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영동1985> 포스터

영화 <남영동1985> 포스터 ⓒ 아우라픽쳐스

"고통스러운 영화다."

<남영동 1985> 시사회를 마치고 함께 영화를 본 동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뱉었다. 영화를 보고 감동이나 재미를 느끼는 게 보통이다. 호러물, 납량극처럼 공포를 주는 영화도 있지만, 그러나 <남영동 1985>는 '고통' 그 자체다.

12일 저녁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 M2관.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 시사회가 열렸다. 주최 측의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고 김근태 의장(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의장, 민주당 상임고문)과 함께 활동했던 '민청련동지회' 회원들에게 맨 앞열(A열)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미 한 여성회원은 집에서 심장약을 먹고 왔다며 영화에서 받을 충격을 걱정했다.

회원들은 김근태 의장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이 끝까지 영화를 볼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김 의장과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고 지금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는 민청련 회원과 가족들은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문재인,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 대선후보들도 객석 중앙에 나란히 앉았다.

시사회에 앞서 감독과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다. 정지영 감독은 "김근태 의장이 받았던 그 고통을 공유하자"며 영화 내용을 암시했다. 김근태 의장에 해당하는 '김종태' 역을 맡은 박원상씨에 이어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해당하는 '이두한' 역(극중에서는 '장의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을 맡은 배우 이경영씨가 나서서 인사말을 했다.

"다시는 <남영동>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명 배우, 화려한 무대에 즐거워야 할 시사회는 곧 무언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찼다.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는 고문의 기술들

 민청련 김근태 의장(맨 왼쪽)이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 출소한 날 아침 후배 이해찬 의원, 장영달 전 의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뒤쪽 오른쪽 현수막을 들고 있는 이가 필자다.

민청련 김근태 의장(맨 왼쪽)이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 출소한 날 아침 후배 이해찬 의원, 장영달 전 의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뒤쪽 오른쪽 현수막을 들고 있는 이가 필자다. ⓒ 진성준 의원실


영화는 27년 전인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시작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 초대의장 김종태를 잡아들였다. 처음에는 북한 간첩과 접선을 하고, 부산에서 몰래 배를 타고 평양을 다녀온 '빨갱이 간첩'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형식으로 이런저런 알리바이를 맞춰보지만 '오바했다'고 판단한다. 결국 수사관들은 김종태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해 국가전복을 노리는 '폭력 혁명가'로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고문이 동원된다. 잠 안 재우기, 반복해서 조서 쓰기, 몽동이 찜질과 발길질, 욕탕에 머리 처박기 등 '낮은 단계의 고문'이 시작된다. 김종태는 이 단계에서 이미 무너지고 '항복'을 하게 된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는 작성된다. 그리고 고문 때문에 항복했다는 수치심과 자신의 허위 자백으로 끌려와 자신과 같은 고문을 당할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극한의 고뇌에 몸부림친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딸은 환상 속에서 맴돈다.

그러나 그들의 고문은 계속된다. 이른바 '높은 단계의 고문'이 김종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공사를 치른다'고 했다. 칠성판에 발가벗겨진 채 몸은 묶인다. 그들은 '완전한 항복'을 요구한다. 신념은 물론 자존심, 인격, 체면, 수치심 등 모두 내던질 것을 요구한다.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성기고문, 전기고문….

이러는 사이 고문기술자를 비롯한 수사관들은 프로야구 중계를 듣고, 여자친구 문제, 가족들 문제, 시험과 승진 등 일상의 대화를 나눈다. 야만성, 잔혹한 자신의 행위 곁에는 항상 그들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다. 고문기술자 이두한은 물고문, 전기고문을 하면서 휘파람으로 <클레멘타인> 노래를 분다. 그는 고문을 즐긴다.

잠시 고문이 멈춘 사이, 항복한 줄 알았던 김종태는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을 뿐이다"라고 마지막 외마디를 지른다. 이 말에 격분한 남영동 '윤사장'(문성근 분)과 이두한은 김종태의 목에 개줄을 달고 개처럼 기어서 짖게 하고 개밥을 먹게 하고, 또 다시 칠성판에 들어오게 한다.

트라우마, 진실을 대할 때 풀린다

 김근태 민청련 초대의장. 1988년 9월 30일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진로'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김근태 민청련 초대의장. 1988년 9월 30일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진로'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 최경환


세월이 흘러 김종태는 정부의 장관이 되어 감옥에 갇힌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찾아간다. 이두한은 김종태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김종태의 귓가엔 그가 고문을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부르던 <클레멘타인>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트라우마'다. 가해자가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끝까지 남아있는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의 기억.

고문, 수감, 의문사, 열사, 반인권적 공권력 희생자, 민간인학살 등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과 그 가족들은 지금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김근태 의장은 고문의 피해가 파킨슨병으로 전이되어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고문의 피해는 대인기피, 우울증, 피해의식, 반복되는 악몽 등 그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필자도 남영동 대공분실 '출신'이다. 대학 3학년 때인 1981년 6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30여 일 동안 '낮은 단계의 고문' 상태에서 지냈다(그뒤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10여일, 모두 43일간 불법 감금상태에 있었다). 김근태 의장이 남영동에 끌려가기 4년 전 일이다. 이른바 '학림사건' 관계자다. 지난 6월 대법원의 무죄판결이 나면서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의사가 물었다. "왜, 그런 고통을 주위에 말하지 않느냐?'고. 나는 한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치욕을 당한 건 말하기 힘들어요. 본능이지요. 감추려고 하는 거지요. 몽둥이 찜질을 당하면서 나도 모르게 똥을 지리고, 군홧발에 걷어차이면서 죽을 것 같아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여자선배를 목욕탕에 들여놓고 그것을 훔쳐본 경찰놈들을 눈앞에서 보면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 무기력한 내 모습을 누구한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 가지고 사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기가 두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 지난 10월 18일 국가폭력 희생자들의 치유를 목적으로 광주에 트라우마센터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센터의 책임을 맡은 강용주 선생은 1985년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고문을 당하고 무려 14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그는 비전향 최연소 장기수다. 그 또한 고문 피해자이면서 트라우마 치료 의사다. 내가 신경정신과 의사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자 강용주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말해야 합니다. 말해야 풀립니다. 감춰둔다고 해서 감춰질 수 없고, 그게 트라우마를 더욱 깊게 합니다. 치욕, 분노는 잠재의식으로 내면에 쌓이게 되고 다른 방식으로 '배설'을 하게 됩니다. '배설'은 치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욱 깊게 파괴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회피해서는 치유될 수 없는 게 트라우마입니다."

<남영동1985>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접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진실을 시각영상으로 확인하는 일은 더욱 두려운 일이다. 아유슈비츠의 진실도, 마루타의 진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영동 1985>는 비정상적인 국가체제가 인간을 얼마나 잔악하게 만드는지, 또 인간의 본성, 영혼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하는 이유는 진실을 직면했을 때 치유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휘파람 소리에 섞여 있는 비웃음

 김근태 의장은 고문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았다. 김근태 의장은 2011년 12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근태 의장은 고문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았다. 김근태 의장은 2011년 12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최경환


감옥에 갇힌 고문기술자 이두한이 김종태에게 용서를 구할 때 김종태의 귓가에 들린 <클레멘타인> 휘파람을 들으며 나는 또 다른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 휘파람이 아직도 고문을 하고 인권을 유린한 세력의 후예들, 그 정치적 유산과 기득권과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는 세력들이 고문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비웃는 소리로 들렸다.

그 휘파람에는 <남영동1985> 같은 영화를 냉소하는 비웃움이 섞여 있었다.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숨죽여 고통 속에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포함한 관객 모두를 조롱하는 휘파람 소리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들 해봤자지, 너희들은 우리한테 당하게 돼 있어.'

최근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장준하 선생 암살 의혹, 민청학련 사법살인 등 과거사의 여러 현안들에 대한 일부 정치권과 보수진영의 태도를 볼 때 그 휘파람 소리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화해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 진실의 규명, 가해자의 사과, 정의의 회복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진실 규명은 기득권 권력 앞에 가로막히고, 가끔 보여주는 가해자들의 사과는 정치쇼에 불과하고 진심이 없다. 더욱이 정의의 회복, 즉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제도화하고 굳건히 세우는 일은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

이번 대선에서 좋은 정부가 세워져 과거사 현안들을 정리하고, 지금도 트라우마로 육제척,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국가폭력희생자들의 치유와 재활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함께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남영동 1985>과 같은 영화가 많이 나와, 거들먹거리며 휘파람을 불고 있는 가해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의 트라우마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한다. 

서독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1985년 5월 8일 서독의회에서 독일 패전 40주년 기념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비록 이 연설은 독일 민족이 저지른 나치 전쟁과 유태인 학살을 반성하는 말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에 눈을 감은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소경이 되며, 비인도적 행위를 기억할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또다시 그 과오를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

비록 <남영동 1985>는 두렵고 무서운, 고통을 주는 영화이지만, 진실을 바라볼 줄 아는 용기를 가진 국민만이 미래를 열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11월 22일 개봉 예정.
* 필자 최경환은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사)행동하는 양심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1981년 '학림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43일간 불범감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1년 6개월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김근태 의장과 민청련 활동을 함께 했으며, 지금은 '민청련동지회' 회장으로 있다.
남영동1985 김근태 최경환 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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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한 마지막 비서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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