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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사건, 금강산 관광 중단, 대북단체 '삐라' 살포와 북한의 조준타격 논란 등. 이명박 정부 내내 남북 관계는 차가웠고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북한과 맞닿아 있는 접경 지역은 곧바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지금, <오마이뉴스>는 접경지를 찾아가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편집자말]
양구군 돌산령터널을 나오면 해안면이다. 군사지역을 알리듯 진입로부터 군용트럭이 앞을 가로막았다.
 양구군 돌산령터널을 나오면 해안면이다. 군사지역을 알리듯 진입로부터 군용트럭이 앞을 가로막았다.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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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하순, 강원도 양구로 향하는 마음은 기대 반 긴장 반이었다. 고운 단풍이라도 만나면 좋지만, 앞에서 천천히 가는 군 트럭을 만나면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춘천시 강원도청 앞에서 도청 관계자와 함께 양구로 향했다.

춘천을 벗어나자 단풍이 절정이었다. 하지만 차는 금방 터널 속으로 쏙 들어갔다. 과거, 춘천에서 양구로 가려면 구불구불 이어지는 배후령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길이다.

지난 3월 배후령터널이 개통됐다. 터널 길이는 총 5.1km로 국내 최장 수준이다. 배후령터널이 개통되면서 내륙의 오지로 불리던 양구는 이제 춘천에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서울에서도 약 두 시간이면 족하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들어설 때는 오르막이었는데, 터널을 나오니 내리막길이다. 곧이어 나온 삼거리에서 군용 트럭이 보였다.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군장을 꾸려 등에 메고 K1소총도 들고 있었다. 북한과 맞닿아 있는 접경지 양구에 온 느낌이 확 들었다.

양구에는 육군 2사단과 21사단이 있고, 약 2만여 명의 군인이 근무한다. 양구에 주소지를 둔 주민은 약 2만3000명이다. 전국 내륙에서 가장 적은 인구다.

전국 내륙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양구

양구 읍내 외곽 길을 통해 해안면으로 향했다. 읍내에서 약 20km 거리였다. 해안면은 북한과 접해 있다. 을지전망대가 있고, 제4땅굴이 있다. 그리고 전쟁기념관이 대체로 잘(?) 정비돼 있다. 6.25전쟁 당시 그 유명한 '펀치볼 전투'가 벌어진 곳도 해안면이다.

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
ⓒ 이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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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땅굴 앞에 전시된 장갑차.
 제4땅굴 앞에 전시된 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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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볼 전투는 6.25전쟁 당시 해안분지(펀치볼)을 차지하기 위해 남북이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치열한 교전을 벌인 전투를 말한다. 당시 한국과 미군은 지형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북한군 제1사단을 격퇴했다. 당시 남북 군인과 미군 등 약 3000여 사망했다고 한다.

동면을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 5km 정도를 더 달리니 돌산령터널이 나왔다. 터널이 개통되기 전에는 차로 돌산령을 넘어가는데 20분 정도가 걸렸다는데, 지금은 2분이면 산을 건넌다.

터널 끝, 여기서부터 해안면이다. 해안면은 6개 리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다. 현재 582세대 1485명이 거주한다. 가구당 2.55명이 사는 셈이다. 산을 다 내려오니 면소재지가 보였다. 차를 서행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오래된 동네, 아니 오래된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방에 들러 커피 한잔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면소재지 주변 곳곳에 분대 병력 정도의 군인이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실탄을 정말 장전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무장 병력 모습이었다.

좀 더 서행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일반 시민은 잘 보이지 않고 총을 든 무장 군인들만 자주 보였다. 잠시 뒤 전쟁기념관에 들렀다. 전쟁기념관, 을지전망대, 제4땅굴 출입 확인서를 받으려면 신분증을 재출하고 신분확인서에 주소, 전화번호, 주민번호도 써야 했다.

전쟁기념관을 살펴보는데, 60~70대의 어르신 20여 명이 들어왔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한 어르신에게 다가갔다. 

-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일흔일곱."

- 그럼 6.25 때 몇살이셨어요?"
"열다섯 살."

- 그럼 생각나시는 게 많겠네요?"
"다 생각나지. 근데 뭐하는 사람이야?"

- 네, 저는 취재 왔어요.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있구나. 그럼 사진 한 장 찍어봐."

- 그런데 무슨 계기로 여기로 여행을 오셨어요?"
"어, 안보가 중요하잖아. NLL 등 말도 많고. 근데 분명한 것은 이제 전쟁을 다시 하면 안 돼!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어.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들 그거 알어야 해. 사람 사는 게 뭐야?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이 키워 사람 만들 듯이, 저쪽도(북한) 어린애처럼 달래야 한다고. 말 안 듣는다고 혼내면 결국 사고 친다고. 애들은 다 그렇잖아."

서울에서 오신 어르신이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서울에서 오신 어르신이 전쟁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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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견 '야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
 충견 '야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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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신들은 보도용 사진을 많이 찍어본 듯 관람하는 포즈를 취했다. 키가 큰 한 어르신은 해병대 출신이라며 펀치볼 전투 상황을 설명했다. 그 어른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남자들 군대 이야기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사진 한 장만 찍고 얼른 나왔다. 

이번에는 제4땅굴로 향했다. 산을 향해 4km 정도 올라가야 했다. 땅굴 입구 검문소에 도착하니 어르신들이 타고 온 차 두 대가 통과를 못하고 있었다. 아래 전쟁기념관에서 확인증을 먼저 받았어야 했는데 곧바로 올라오신 거다.

제4땅굴에서는 먼저 준비된 영상부터 관람하고 안내를 받았다. 평창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오신 어르신들과 젊은 부부 등 20여 명이 우리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영상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땅굴 내부는 공사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양구에서 늘어나는 인삼밭... 주인은 모두 외지인

제4땅굴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다 인삼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인삼 심는 시기는 봄이고, 지금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대부분 6년근 인삼밭이었다.

"우린 여기 사람 아닌데."

양구에서 평생을 살았는지 묻자 76세의 할머니가 답했다.

"여기서 인삼농사 짓는 사람 중에서 여기 사람 하나도 없어. 경기도 여주, 광주, 이천, 그리고 강원도 홍천 등에서 오는 거야. 우린 충북 음성에서 왔어."

할머니의 말대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양구에는 인삼밭이 꽤 늘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외지인들이 짓는 농사다. 다른 지역에서 인삼을 재배하던 사람들이 새 경작지로 양구를 선택한 거다.

해안면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인삼은 특용 작물이기 때문에 농부라 하더라도 기술과 자본이 없으면 재배할 수 없다"며 "경험과 자금력이 풍부한 다른 지역 농민들이 양구에서 땅만 빌려 인삼을 재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기술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인부들도 거의 대부분 외지에서 온다"고 덧붙였다.

양구군 해안면에는 외지인들이 인삼농사를 많이 짓는다.
 양구군 해안면에는 외지인들이 인삼농사를 많이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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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주민이 아닌 '외지' 아주머니들과 함께 식사를 한 뒤 다시 을지전망대로 향했다. 검문소에서 군인이 "길 내려갈 때 저단 기어를 사용하라"고 했는데, 그만큼 가파른 길이었다.

을지전망대가 가까워지자 철조망이 길 옆으로 이어졌다. 을지전망대에서는 북한 쪽을 향해 사진도 찍을 수 없다는 엄한 주의를 들었다. 을지전망대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움푹 패인 분화구처럼 보였다. 6.25전쟁 때 '펀치볼 전투'가 벌어진 마을에는 안개가 잔뜩 끼었다.

양구 해안면을 떠나 양구군에서 지원하는 작가 창작실 '정림리 창작스튜디오'에서 정현우 작가를 만났다. 곧 박수근 화가 탄생 100주년이 다가오는데, 양구군에서는 의미 있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박수근은 1914년 2월 21일 양구에서 태어났다.

양구에 머무는 동안 가장 궁금했던 건 '왜 양구에는 양구 사람이 별로 없을까'였다. 기자가 이날 만난 사람 대부분은 외지인이었다. 읍내에서는 군인이, 외곽에서는 외지인 농민들이 주로 보였다. 이런 상황을 정 작가에게 물었다. 정 작가의 대답은 이랬다.

"양구, 통일 외에는 답이 없다"

"그거야 먹고 살게 없으니까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서 그렇지. 군인 가족이 양구 주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들도 결국 떠날 사람들이지. 양구에서는 (군인을 상대하는) 장사 아니면 먹고 살 게 없어. 최근까지 교통도 불편했고."

사진 아래로 보이는 마을과 뒤로 보이는 산을 넘으면 북한 땅이다.
 사진 아래로 보이는 마을과 뒤로 보이는 산을 넘으면 북한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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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건설업을 한다는 염아무개씨가 말을 거들었다. 양구에서 나고 자랐다는 염씨의 말은 양구의 오랜 염원과 맞닿아 있었다.

"양구가 사람 사는 곳이 되려면, 통일 외에는 답이 없어요. 강원도 양구와 고성 등 남북 접경지역에 '완충지대'를 만드는 게 통일의 첫 걸음이라고 봅니다. 개성공단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봐요. 평화를 보장하는 완충지역에서 남북한 주민이 편하게 만날 수 있게 해야죠. 양구 해안면에 완충지대 또는 평화지역을 만들어 남북한 사람들이 간소한 절차만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면 좋죠. 이곳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따로 만들고, 이산가족도 만나게 하고...."

'양구의 아들' 염씨의 '통일론' 이야기는 약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통일 외에는 답이 없다"는 염씨의 말은 허언이 아닌 듯했다.

실제로 양구는 북한 금강산으로 향하는 가장 짧은 길을 낼 수 있는 지역이다. 이 탓에 금강산 개발 초기, 전국의 땅투기꾼들이 양구로 몰려들기도 했다. 여전히 양구는 '금강산 가는 길'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강원도는 물론이고 양구군은 대북 관련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양구군청의 한 관계자는 "청정지역이라는 것 외에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양구에는 없다"며 "제조업 공장과 기업체가 없기에 인구를 유입할 길이 막혀 있다"고 답답한 마음을 나타냈다.

이어 이 관계자는 "금강산 가는 길이 강원도 고성에서 뚫렸는데, 양구에서 길을 내면 서울 쪽에서 보면 훨씬 짧은 코스"라며 "대북 관련 평화 사업은 접경지 지역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 금강산으로 가는 강원도 고성의 길도 막혀 있다. 이래저래 양구는 답답한 상황이다.

덧붙이는 글 | 이종득 기자는 2012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대선특별취재팀입니다.



태그:#대북정책, #양구, #펀치볼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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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아재양념닭갈비를 가공 판매하는 소설 쓰는 노동자입니다. 두 딸을 키우는 아빠입니다. 서로가 신뢰하는 대한민국의 본래 모습을 찾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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