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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클라라는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처음으로 들어간 큰 도시다. 여기서 쿠바혁명을 실질적으로 성공에 이르게 하는 빛나는 대전투가 벌어졌으니, 쿠바혁명사는 이 전투를 '산타 클라라 전투'라 명명했다.

1958년 8월 31일 체는 140명의 병력을 이끌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에서 나와 산타 클라라를 향해 출정한다. 그는 경험이 부족한 부하들을 이끌고 도보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넘었다. 그는 엘 에스캄브레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 지역에서 각 혁명 세력 간의 알력과 권력 투쟁을 협정으로 잘 해결해 무장세력을 통일했다. 지금의 중부 지역인 라스 빌라스에 도착하고 10월 16일 산타 클라라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이른다. 이곳에서 장차 두 번째 부인이 될 지하 활동가 알레이다 마치를 만난다.

400명이 채 안 되는 혁명군은 무장된 장갑열차를 앞세운, 4000명이 넘는 정부군과 대적한다. 12월 29일 체의 부대는 정부군의 산타클라라 본부와 장갑열차 사이의 교신을 단절시키고 철로도 끊어 장갑열차는 탈선한다. 탈선된 객차에 화염병을 던지자 객차에 갇힌 정부군들은 투항하기 시작했다. 체의 부대는 장갑열차를 노획해 정부군의 무기와 탄약을 탈취한다. 1959년 1월 2일 까미유 씨엔푸에고스 부대와 합류하면서 체의 부대는 산타 클라라에 입성한다.

자전거와 말, 어느 것이 더 느림을 대표할까

체의 부대와 정부군의 산타 클라라 전투가 있었던 날, 우리는 체 게바라가 잠들어 있는 산타 클라라를 출발해 여행 오기 전부터 마음에 뒀던 콜론(Colon)으로 향했다. 산타 클라라에서 마탄사스까지는 자전거로 하루에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그래서 그 사이에 하루 묵어야 했는데 큰 도시가 없었다. 큰 도시가 없다는 것은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 지도를 보니 산타 클라라와 마탄사스의 중간 지점에서 그나마 큰 마을이 콜론인 것 같아 이곳에 숙박하고자 했을 뿐 숙소에 대한 아무런 정보는 없었다. 다행히 산타 클라라에서 머문 호텔의 도움을 받아 예약은 했지만 그들도 어렵게 찾은 곳이라 우리는 반신반의했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달렸다. 저 앞에 말을 타고 천천히 가는 한 남자가 보였다. 청바지 차림에 카우보이 모자를 썼다. 자전거를 타면서 말을 탄, 그것도 일반 도로에서,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옆으로 지나치며 보니 앞가슴은 풀어헤쳐 허연 가슴털이 물결치는 중년의 백인이다. 사진 한 장 부탁하니 쾌히 승낙한다. 아바나에서는 사진을 찍으면 또는 사진이 찍히면 모델료를 달라고 한다고 알고 있었으나 여긴 아바나가 아닌 인심 좋은 시골이다. 자전거와 말. 어느 것이 느림을 더 대표할까? 자전거는 주로 달린다. 자전거로 천천히 가기는 좀 어렵다. 그러나 말은 주로 걷는다. 달려도 타박타박 달린다. 말과 사람은 교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전거는? 기계일 뿐이다.

자전거와 말. 어는 것이 더 느림을 대표할까?
 자전거와 말. 어는 것이 더 느림을 대표할까?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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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 길가에 펼쳐놓은 토마토와 바나나가 보였다. 야채와 과일이 귀하니 보이면 일단 멈췄다. 우리를 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든다. 할아버지로부터 토마토 한 바구니(좀 작은 것 약 20개 정도)를 샀다. 가격은 10세우페(한화 약 500원)였다. 거기에서 쉬면서 먹고 있자니 할아버지가 소금과 매운 소스를 내온다. 찍어 먹으라는 것이다. 토마토를 소금에 찍어 먹어본 적은 있지만 매운 소스에 찍어 먹기는 처음이었다.

점심에 맞춰 식당에 들렸다. 메뉴에 피자가 네 종류 있었다. 차이가 어떤지 보려고 일부러 서로 다른 피자 4개를 주문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그대로 무너졌다. 똑같은 피자 4개가 나온 것. 누구를 탓하랴. 소통이 안 되었던 것을. 햄 피자 두 개를 더 추가했다. 차이점은 토핑에 햄이 좀 올라갔을 뿐 거의 같다. 오는 길에 사서 먹다 남은 토마토를 잘라 샐러드처럼 먹었다.

다른 피자 네 개 시켰는데 같은 피자 네 개가 나왔다.
 다른 피자 네 개 시켰는데 같은 피자 네 개가 나왔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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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2000원짜리 호텔에 묵다

마침내 콜론에 도착했다. 마을은 매우 컸다. 하긴 지도에도 콜론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도로가 놓여있었으니 클 만도 했다. 의외로 쉽게 싼티아고 아바나 호텔을 찾았다. 길가 네거리 귀퉁이에 있는 3층짜리 허름한 호텔. 입구 왼쪽에는 편의점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식당이 있다. 알고 보니 이 호텔은 전형적인 쿠바노 호텔이었다. 즉 쿠바 사람들이 이용하는 호텔이다. 그래서 찾기 힘들었던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이 안 통할 수가 없었다. 그 어느 호텔에서보다도 안 통했다. 그림을 그려 보여줘도 완전히 소통되지 않았다.

방 하나에 침대 두 개를 그리고 또 한 방은 침대 하나를 그리면서 분명하게 트윈 하나와 더블을 달라고 했다. 방을 배정 받아 올라가니 양면이 완전히 창으로 전망이 좋은 방과 한 쪽에만 창이 있는 방이었다. 두 방 모두 침대가 하나 뿐인 더블이었다. 말이 안 통했던 것이다. 방이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방은 비어 있었다. 숙박비는 전망 좋은 방은 1.75세우세, 또 다른 방은 1.5세우세였다. 싼 맛에 하나 더 쓰자고 했다. 그래서 얻은 방은 침대 두 개 딸린 방이었다.

처음에 이 방을 얻었으면 추가로 더 얻지는 않았을 텐데... 처음으로 독방을 차지했다. 네 명이서 방 3개에 5세우세(6000원) 주고 묵었다. 내 생전 이렇게 싸게 하룻밤을 묵은 적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하룻밤 묵고 가는데 2000원 정도라니. 가격 대비 괜찮은 호텔이지만 역시 시설 면에서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호텔에 비해 너무 낙후됐다. 샤워 꼭지는 없었고 세면대도 없고 물은 쥐 오줌처럼 나오고, 거울은 보이긴 했지만 뒷면이 습기에 절어 떨어져 나가서 반만 보인다. 양변기는 설치돼 있긴 했지만 뚜껑이나 받침은 없었다.

덜 떨어진 사기꾼 마부를 만나다

여장을 푼 후 마차를 타고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이 마차가 드디어 말썽을 일으켰다. 탈 때 '뭐 얼마나 할까'라며 요금을 물어보지 않은 우리 탓도 있었다. 안 되는 스페인어를 써 가며 마부에게 마부에게 개인이 운영하는 괜찮은 식당에 데려 달라 했다. 말이 통했는지 어떤 가정집으로 가는 것 같았다. 들어가 보니 분명 식당이었다.

마침 훤칠하게 잘 생긴 남자가 영어를 곧잘 했다. 이 식당의 사위였다. 음식값은 럼주를 포함해 합쳐서 22세우세였다. 일반 노동자 한 달 월급에 가까운 금액이다. 물론 럼주는 7년산 블랙라벨이 아닌 이들이 흔히 마시는 하얀 럼주였다. 하얀 럼주도 그런대로 좋았다. 나는 보통 내가 마시려고 사는 양주는 절대 오래된 것을 사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값의 차이에 비해 맛의 차이를 그 정도까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7년산 블랙 럼주나 3년산 하얀 럼주나 그 맛의 차이가 가격의 차이를 넘지는 못한 듯했다.

그 식당집 사위는 마탄사스의 한 호텔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는 연말연시를 장인 식구와 함께 보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영어도 잘 했고 아주 친절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정치적인 주제가 등장하자 그 친구는 쿠바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했지만 더 이상 깊이 이야기하지는 않으려고 했다.

저녁 또한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고 맛있었다. 보통 샐러드하면 토마토 한 접시 깔아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샐러드를 충분히 내왔다. 럼주를 곁들인 돼지 등심, 닭고기, 생선요리, 소고기 그리고 디저트까지 즐겁게 아주 잘 먹었다. 이때 후추도 흠뻑 쳐서 먹었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후추가 귀한지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샐러드에 드레싱을 붓고 있다. 음식은 계속 나온다.
 샐러드에 드레싱을 붓고 있다. 음식은 계속 나온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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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부르러했으나 아까 데려다 준 마부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기다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 마차를 타고 호텔로 갔다. 우리는 호텔에서 그 식당까지 꽤 먼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날 마탄사스 가는 도중 길가에 있는 그 식당을 발견했다. 식당의 이름은 라 팔라마(La Palama)였다. 호텔에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마부는 우리를 빙빙 돌린 것이었다.

결국 일이 터졌다. 그는 차비로 25세우세를 요구했다. 터무니없는 값이었다. 반나절에 한 달 임금을 벌려고 하는 속셈이다. 한 건 올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 2세우세가 아까워 산티아고의 모로 요새에서 걸어서 내려온 사람들 아닌가. 그것도 넷이서 2세우세. 옥신각신 말이 오고 갔다. 동네 사람들이 참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찰을 부르자고 했다.

한창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데 마침 영어 할 줄 아는 동네 사람이 있어 왜 우리가 다투고 있는지 이유를 알려줬다. 우리의 의사가 질 전달됐는지 주변을 둘러싼 쿠바노들 반응도 마부에게 도통 호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그 마부는 5세우세만 받고 돌아갔다. 또 한 번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우리는 그저 줄 수는 있어도 뺏기지는 않는다. 이놈아, 솔직히 나는 팁까지 생각해서 한 3세우세면 되겠지 했는데 5세우세나 준 것이다. 총무 담당인 전 선생 마음이 좋아 그나마 5세우세 준 것인데, 그것의 5배인 25세우세를 달라고... 사람 잘못 봤다.

쿠바에서 처음 본 사기꾼이었다. 그 행동은 이해가 되지만 이 사건으로 마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잠깐! 우리 전 선생에 대해 한마디. 내가 수학을 전공해서일까? 나는 여행을 기획도 하지만 여행하면서 회비 관리까지 도맡아 할 정도로 좀 치밀한 편이다.

그러나 전 선생은 나보다 한술 더 뜬다. 그와 함께 여행하면 회비 관리는 그의 몫이다.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고 알뜰하게 사용한다. 전 선생은 개인적으로는 나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 동문으로 1년 차를 두고 같이 대학을 다녔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했고 돌아와서 지금의 대전에 정착했다. 전 선생이나 나나 서울에서 정착했더라면 이 나이에 이처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할 정도의 여유 있는 생활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들이 다 알아주는 서울에 있는 직장에 있지 않고 이곳 대전에 직장을 갖고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행복은 만족에서 오고 만족은 마음의 여유에서 오고. 마음의 여유는 바쁘지 않은 생활에서 오니까.

네거리에 있는 우리가 묵은 호텔 앞에는 주유소가 있고 많은 차가 왕래하나 이건 해도해도 너무 했다. 한 밤중까지 너무 소란스러워 잠을 잘 수 없었다. 웬 사람들의 왕래가 그렇게 잦은지, 오전 1시에 절정을 이루더니 오전 4시가 되서야 소음이 줄어들었다. 물론 잠은 완전히 설쳤다. 쿠바하면 소음. 완전히 질렸다.


태그:#산타 클라라 전투, #말, #콜론, #사기꾼, #쿠바노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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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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