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방영된 SBS <힐링캠프> 박근혜-문재인 편은 두 가지 의미에서 새로움을 던져줬다. 정치인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의 장을 열었다는 신선함은 둘째다. 그보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의 해'에 잠정적인 대선후보가 적극적으로 TV를 활용하는 모습은 유권자들과 밀착하기 위한 시도이며, 후보 간 정책 토론이 활성화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반년이 지났던 올 7월에도 그 기대는 유효했다. 18.7%의 시청률을 기록한 <힐링캠프> 안철수 편은 안 후보의 대선출마 선언 전에 이뤄졌기에 가히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투표가 '선거의 꽃'이라면 가장 대중적인 지상파 TV 토론은 그 꽃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자양분일 것이다.
예컨대, 지상파 황금 시간대에 손석희 교수가 사회자로 나서고, 박근혜 후보를 비롯한 대선후보들의 삼자 혹은 양자 토론을 시청하고 싶은 유권자들의 바람이 그리도 비현실적인 몽상인 걸까?
대선일까지 44일이 남았다. 변죽만 울리거나 변화되고 있는 민심이나 세계적 분위기를 담아낸 대선 관련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노라면 양자토론을 통해 선거를 축제의 판으로 만드는 미 대선과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2차 미 대선 후보 토론회를 보도한 CNN ⓒ CNN
부러운 미 대선 TV 토론과 변죽만 울리는 우리 지상파 TV지난 10월 22일, 오바마와 롬니의 미 대선 후보 양자 토론을 지켜본 시청자들이 60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 어마어마한 수치도 1차나, 2차 토론보다 풋볼 빅매치나 메이저리그 빅게임 중계와 맞물리며 낮아진 결과다. 미국 TV 정치의 역사는 'TV 대통령'이라 불리며 토론에서 닉슨을 압도한 케네디를 배출했던 1960년대에 출발했다. 이미지 정치의 최대 수혜자인 레이건 시대인 1980년대는 8000만에 달하는 시청자가 TV 토론을 통해 대통령의 정책을 점검했다고 한다.
이번 미 대선에서도 TV 토론은 유투브와 SNS 등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와 결합하며 후보 간의 정책 비교와 함께 인상적인 순간을 미 유권자들은 물론 전 세계에 전파시켰다. 토론 열기가 과열되자 오바마와 롬니 후보가 토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후보 간 토론을 포함한 TV 토론이 메인메뉴라면 어떤 대선 관련 프로그램도 결국은 곁들인 메뉴일 수밖에 없다. 후보 간 TV 정책 토론으로 흥행몰이한 미국의 대선과 달리 우리 현실은 열심히 변죽만 울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최근 방송된 < KBS 심야토론 >이 대표적이다. 야권 단일화 이슈를 놓고 각 당을 대변할 이들은 불참한 채 정치평론가나 일간지 논설위원, 지난 정부 인사가 등장해 각 정파나 진영논리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입장만 있지 정책은 실종된 TV 토론. 시사보도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4일 방송된 <시사매거진2580>은 각 대선후보에게 바라는 각계 원로들의 바람을 담았다. 그간 되풀이됐던 목소리의 재탕 수준이다.
오히려 곱씹을 만한 프로그램은 EBS의 <킹메이커> 3부작이었다. 손석희 교수가 직접 출연하고 내레이션을 맡은 이 프로그램은 미국과 러시아의 과거 대선으로 본 네거티브와 이미지 정치, 중도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 전략이 불필요한 이유, 오바마 선거 캠프의 새로운 선거 전략 등을 실험과 취재, 인터뷰 등을 통해 다각적으로 조명했다. 초점은 물론 우리 유권자가 어떤 후보에게 투표해야 하고, 또 어떤 후보는 피해야 하는지에 맞춰져 있었다.
어쩌면 지난달 21일 방영된 <KBS 스페셜>이야말로 현재 지상파 대선 관련 프로그램이 내놓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최선의 의도를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와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 등의 토크쇼를 통해 진보와 보수, 무당파를 아우르려는 시도. 동시에 일반 유권자들의 목소리와 각 정책이나 현안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 그 안에 정치권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대선과 투표에 접속시키는 일 말이다.
▲ 10월 29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마주한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 ⓒ 유성호
누가 TV를 바보상자로 회귀시키는가하지만 유권자들의 바람과 달리 현실은 역주행 그 자체다. 한창 달아오르고 또 후보들의 정책을 점검하는데 열을 올려야 할 판국에, 더더욱 가장 영향력이 큰 방송사들이 조용하고 잠잠하다. 그 중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대선 후보 간 TV 토론회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개탄스러울 정도다.
특히나 13일부터 3일간 생방송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2012년 대선 후보 초청 토론 - 질문 있습니다>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KBS 노조 측은 4일 성명을 통해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출연을 약속한 상황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출연의 전제 조건으로 토론 순서에서 마지막 날을 주거나 아니면 자신만 별도의 날짜를 잡아 달라고 요구했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토론 자체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KBS 사측은 "여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려보자. 정치부를 통해 최대한 설득해 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공영방송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처사요, 정치권의 눈치 보기가 아닐 수 없다. 대선 후보 TV 토론은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다. 박근혜 후보는 선거법으로 정해진 법정 토론이 확정되기까지 국민의 인내심을 진작시키려는 의도일까.
시청률 제고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각 방송사라면 '정치의 영역'이란 핑계를 대기보다 이 TV 토론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 각 후보 캠프를 압박하는 것이 옳다. 더불어 뉴스와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통해 TV 토론도 볼 수 없는 역주행의 대선 레이스를 누가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방송사가 나서서 균형 잡힌 질타를 가하고 책임 소재를 따져야 마땅하다. 국민이, 유권자가, 시청자들이 바라는 건 <힐링캠프>에 나와 스피드 게임을 하고 과거를 회고하며 대선 출마 선언을 위해 토크쇼 이용하는 대통령 후보가 아니지 않나?
제대로 된 정책 검증과 함께 각 후보의 정치 철학과 비전을 역설하는 그 선의의 경쟁을 보기가 이리 어려울 줄이야. 상호 비방은 차치하더라도 양당의 정책을 놓고 뜨겁게 격돌하는 미 대선 후보들의 열정과 권력 의지를 언제까지 우리는 부러워만 해야 하는 걸까. TV 토론도 볼 수 없는 2012년 대선레이스, 누가 TV를 바보상자로 회귀시키고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막으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