도 사람들 공산당이라며 그곳에 가면 큰일 당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려. 그냥 여기로 이사 와라."

전제할 게 있다. 난 지금 광주에서 일하고 있지만, 광주가 고향은 아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저 광주에서 가정을 꾸려 살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롯데 자이언츠의 열혈 팬이기도 하다. 나름 광주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웬 공산당? 열에 아홉이 몰표를 던진 데다가 선거 결과 호남 지역만 '섬'처럼 고립된 모습이었으니 이물 없는 친구끼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보기에 전라도만 딴 세상 같겠지. 포털에서는 '빨갱이들은 차라리 분리 독립하라'는 댓글까지 봤다. 이곳에서는 70이 넘은 할아버지조차 문재인 후보를 찍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당'을 찍은 것이지. 그 어르신들까지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차마 못 버리는 이유가 뭔지 아니?

이곳 전라도 사람들에게 민주당은 수십 년간 다른 지역에 비해 차별을 당해 낙후됐다는 피해 의식이 집단적으로 응축된 '고유 명사'다. 선거 직전 새누리당으로 적을 옮긴 전 민주당 대표의 말처럼 민주당 정치인들이 전라도의 표만 이용했을 뿐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고 '자백'했지만, 그럼에도 그 이름은 전라도 사람들의 한과 설움을 언젠가 대변해주리라는 신앙처럼 시나브로 굳어졌다.

언젠가는 분명 유연해질 테지만, 그런 맹목적인 지지를 누가 만들었냐. 넌 전라도 사람들이 언제까지 그런 피해 의식에 매몰돼 살 거냐고 반문했지만, 그것이 여태껏 정치적·경제적 혜택을 누려온 경상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니? 하물며 박근혜 지지율이 70~80%인 지역에서 호남 사람들이 문재인에게 90% 몰표를 던졌다고 손가락질하는 건 '오십 보 백 보' 아닐까?"

꼭두새벽에 잠 안 자고 전라도와 경상도에 사는 중년들끼리 20년 전쯤에나 어울릴 만한 이런 대화를 나눠야만 할까. 내 '멘붕'은 꽤 오래 지속될 듯하다. 어쨌든 내가 그린 '시나리오'는 억측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한 이유만큼은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 안다. 전해질 리 만무하지만, 박근혜 당선인에게 꼭 건네주고 싶은 이야기다.


태그:#제18대 대통령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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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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