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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11월 중하순, 들기에도 버거울 만큼 큰 박스에 담은 '하동 대봉감' 한 박스를 받았습니다.

늦가을이면 배달되는 15kg짜리 대형 하동 대봉감 박스
 늦가을이면 배달되는 15kg짜리 대형 하동 대봉감 박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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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대봉감'이라는 포장박스를 보자마자 '그분'일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이분은 몇 해째 제게 대봉감 한 박스을 보내는 것으로 겨울채비를 마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저는 염치없이 이 감을 넙죽 받아 항아리 속에 갈무리했다가 세 가지의 조건이 충족될 때 항아리의 뚜껑을 엽니다.  

첫째는 겨울이 깊어져야 합니다. 둘째는 눈이 오는 밤이어야 합니다. 셋째는 귀한 손님이 오셔야 합니다.

작년 겨울, 항아리에 저장된 대봉감
 작년 겨울, 항아리에 저장된 대봉감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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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 대봉감 몇 개만으로도 참 푸짐하고 포근한 밤이 됩니다. 크고 단 이 대봉감은 살짝 얼어서 마치 천연 아이스크림같이 맛있는 밤참이 됩니다.

한겨울에 꽁꽁 언 대봉감은 긴 겨울밤의 좋은 간식거리이다.
 한겨울에 꽁꽁 언 대봉감은 긴 겨울밤의 좋은 간식거리이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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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해 감 박스를 열었을 때는 예년처럼 정갈하게 담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태풍에 상처 입은 감들이 섞인 올해의 대봉감
 태풍에 상처 입은 감들이 섞인 올해의 대봉감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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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지고 부서진 감들로 어지러웠습니다. 저는 배달 중에 부딪힌 탓으로 여겼습니다만 동봉된 편지를 보고 그것에 태풍의 결과로 인한 농민들의 상처 난 가슴이 담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상처 입은 감의 연유를 알려주는 동봉된 편지
 상처 입은 감의 연유를 알려주는 동봉된 편지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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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곳에서 문득 보내는
제 마음을 받아 주시는
선생님 계서서 행복합니다.  

여름 태풍으로 멍든 농심이
고스란히 감에 배였습니다.
보기에 험하지만
맛있게 보아주세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저는 온전한 감은 항아리에 담고 터진 감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수습해서 신문지로 싸서 별도로 서재 앞 테이블에 두었습니다.

깨진 감들은 따로 모아 보관했다.
 깨진 감들은 따로 모아 보관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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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제가 먹을 심산이었습니다. 심하게 상처 입은 순서대로 씻어먹고 일부는 여전히 발코니 테이블에 남아 있었습니다.

#2

12월 초 두 차례에 걸쳐 제법 큰 눈이 내리고, 헤이리는 온통 눈밭이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에 추억을 반추하는 상념에 잠긴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쌓일 만큼 눈이 내리면 야생의 생명들은 먹이를 구하는 일이 곤란해집니다. 

눈이 내린 이틀째부터 까치 외에는 한 번도 해모의 먹이를 넘보지 않던 녀석들도 수시로 방문해 해모의 먹이를 나누어 먹습니다. 직박구리와 딱새입니다. 허기진 배를 어찌할 수 없어서 해모밥에 접근하는 용기를 낸 것입니다.

애완견 해모의 밥을 나누어먹고 있는 직박구리
 애완견 해모의 밥을 나누어먹고 있는 직박구리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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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새도 해모밥이 눈온 뒤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때의 비상식량이다.
 딱새도 해모밥이 눈온 뒤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때의 비상식량이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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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서재 앞에 남겨진 대봉감을 새가 먹은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신문지를 좀 더 걷어 새의 접근이 더 쉽도록 해두었습니다.

상처 입은 감이 허기진 직박구리의 먹이가 되었다.
 상처 입은 감이 허기진 직박구리의 먹이가 되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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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롤블라이드에 비친 그림자를 보니 그 대봉감을 끼니로 삼은 것은 직박구리였습니다.

발코니에 놓인 감을 먹는 직박구리
 발코니에 놓인 감을 먹는 직박구리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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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의 상처 입은 감이 직방구리의 비상식량이 되었다.
 하동의 상처 입은 감이 직방구리의 비상식량이 되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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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태풍이 상처 낸 하동의 감이 눈 덮인 헤이리에서 직박구리의 귀한 식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감을 먹을 먹고 있는 직박구리의 그림자를 보면서 자연의 가없는 보시에 가슴 뭉클해졌습니다. 

식당에 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목격할 수 있는, 두 번 숟가락을 뜨고 밥을 남기는 사람들의 넘치는 풍요가 죄악인 이유입니다.

덧붙이는 글 | 관련글 : <자연이 키우고 사람의 수고로 영글은 대봉감> http://motif_1.blog.me/30124449341



태그:#대봉감, #직박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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