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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이 국민의 기대에 너무 못 미치기 때문일까. 대선 정국에서 정치개혁이 관심을 끌고 있다. '대통령 권한 축소' '4년 중임제' '결선투표제'가 거론되고 심지어 '정치 자체의 축소' '여성 대통령 탄생'을 정치 쇄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과녁을 벗어난 담론일 뿐이다.

국회, 대표성도 없고 견제도 못하니 차라리...

이 시점에서 진정한 개혁이란 무슨 기발한 아이디어를 도입하는 게 아니라 무너진 원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재 민주주의 원론에서 가장 많이 벗어나 있는 부분은 대통령이 아니다. 국회다. 국회는 국민을 대표해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삼고 있는데, 현재 국회는 국민 대표성이 없이 국민과 따로 노는 '따로 국회',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지 못하는 '시녀 국회'가 돼버렸다. 그러면서 국회의원이 이런 저런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 국민이 좋아할 리가 없다.

먼저 국민 대표성 없는 따로국회 문제부터 보자. 국회의원의 구성이 경제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연령·성별·직업·교육·거주 지역 등 어느 기준으로 보더라도 국민과 매우 다르다. 심지어 병역 미필자 내지 면제자, 부동산 투기 전력을 가진 이도 많다.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사물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국회는 자연히 국민과 동떨어진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 지역구 선거방식 때문에 국회의원이 국민 대표가 아니라 고작 동네 대표가 돼 있다. 의원들이 재선에 신경 쓰느라 국가 전체가 아니라 자신의 지역구를 위한 일에 골몰하고 예산 심의 때도 단기간에 빛이 날 지역구 사업을 챙기는 경쟁을 벌인다. 국회의원 선거공약이 구청장 선거공약과 비슷하다.

둘째로, 견제 못하는 시녀 국회 문제는, 집행부의 장을 배출한 정당과 국회의 다수당이 같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긴다. 여대야소가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사람도 있지만 삼권분립의 삼권을 입법부·행정부·사법부가 아니라 여당·야당·사법부라고 오해해야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 권력분립이 정국 안정보다 하위 개념인가? 또 각국의 경험으로 볼 때 여대야소 내지 소수 정당의 정치 독과점 체제가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증거도 없다. 생물의 종의 다양성을 지지하면서 정당의 다양성은 예외로 보는 것은 이상하다.

매일같이 '따로 국회' '시녀 국회'를 보는 국민은 그렇다면 국회를, 그리고 정당과 선거도 아예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투표는 그저 선거제도가 있으니까 마지 못해 하거나, 상대방이 미워서 분풀이 삼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정치 축소 또는 국회 축소라는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 같다.

비례대표 선거와 추첨, 두 방식으로

그러나 국회를 없앨 수는 없다. 국회가 없으면 그나마 정권과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할 길이 아예 없어진다. 국회를 유지하면서 그 의미를 살릴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해결의 방향은 뻔하다. '따로 국회'를 막으려면 국회의원과 국민의 구성을 비슷하게 만들고 지역구 방식을 탈피하면 된다. '시녀 국회'를 막으려면 대통령 소속 정파가 국회 다수당이 될 수 없도록 하면 된다.

이런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국회의원 추첨제'다. 국회의원을 일반 피선거자 중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뽑자는 것이다. 대표성이 확실하고 지역구 선거와 무관하고 대통령을 배출한 정파가 국회를 장악할 일도 없다. 엉뚱한 아이디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왕조시대에 누군가 보통선거에 의한 의회제도를 제안했다면 정말 엉뚱한 사람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다만, 그래도 정당과 전문 정치인은 필요하기 때문에 선거의원과 추첨의원을 같이 두는 절충안이 좋다고 생각한다. 선거의원은, 지역구 선거의 폐단을 없애고 인물 대결보다는 정책 대결을 지향하기 위해 정당 비례대표 방식으로만 뽑는 게 좋겠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현행 정당법을 바꾸어 정당 설립 요건을 대폭 완화하고 서울에 중앙당을 두는 전국 정당만이 아니라 지역에 기반을 두는 정당도 설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추첨의원의 경우, 무작위 추첨의 우연성을 감안하여 추첨의원 정수는 선거의원보다 많게 (예를 들면 3배)로 하고 추첨의원의 임기는 선거의원보다 짧게 (예를 들면 반으로) 한다. 결정권은 추첨의원과 선거의원이 50-50으로 나누어 가진다. 추첨의원은 각자 자신의 직업에 그대로 종사하면서 의원을 겸한다. 각종 회의와 표결 등에 직접 참석해도 되고 거리가 멀면 화상회의 등 원격으로 참여해도 된다.

의원 추첨제에 대한 염려는?

한편, 국회의원 추첨제에 대해서는 비판 내지 염려 차원에서 3무론(三無論)이 제기될 것이다.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의원은 국가나 공동체에 대한 관심도 없고, 경험과 지식도 없고, 공무를 돌볼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배심원 또는 참심원을 두는 국민참여형 재판 제도에 대한 반론과 닮은 꼴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국민참여형 재판이 잘 운영되는 걸 보면 추첨의원제 역시 도입 초기의 과도기만 잘 넘기면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별로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해 본다.

첫째로, 공무에 무관심한 사람이 추첨의원이 돼 임기를 헛되이 보내는 문제는, 의원으로 이름만 걸어놓는 사례가 많지 않도록 하면 된다. 추첨의원에게 업무와 무관한 특권을 일체 주지 않고 보수도 일하는 정도에 따라 지급하면 의원직을 포기하는 사람도 더러 생길 것이다. 또 참여도가 너무 낮은 추첨의원을 교체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하도록 한다.

둘째로, 경험과 지식의 문제 역시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우선 추첨의원을 두는 이유가 전문 지식이 아니라 평균적인 국민의 상식을 반영하자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의정 활동에 필요한 기본 지식은 의원이 된 후에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면 된다. 현안 판단에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지도 않을 것이다. 선거의원과 국회 전문위원이 분석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시민단체에서도 각종 의견을 보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고졸 정도면 대부분 합격할 수준의 간단한 정치인 자격시험제도를 둬 합격자만 의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또 의원 추첨제가 일단 도입되면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준비를 시킬 것이므로 문제는 더욱 적을 것이다.

셋째로, 자기 일에 바빠서 공무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문제도 보상 체계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추첨의원이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생업을 못하는 시간에 대해서는 소속 직장에 또는 (자영업의 경우에는) 본인에게 보상을 하면 업무시간의 일부를 공무에 할애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을 낼 수 없는 추첨의원이 있다면 앞서도 말했듯이 교체하면 된다.

국회에 바로 도입하기 어려우면 지방의회에서, 그리고 지방의회도 전면 실시에 앞서 일부 지방의회에서라도 시범 실시를 해볼 만하지 않을까?


태그:#정치개혁, #따로국회, #시녀국회, #추첨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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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행정학부 명예교수. 사회정의/토지정책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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