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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뤄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2012년,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서울 곳곳에서는 '마을공동체 만들기'가 한창입니다. 함께 '집밥'을 먹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는 것부터, 아이를 같이 키우고 일자리를 나누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까지. 반세기 전 간디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오마이뉴스>는 다양한 마을만들기 사례를 통해 마을이 왜 희망인지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동네사람들이 만드는 마을신문 <도봉N> 제30호
 동네사람들이 만드는 마을신문 <도봉N> 제30호
ⓒ 도봉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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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고 김수영의 시 <풀>의 일부다. 1968년 6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쓴 이 작품에서 민중의 저항과 생명력을 노래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힘을 굳게 믿었던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일까? 도봉구는 서울시에서도 풀뿌리단체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역 중 하나다. '서울동북여성민우회'처럼 20년 넘은 단체도 있고, 초안산 자연해설가 '초안샘'을 배출해 자연학교를 운영하는 '도봉시민회'도 있다. 주민들의 참여를 꾀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고민하는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과 지역공익법인 준비모임인 '도봉사람들'도 지역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려 사람들을 엮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도봉N>이 있다. 2009년 초 동네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몇 사람이 막걸리를 마시다가 "우리 신문 한 번 만들어볼까?"고 말한 데서 시작한 '마을신문'이다. 원대한 포부를 갖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창간부터 참여한 이창림(36, 시민운동활동가) 편집장은 "꼭 마을미디어라기 보다는 동네 사람들이 만나는 또 하나의 계기로 생각했다"며 "마을 사람들, 우리 이웃들이 사는 이야기를 실어보자는 취지로 '마을신문'이란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제호의 'N'은 '도봉에는, 도봉뉴스(News), 도봉네트워크(Network)'라는 뜻도 담겨 있다.

"우리 마을신문 한 번 만들어볼까" 막걸리 먹다가 모인 사람들

2009년 <도봉N>이  열었던 '수다로 만드는 남자들의 김장잔치'
 2009년 <도봉N>이 열었던 '수다로 만드는 남자들의 김장잔치'
ⓒ 도봉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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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N> 11월호는 어떤 '뉴스'로, 어떤 '네트워크'를 보여줄까? 지난 20일 오후 도봉구근로복지공단 지하 1층 '사회적경제 허브센터'에 <도봉N> 편집위원들이 모였다. 편집위원 14명은 시민단체에서 일하거나 개인 사업을 하는 등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시간을 쪼개어 기획·취재를 하고, 주머니를 털어가며 신문을 만들고 있다.

이날은 7명만 참석해 다음달 5일 나올 31호 신문을 기획하고 있었다. 원고 마감일은 10월 31일. 11일 동안 부지런히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해 8면짜리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 홍은정(48) 편집위원은 "맥주 없이 모이니까 회의하는 게 아닌 것 같다"며 웃었지만 편집회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메모를 하고, 의견을 밝히느라 바빴다.

"수능 전에 발행하는 거니까 수험생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어보면 어때요?"(이창림 편집장)

"동북시민학교에서 이번에 바위 글씨 작업하시는 분이랑 도봉산에 다녀왔어요. 그 선생님이 곧 구민회관에서 전시회를 하신다는데, 가을이니까 소개하면 좋을 것 같은데."(김미현 편집위원)

"인터뷰는 누구를 하지?"(유성종 발행인)
"20년 넘게 구립어린이집 하시면서 길거리 책방 등 마을활동에 열심이신 원장님을 인터뷰할까 생각하고 있어요."(홍은정 편집위원)

현직 기자인 김승호(40) 편집위원은 "다음 주면 결혼 10주년인데, 그 기념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만원의 행복'을 채울까"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만원의 행복'은 단돈 1만 원으로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를 알리거나, 개인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생활광고란이다. 다른 편집위원들은 "좋은 생각"이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생활광고 판매만으로 매월 1만2000부의 신문을 만들고 배포하는 데 쓸 150만 원가량을 마련하기란 역부족이다. <도봉N>은 구독료가 없고, 구청 등 공공기관의 지원도 받지 않아 재정 문제를 두고 고민이 깊다. 현재는 회원 30~40명이 한 달에 5000원~1만 원씩 내는 후원금에 편집위원들이 조금씩 보태는 돈으로 꾸려가고 있다. 배포비용은 비상근 직원과 자원활동가 40여 명의 도움으로 절감하고, 부족한 예산은 1년에 한 번씩 여는 일일주점으로 채운다. 지난 17일에는 도봉구민회관에서 3주년 후원주점 행사 '마을신문을 부탁해'를 열었다.

"관 지원받아 보도자료 베끼기 급급한 신문과 달라... 기사가 살아 있다"

10월 20일 열린 '우리마을 미디어 문화교실'에서 기사쓰기 수업을 받고 있는 청소년들. 도봉N은 지역단체들과 함께 '도봉구 마을미디어 문화교실 기획단'을 꾸려 지난 6~8월 1기 수강생을 배출했다. 9월 시작한 2기생들은 졸업작품으로 '마을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예정이다.
 10월 20일 열린 '우리마을 미디어 문화교실'에서 기사쓰기 수업을 받고 있는 청소년들. 도봉N은 지역단체들과 함께 '도봉구 마을미디어 문화교실 기획단'을 꾸려 지난 6~8월 1기 수강생을 배출했다. 9월 시작한 2기생들은 졸업작품으로 '마을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예정이다.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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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마을신문을 부탁받으러' 온 주민들 대부분은 <도봉N>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미혜(50, 도봉구청 직원)씨는 "관(官)에서 지원받고, 보도자료 베끼기에 급급한 신문들과 달리 기사 하나하나 놓칠 게 없다"며 "신문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박숙희(58) 서울동북여성민우회 생활협동조합 이사장은 "'도봉에 이런 일이 있구나, 어느 집은 아이 돌잔치를 하고 이 단체는 행사를 준비하는구나' 등을 알게 해주는 소통 공간이 바로 마을신문"이라고 얘기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30대 남성 독자는 "<도봉N>은 외부 후원 없이 열정만으로 시작했는데, 그 힘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며 "환경, 돌봄 등 다른 지역신문들이 건드리지 않는 문제들을 건드린다"고 평가했다. 기업형 슈퍼마켓(SSM) 탓에 동네슈퍼가 힘들다거나 도봉구의회 의원활동비 부당인상을 지적하는 등 지역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말한 것도 <도봉N>의 성과였다.

<도봉N> 창간 3주년 기념으로 주민 75명에게 한 설문조사(중복응답) 결과, '지역신문이 담아야 할 기사'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은 구청·구의회 행정소식과 지역 사건·사고(각각 35명)였고, 그다음은 지역 비리 고발(32명)이었다. 홍 편집위원은 "올해 독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기사도 '서울 25개구에서 재정자립도가 가장 낮은 도봉구가 지역신문 구독료 보조금액은 세 번째로 많다'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기사가 나간 후 지역시민단체들은 주민 308명의 서명을 모아 10월 9일 서울시청에 주민감사청구를 접수시켰다.

주민들이 마을신문에 관심을 갖고 애정을 쏟는 데는 지역적 특성도 작용한다. 새로 지은 아파트가 많은 창동역은 인구 유출입이 잦은 편이지만 그 외 다른 곳은 상대적으로 '도봉구 토박이'가 많다. 방학3동에 사는 조병훈(47, 자영업) 편집위원은 39년, 역시 방학3동에 살다가 지난달에 노원구로 이사한 홍은정 편집위원은 36년을 도봉구에서 살았다. 이창림(쌍문2동) 편집장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고, 유성종(방학3동) 발행인과 김미현(방학3동)·김승호(방학3동) 편집위원도 10년 넘게 도봉구에 뿌리내린 사람들이다.

오랜 시간 얼굴을 맞대고 정을 나누며 살아온 주민들을 더 끈끈하게 만들어준 건 2001~2002년 초안산 골프장 건립과 북한산 관통도로 건설 반대운동의 경험이었다. 두 번의 싸움을 겪으며 사람들은 '공동체의 힘'을 더욱 실감했다. '도봉시민사회복지네트워크(현 도봉사람들)'와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는 카페 '나무야 나무야'가 생겼고, 천연비누나 장바구니를 만드는 생태문화공간 '도깨비공방'이 들어서는 등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졌다. 어린이날마다 '차 없는 거리 아이들 세상' 행사가 열린 지도 벌써 10년째다.

'수다로 만드는 남자들의 김장잔치', '어깨동무 마라톤', '마을운동회' 등 지난 3년간 <도봉N>이 주최한 행사들도 다양하다. 올해 <도봉N>은 다른 지역단체들과 '도봉구 마을미디어문화교실 기획단'을 조직,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우리마을 미디어 문화교실(아래 미디어교실)'을 만들었다. 6~8월에 1기를 배출했고 9월부터 2기를 운영하고 있다. 미디어교실 운영을 맡고 있는 윤원필(38, 마을활동가) 편집위원은 이날 회의 중간에도 2기 수강생들이 취재계획을 짜고 있는 옆방을 몇 번씩 오가느라 정신없었다.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 마을에선 다시 주인공이 돼요"

<도봉N>은 지난 6월부터 '우리마을 미디어문화교실'을 열고 있다. 사진은 1기생들이 라디오방송 체험을 하는 모습.
 <도봉N>은 지난 6월부터 '우리마을 미디어문화교실'을 열고 있다. 사진은 1기생들이 라디오방송 체험을 하는 모습.
ⓒ 김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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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미디어교실에선 김승호 편집위원의 기사쓰기 수업이 있었다. 이후 수강생들은 조별로 모여 10월 27일 열리는 주민들의 벼룩시장 '제8회 골목대장터' 현장취재 계획을 짰다.  2기 수강생들은 마을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11월 18일 시사회를 열고, 같은 달 24일에는 인터넷 생방송을 할 계획이다. 1기 졸업작품은 초안산 생태공원에서 진행한 '보이는 라디오' 공개방송이었다.

김미현(42, 도봉시민회 스태프)편집위원은 "미디어교실 강의를 듣다가 얼떨결에 <도봉N>에 참여하게 됐는데, 사실 그전까지는 지역에 마을 관련 활동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며 "제 또래나 더 젊은 사람들은 마을 경험이 전혀 없어 너무 '마을, 마을'하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창림 편집장도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갈까'를 적극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며 "이 동네에서 활동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될 즈음, 그때 맞는 역할을 지역사회에서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도봉구 안에 다양한 마을활동이 진행 중인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동참하지 못하는 주민들이 있다는 점도 과제다. 홍은정  편집위원은 "1만2000부를 뿌려도 <도봉N>을 모르는 분들도 많다"며 "독서모임, 숲속놀이터 만들기 모임 등 여러 모임들이 있지만, 지역 전체에서 이뤄지려면 한참 멀었다"고 털어놨다. 김승호 편집위원은 "도봉구 내에 여러 단체와 활동들을 어떻게 묶느냐"도 고민이다. 그는 "다른 지역신문들은 이런 얘기가 없다"며 "<도봉N>이 나아가려는 방향은, 마을신문으로서 마을 내 소통과 놀이의 장,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이란 단어가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저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각자 삶의) 주인공인데 경쟁 구조 속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버리지 않나요? 저는 마을이란 게 그걸 회복하는 일 같아요. 자기 스스로가 삶의 주인공임을 인식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일이요."

유성종 발행인은 주민들이 <도봉N>을 만들고, '나무야 나무야'에서 대화를 나누고, '골목대장터'에서 물건을 팔며 마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풀은 바람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 경쟁에 지쳤다가도 마을에서 다시 일어나는 도봉 사람들은 그 풀을 닮아 있었다.


태그:#마을, #도봉N, #마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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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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