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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를 비롯한 남아메리카의 종교는 가톨릭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이며 많은 문화가 가톨릭과 관련되어 있다. 가톨릭은 분명 그들의 생명과 문화를 짓밟은 종교임이 틀림없음에도 남아메리카 인민 대다수가 지금도 가톨릭을 믿고 있다. 자신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종교에 빠져있는 그들을 보면 혼란스럽고 이해되지 않는다.

콜럼버스가 쿠바를 발견하던 시기는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고 가톨릭이 세력을 잡은 때였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인해 가톨릭과 갈등이 생기면서 교황으로부터 분리되어 영국만의 교회인 성공회를 세웠고, 독일에서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가톨릭에 반기를 들어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며 신교를 세워 세를 넓혀가고 있었다. 가톨릭교회가 기댈 곳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가톨릭 국가였다.

두 얼굴의 가톨릭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들은 신항로 개척과 더불어 그들의 종교인 가톨릭을 전파할 사명을 띠고 아메리카로 갔다. 함께 간 가톨릭 성직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까지 들어가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복음을 전파하려 했다. 유일신을 믿는 그들은 기독교와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절대 용인하지 않았다. 원주민의 종교와 그들의 성지를 철저히 파괴했다. 힘이 없는 원주민들의 문화는 가톨릭 신자들의 총칼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의 가톨릭은 문화 파괴자일 뿐이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강제로 원주민들을 개종시키려 했고 스페인어를 배우게 했다. 가톨릭교회를 지어 교회는 식민지에 새로운 문화를 원주민들에게 이식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

스페인이 불과 반세기만에 남아메리카를 차지할 수 있는 데는 가톨릭의 힘을 빼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가톨릭 단체인 예수회와 도미니크 수도회 그리고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성직자들은 종교로 무장되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내륙 깊은 오지로 들어가 유목민이었던 원주민을 정착시켜 스페인의 영토 확장에 큰 기여를 했으며 식민통치의 기반을 닦았다.

기본적으로 욕심이 별로 없고 손님에게 호의 베풀기를 좋아하는 온순한 민족인 원주민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억압과 착취가 심해지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정복자들은 무자비하게 원주민을 탄압하였다. 앞서 말했듯 그들의 잔학성을 보다 못한 라스 카사스 같은 신부는 스페인 국왕에게 식민지를 통치하는 자들의 야만적 행위를 고발했고 인디언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호소했다. 이러한 침략상을 잘 알린 영화가 바로 1986년에 제작된 롤랑 조페 감독의 영국 영화 <미션(The Mission)>이 아닐까?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법이 제정되기는 했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침략의 첨병에 선 가톨릭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진실로 따르는 많은 성직자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원주민을 보호했고 한편 그들의 문화를 기록으로 남겨 현재까지 알 수 있도록 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인디언의 역사> 등 여러 책을 저술하여 수많은 원주민들이 죽어간 실상을 자세히 밝혀 스페인의 잔인성을 폭로했다. 두 얼굴을 가진 가톨릭이다.

흑인노예의 영혼을 달래준 산테리아 의식

가톨릭은 그 양식에 있어 이곳의 전통 종교와 잘 섞여 뿌리를 내렸다.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원주민과 피가 섞인 메스티조와 뮬라토 그리고 흑인들은 가톨릭의 상징인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인종인 만큼 그들이 신봉하는 성모 마리아는 유대인의 모습이 아닌 자신들을 닮은 서로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강제로 끌려온 흑인의 경우도 원주민들과 다름없었다. 니콜라스 5세 교황은 흑인노예도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공표하였고, 스페인 왕실은 1513년 세비야 항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은 스페인의 흑인 노예를 쿠바로 수출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아프리카 각지에서는 노예사냥이 활성화 됐고, 강제로 끌려온 흑인들은 비록 가톨릭 세례를 받았을지언정 그들이 믿는 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나 노예주들은 절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흑인 노예들은 주인들을 피해 비밀리에 그들만의 의식을 거행했어야 했다. 끊임없이 탄압을 당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 오릿샤(Orisha)를 교묘하게 가톨릭 신앙으로 포장하여 성모나 성인들과 동일시했다. 가톨릭으로 포장된 그들의 의식인 산테리아(Santeria)를 거행하면서 흑인들은 힘든 생활에 찌들린 자신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들이 믿는 변형된 가톨릭인 산테리아는 1950년이 되어서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아 지금은 쿠바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종교가 되었다. 산테리아는 기톨릭 전통에 아프리카 기니 서남부 지역의 부족인 요루바의 민속문화를 성공적으로 융합하여 대중의 호응을 얻어 성장했다.

아바나의 레글라(Regla)에 있는 한 성당(Lglesia de Nuestra Senora de Regla)에 하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흑인 성모 마리아상(La Santisima Virgen de Regla)이 있다. 이 마리아 상은 쿠바 선원의 수호성인으로 예마야Yemaya로 부른다고 한다. 산테리아는 가톨릭과 달리 교회와 같은 공간이 없으며 사제들이 집에 제단을 차린다고 한다.

새치를 쫓아 쿠바에 온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는 쿠바에 있으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소설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을 1952년 출간했다. 이 소설로 그는 1953년에 퓰리처상 그리고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미국 작가로 1899년에 일리노이스 주 시카고 교외에서 출생했다. 그의 주 활동무대는 미국 플로리다 주의 키웨스트와 쿠바의 아바나였다. 이 두 곳은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헤밍웨이는 1928년 처음으로 쿠바에 가 아바나에 이틀만 머물렀고, 1932년 여름 참치의 일종인 새치 무리를 쫓아 키웨스트에서 다시 쿠바를 방문했다. 이 낚시 여행으로 그는 쿠바와 인연을 맺는다. 이 당시는 헤라르도 마차도(Gerardo Machado) 장군이 쿠바의 대통령이던 시절로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를 암살하기 위한 살인부대를 운영하여 학생 뿐 아니라 의심 가는 미국인도 탄압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1933년 8월 헤밍웨이는 가족과 함께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 아바나에 있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Ambos Mundos)의 511호에 3일간 머문다. 헤밍웨이는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아바나를 방문하는 동안 이 방을 이용했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은 산프란시스코 부두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고 구 시가지인 아바나 비헤야(La Habana Vieja) 중심부인 오비스포(Obispo)와 메르카데레스(Mercaderes)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다. 이 호텔은 1920년에 지어진 5층 건물로 최초로 유네스코의 원조를 받아 복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 호텔의 511호는 지금도 헤밍웨이가 사용하던 그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으며 당시 지불했던 가격 2달러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 511호의 헤밍웨이가 쓰던 침대
 암보스 문도스 호텔 511호의 헤밍웨이가 쓰던 침대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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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을 만나다

1933년 여름 헤밍웨이는 엘모로 성 바로 아래의 카사블랑카 선창에서 새치 전문가인 항해사 호에탄 카를로스 구티에레즈를 만나 그를 고용했다. 헤밍웨이는 후에 그를 친근하게  돈 카를로스라고 불렀다. 구티에레즈는 헤밍웨이에게 새치 잡는 법을 알려주었다. 헤밍웨이는 1933년부터 친구의 아내인 제인 메이슨과 5년 동안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1938년에 자기 배를 맡기려 구티에레즈를 데려가자 헤밍웨이는 그레고리오 후엔테스를 고용하였다. 이가 바로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델이다. 배경은 현재 쿠바군 기지로 사용되고 있는 어촌마을 꼬히마르(Cojimar)로 헤밍웨이가 거주했던 핀카 비히아(Finca La Vigia) 농장에서 15km 쯤 떨어져 있다. 이곳에 있는 라 테라자(La Terraza) 식당은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물고기의 잔해를 갖고 들어온 곳이다. 후엔테스는 2002년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헤밍웨이는 아내 폴린과 이혼하기 3년 전부터 이미 작가인 마르타 겔호른과 사귀고 있었다. 그녀가 1939년 4월 아바나에서 스페인 내전을 쓰고 있는 헤밍웨이와 합류하고, 11월 헤밍웨이는 마르타와 결혼하였다. 다음 해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집필한 소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출간했다. 이 책을 헤밍웨이는 마르타에게 바쳤고, 이 책의 인세로 아바나 교외에 있는 핀카 비히아 농장을 구입하여 이후 20년 동안 체류하였다. 그는 자신의 농장에 있는 망고를 따려고 돌을 던지는 농장 주변 아이들을 데리고 야구팀 지지 올스타스(Gigi All Atars)을 만들어 야구시합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헤밍웨이는 자신의 어선 필라 호를 정찰선으로 개조하여 미국을 위해 독일 잠수함의 활동 정보를 수집했다. 아바나의 독일 스파이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자신의 쿠바 인맥을 기반으로 민간방첩부대을 결성한다는 계획을 미 대사관에 설명하여 미국의 승인을 받고 작전 이름을 크룩 홱토리(Crook Factory)라고 지었다.

미국 대사관은 헤밍웨이의 개인 서명과 보증으로 값비싼 무전기를 공급하였고, 후엔테스와 함께 독일 잠수함에 대해 수소문하여 독일군들이 어부의 생선을 빼앗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식량이 필요한 독일 잠수함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힐 계획으로 열심히 했으나 농장에 돌아온 마사는 잠수함 정찰 활동을 하는 그를 이해 못했고 그러한 그와 갈등을 겪었다. 헤밍웨이는 독일 잠수함의 위치를 미 대사관을 거쳐 해군에 전달했으나 신뢰받지 못했다.

최초의 입양 쿠바인 헤밍웨이

아내인 마르타와 함께 유럽 전쟁 취재를 위해 헤밍웨이는 1944년 쿠바를 떠났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 타임-라이프 지 기자인 유부녀 메리 웰시를 만나 첫눈에 반해 청혼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기로 하고 쿠바 핀카 농장으로 와 1946년 3월 아바나에서 헤밍웨이와 결혼했다. 그녀는 헤밍웨이의 네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부인이 됐다. 나팔관 임신으로 죽을뻔한 메리를 헤밍웨이가 의사를 다그쳐 수술을 하게 해 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어 아이가 없는 유일한 아내가 되었다.

1954년 쿠바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는 TV 인터뷰를 통해 "저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입양 쿠바인이라서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으며, 부상으로 따라온 커다란 금메달을 산티아고 데 쿠바 성당에 안치된 쿠바 수호성인 비르헨 델 코브레(virgen del cobre)에 바쳤다. 이 메달은 현재 산티아고 코브레 성당의 성모상 아래 있다고 한다. 그는 쿠바에 살면서 쿠바 민중들을 잘 돌봤고 민중들 역시 헤밍웨이를 잘 따랐다.

헤밍웨이와 카스트로

1961년 7월 62세의 헤밍웨이는 미국 아이다호 주 케첨(Ketchum)에서 권총을 입에 문 채 자살했다. 같은 해 아내 메리는 핀카 비히아 농장의 모든 것을 쿠바 정부에 헌납했다. 1992년 11월 공식 기념식을 위해 헤밍웨이 집안사람과 헤밍웨이 학자 대표단이 쿠바로 갔을 때 피델 카스트로도 참석하여 즉흥 연설을 했다. 바티스타 정권의 잔인함을 체험한 헤밍웨이는 그를 몰아낸 카스트로를 지지했고, 1959년 헤밍웨이와 카스트로는 그의 낚시대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을 뿐이다. 우승 트로피를 수여하기로 한 피델이 자신도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하고 가장 커다란 청새치를 잡아 결국 헤밍웨이가 그에게 우승 트로피를 수여했다.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이 헤밍웨이에 대해 말했다.

"헤밍웨이가 한 많은 일에 대해 정말 감사를 표합니다. 먼저 이 위대한 작가는 우리나라를 선택해 살면서 몇몇 주요 작품을 써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그의 책을 읽는 크나큰 즐거움을 준 점에 대해서도 감사를 느낍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 중략 -
나는 헤밍웨이를 읽으면서 역사를 배웠습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역사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역사입니다. 나는 헤밍웨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태그:#가톨릳, #산테리아,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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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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