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진실의 힘' 사무실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교 시민군으로 참가했던 강용주씨를 만났다.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진실의 힘' 사무실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교 시민군으로 참가했던 강용주씨를 만났다.
ⓒ 조재현

관련사진보기


"당시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질문을 받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거슬러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 소장(51)은 당시 고3이었다. 그날은 금남로의 한 제과점에서 전남여고생들과 미팅 중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밖을 내다봤다. 대학생들이 데모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재밌는 구경거리'라고 생각했죠. 친구들은 여학생이랑 얘기하느라 저 혼자 참여했어요. 데모하는 바람에 당시 만난 여고생들 얼굴도 생각 안 나네요(웃음)."

오후 3~4시쯤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시민들이 돌을 던지면 도망가던 경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압몽둥이와 대검을 지닌 공수부대는 달아나는 시민들을 끝까지 쫓아갔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들리고 신음소리가 났다.

어렵게 현장을 빠져나온 그는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각자 목격한 '학살'을 공유했다. 그를 포함해 7, 8명이 모여 '이러다가 광주시민 다 죽는다, 우리라도 가서 데모하자'고 결의했다. 어느 친구 집에 모여 비장한 마음으로 각자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하나로 모았다. 살아남는 사람이 부모님께 전하기로 약속했다. 있는 돈을 다 털어 종이를 사고, 그 중 한 명이 다니는 교회 등사기를 몰래 가져다가 '광주시민들 일어나서 싸우자'라고 쓴 유인물을 만들었다. 다른 학교에도 연락해 21일에 모이기로 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애국가 울려퍼진 뒤 사람들이 쓰러졌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의 모습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의 모습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근데 21일이 되니까, 시민들이 광주시를 다 해방해버린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하고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집이 전남도청과 가까웠는데, 도청 앞에는 일반 군인들이 전투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시민들은 물도 먹고 빵도 먹는데, 군인들은 몇 시간째 서 있어서 제가 물을 갖다 줬죠. '저놈들은 사람 죽인 군인인데 왜 물을 떠다주냐'는 사람들에게 '공수부대 가고 일반 군이 온 거 아니냐, 그리고 전두환이 나쁘지, 이 사람들이 무슨 죄냐'고 싸우면서까지 해서 물을 나눠줬죠. 오후 1시쯤 되니까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때,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노래가 멈추자 곧바로 총소리가 이어졌다.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군인들은 일반 군인 복장을 하고 있던 공수부대원이었다. 곳곳에서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을 본 강 소장은 "광주시민을 향해 총을 쏜 군인들에게 물을 떠 다준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며 말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그렇게 싸움을 시작했다. 옆 사람이 총에 맞고 쓰러져도 겁나지 않았다. 죽음이 두렵기보다 학살에 대한 분노가 컸기에 그는 삽자루를 들고 뛰어다녔다.

분노한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공수부대에 맞섰다. 21일 시가전 끝에 도청에 있던 군이 전남대학교로 쫓겨나면서 광주는 다시 자유로워졌다. 22~25일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누고, 질서를 유지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팔 부위를 다쳐 7, 8바늘 정도 꿰맸던 강 소장도 붕대를 감은 채 시민공청회에 참가했다.

26일 오후 7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발표했다. 저녁밥을 먹은 강 소장은 어머니에게 큰 절을 했다.

"도청 지키러 간다고 하니까 반대하셨죠. '그러면 누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겠냐, 나라도 보내달라'고 했더니 절 잡고 한참 우시고는 담배 한 갑 사다주셨어요. 그걸 다 피우고 도청 앞에 가서 총을 받고 근처 수협 건물 화단 옆 작은 부스 위에 있었어요.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한참 총소리가 나더니 조용해졌습니다. 도청에서 시민군들이 항복해 나오고, 그 안으로 군이 들어가고, 탱크가 들어오고. 그걸 본 순간 '다 끝났구나, 우리가 졌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두려웠어요.

온몸을 덜덜 떨며 총을 버리고 빠져나왔습니다. 근처 식당에 숨어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폭도들은 들어라. 너희들의 아지트 도청은 장악됐다. 투항하라'는 방송이 계속 나오는데, 금방이라도 (계엄군이) 와서 내 뒷목을 잡아끌고 갈 것 같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죠. 10시쯤 시민들이 하나둘 도청 앞으로 나오기에 '지금 빠져나가지 않으면 언제 나갈지 모르겠다' 싶어 건물 셔터를 열고 나왔어요. 마치 소설처럼 그 앞에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제가 죽은 줄 알고 도청 부근을 계속 돌아 다니셨다고…."

"5월 광주로 내 영혼에 금이 가버렸고, 내 세계가 망가졌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며칠 동안 잠만 잤다.

"내 영혼에 쨍하고 금이 가버렸어요."

도청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같이 죽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다는,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던 강 소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삶 자체가 힘들었고, 내가 알던 세계가 다 망가졌다"며 "생존할 방법이 없어 학교를 그만 두고 몇 개월 동안 전라북도의 절에서 지냈다"고 말했다.

1980년 겨울에는 포장마차를 했다. 하루는 어머니로부터 '꼭 할 얘기가 있으니 집에 오라'는 연락이 왔다.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준 뒤 내내 말이 없던 어머니는 그의 손을 꼭 잡고 "학교를 다시 가라"고 부탁했다. "안 된다"는 그의 매몰찬 말에 어머니는 계속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의 눈물은 그 어떤 무기보다 그를 아프게 했다. 결국 복학을 결정했다. 어머니는 벽장 깊숙이 간직해둔 교복과 책가방, 책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학교로 돌아가는 과정도 쉽진 않았다. 5·18 당시 시민군에 참여했고 친구들과 시위를 계획했다는 이유로 교육청에선 '폭도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학교에서 13년 일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기로 되어 있던 옛 담임선생님이 "강용주를 복학시켜주는 게 감사패"라며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1981년 4월, 강 소장은 다시 까까머리 고교생이 됐다.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성적이 좋기도 했지만, 1980년 5월 광주에서 본 의사와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계엄군이 쏜 총알이 날아다니는 와중에도 환자를 수술하고, 응급실에 난입해 부상자들을 때리던 공수부대를 막아선 그들은 '인도주의'란 말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줬다. 강 소장은 "우리 사회 의료인들은 5·18 때 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미국과 전두환에 맞서는 싸우는 일'이 목표였던 의대생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진실의 힘' 사무실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교 시민군으로 참가했던 강용주씨를 만났다.
ⓒ 조재현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의사가 그의 목표는 아니었다. 광주를 겪은 뒤, 그는 "광주 시민을 학살한 미국과 전두환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학생운동을 하기로 맘먹었다. 1980년 5월 광주 시내에는 한때 '우리를 구하기 위해 부산에 미국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사실 코럴시호는 계엄군을 광주 진압작전에 투입하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입항한 것이었다.

뒤늦게 이 실상을 알게 된 강 소장은 미국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고민했다. 5·18 당시 방송사가 불타,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라디오프로그램이 북한 방송이었던 기억은 북한에 대한 태도도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학생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계기였던 고민들은 강 소장이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붙잡혀 14년 동안 감옥에서 살게 된 원인이 되어버렸다. 당시 안기부는 그가 북한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은 유학생 양동화에게 포섭당해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정부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란 혐의로 감옥에 갇힌 그는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다. 조작된 사건 때문에, 광주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국가 권력에게 무릎 꿇을 수는 없었다.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다가 굴복해버린 자신에 대한 자괴감도 컸다. 그는 "고문으로 쓰레기통에 처박힌 내 영혼이 또 다시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할 순 없었다"며 "내가 나로 다시 살고 싶어서 싸웠었다"고 얘기했다.

출소 후 그는 학교로 돌아가 세상으로 연착륙할 준비를 했다. 의대 5년을 마치고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2008년 초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얻었다. 그 즈음 조작간첩 사건의 희생자들이 재심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심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피해자들이 고문과 감옥생활의 후유증을 제대로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문피해자들은 다른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치유를 돕기 위해 2010년 사단법인 '진실의 힘(이사장 명진 스님)'을 만들었다. 강 소장도 이사로 참여했다. 23일 늦은 오후 <오마이뉴스>와 만난 곳도 서울시 종로구 '진실의 힘' 사무실이었다.

영화 <26년> 제작 두레... "1명, 10명, 100명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영화 <26년> 티저 포스터
 영화 <26년> 티저 포스터
ⓒ 청어람

관련사진보기

"<26년>이요? 강풀 작가의 원작 만화는 못 봤어요. SBS <힐링캠프>에 나오는 한혜진씨가 사격선수로 나오죠? 그 분이 영화에 참여하는 게 해야 할 일이라고, (피해자들의) 치유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걸 보고, 참 감사했어요."

영화 <26년>(감독 조현근, 제작 청어람)는 11월 29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08년 기획안이 나왔지만 광주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그 사람'의 처벌을 계획한다는 내용때문인지 투자자 모집이 어려워 몇 차례 제작이 무산됐다.

제작을 맡은 영화사 청어람은 시민들의 자발적 투자로 비용을 마련하기로 했다. 지난 6월 25일 시작, 10월 20일까지 진행된 '제작 두레 프로젝트'에는 1만5천여 명이 참여했다. 최종 모금액은 7억 3599만 원이었다. 그는 제작비 모금과정을 보며 한 동물실험을 떠올렸다.

"일본에서 원숭이 실험을 할 때 모래밭에 뿌린 감자를 먹으라고 하면 대개 모래를 털어버린 데요. 한두 마리가 그걸 물에 씻어 먹기 시작해도 다른 원숭이들은 계속 모래알을 떼어먹다가, 감자를 물에 씻어 먹는 100번째 원숭이가 나오면 모든 원숭이가 똑같이 감자를 물에 씻어 먹었다고 합니다.

모금 과정도 그랬을 것 같아요. 안 된다, 안 된다 할 때는 내가 첫 번째, 10번째 원숭이였겠죠. 99번째도 '안 된다'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100번째 원숭이가 감자를 물에 씻어 먹기 시작할 때 세상이 변하듯, 영화도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봐요."

"과거사를 바로 잡는 것에서 치유 시작"

'광주트라우마센터 소장'이라는 강용주 소장의 명함은 최근 새로 생겼다. 18일 문을 연 광주트라우마센터는 일반적인 정신보건센터역할에 그칠 뻔했지만, 광주시의 도움으로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강 소장은 "고문이나 학살을 겪은 후 그 현장에 영혼이 갇혀버린 분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데에 우리 사회가 너무 소홀히 해왔다"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시작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사를 바로 잡는 것에서 치유가 시작된다"며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가 광주트라우마센터 개소식에서 한 축사를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아래는 이희호씨의 축사를 정리한 것이다.

광주트라우마센터의 개소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5·18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이곳 광주에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한 국가폭력 피해자를 위한 트라우마센터가 건립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또한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광주시민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키고 정신보건사업 분야에서 전국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트라마우마센터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강용주 센터장은 지난 14년간 감옥과 고문을 견딘 비전향 최연소 장기수입니다. 이런 분을 센터의 책임자로 모신 것에서 우리는 광주트라우마센터가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고문과 가혹행위, 구속, 수감을 겪은 피해자들은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피해당사자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똑같이 고통을 겪었고 현재까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제 가족이 겪은 경험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남편 김대중 대통령은 1973년 일본 동경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살해, 수장의 위기에서 5일 만에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1980년 5·18이 일어나기 전날인 5월 17일밤, 무장한 군인들이 저의 동교동 집에 들어와 총칼을 들이대고 남편을 강제 연행해 갔습니다.

5·18은 제 남편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을 동원한 것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남편은 죽음의 문턱에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옥생활, 연금과 망명, 모두가 고통스런 기억입니다. 그때 저는 1년간 집에서 연금상태였고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광주의 고통을 알지 못했습니다. 1년 후 비로소 알고 통탄했습니다.

어떤 분은 아픈 과거는 잊자고 말하지만, 잊는 것으로 고통이 치유되지는 않습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 도움으로 아픔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야 합니다.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고통과 상처는 계속 될 것입니다. 과거사를 바로 잡는 것이야 말로 가장 효과적인 치유의 방법입니다.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진실의 규명, 가해자의 사과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만이 피해자들의 한도 풀리고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통합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도 광주시민들의 관심과 노력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