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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 어머니의 책가방 책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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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추수가 시작된다. 해마다 이맘때면 해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벼 거둬들이는 일뿐만 아니라 밭에서 수확해야 하는 밭작물도 많다. 가을은 그래서 풍성하다는 말들을 하는 것 같다. 늘 그래왔듯이 고향에서도 추수가 시작되었다.

며칠 전, 어머니는 아침 출근길에 전화를 걸어왔다. 기죽은 작은 목소리로 한숨을 쉬며 전화를 한 걸 보니 뭔 일이 있어도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속이 상해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힘들게 이틀 동안 고구마를 캐서 주말에 와서 가져가라고 언니한테 했더니 다들 바쁘다고 다음에, 다음에, 그리고 다른 사람 줘버리라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고생해서 그래도 먹을 것 챙겨줄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해서 너무 속상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상해 밭두렁에 앉자 있다는 것이다.

혹시나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나한테 전화를 한 어머니는 이런 저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출근길이라 많은 대화는 못 나누고 우선 휴일에 찾아뵙겠으니 고생해서 캔 고구마는 내가 다 가져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비록 비뚤하지만 정성을 가득 담은 글자가 인상적이다.
▲ 한글공부를 시작한 어머니! 비록 비뚤하지만 정성을 가득 담은 글자가 인상적이다.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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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쁜 한 주가 끝나고 찾아간 고향집, 어머니는 때마침 복지회관에서 마련한 경로잔치에 다녀온 길이었다. 마당 한가득 펼쳐놓고 따사로운 가을볕에 말리고 있는 벼이삭들을 보니 올해 농사의 풍년을 말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찰벼부터 먼저 베어내고 말리는 거라며 설명을 덧붙이고, 어머니는 하던 일 멈추고 나를 거실로 데려갔다. 한동안 듣지 못한 가족들의 얘기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유년, 어머니 앞에서 학교생활 조잘대던 내 모습이 떠오르고, 늘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의 귀를 간질이던 그 시절이 지금은 바뀌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왠지 씁쓸함마저 느끼게 했다.

혹 어머니가 그림에도 소질이 있나?
▲ 난생 처음 색칠공부하다. 혹 어머니가 그림에도 소질이 있나?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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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 하며, 밀린 얘기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거실 구석에 있던 검정색 가방 하나를 꺼내 놓으신다. 남편과 난 무엇인가 싶어 가방 속을 들여다보니 어머니는 거기서 책과 공책, 크레파스, 연필통, 정리해둔 파일 하나를 꺼내셨다.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는 한글공부, 일주일에 서너 번 마을 회관에서 한글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잠깐 배우다 만 한글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며 들뜬 표정의 어머니는 직접 쓴 공책을 펼쳐 보이며 자랑을 하셨다.

"이따 아이가, 글자 쓴 거 보고 선상님이 잘 썼다고 칭찬도 해줬다 아이가."
"아, 그랬나. 좋았겠네. 정말 잘 썼네."
"내가 이래뵈도 글자를 안 배워서 그렇지, 나도 하믄 잘 한데이."
"맞다. 엄마가 머리는 참 똑똑하다 아이가. 우리가 다 엄마 닮았는기라. 그건 인정할게."
"꽃 색칠도 하고 했는데, 재밌더라. 아, 그라고 엊그제는 석남사에 소풍도 댕기왔다 아이가."
"와, 좋았겠네. 가을소풍도 다 가고."
"그 짝에서 김밥하고 떡 하고 뭐 많이 다 준비해 왔더라."

시골 어르신들을 위한 한글교실을 지원하는 곳에서 아마 소풍까지 다녀오기로 한 모양인데 아무튼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와 생기 가득한 얼굴이 예전엔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어릴 적, 시험보고 와서 상기된 얼굴로 어머니한테 자랑하던 나의 모습이 불현듯 지나간다.

글을 배운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커다란 행복이자 소원이었음을 알기에 뒤늦게나마 시작하게 되어 다행인 마음과 다 끝내주지 못하고 결혼해버린 그때의 내가 미안해졌다. 비록 비뚤하지만 정성들여 쓴 흔적이 가득하고, 그 한자 한자를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난생 처음 크레파스를 들고 꽃에다 색칠을 한 그림 역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얼마나 설레고 얼마나 즐거웠을지 보지 않아도 그게 다 느껴졌다.

교과서를 통해 한글을 좀 더 빨리 배웠으면 좋으련만..
▲ 어머니의 교과서 교과서를 통해 한글을 좀 더 빨리 배웠으면 좋으련만..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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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한글공부 다 가르쳤지만 어머니는 진작 배우지 못했던 한글, 뒤늦게나마 연필에 침 묻혀 가며 눌러쓴 ㄱ ㄴ ㄷ ㄹ… 초등학생 같이 새로 쓴 글자 하나하나가 신기하기만 한 어머니의 한글공부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삶이 있다. 그리고 행복이 있다.

한참을 어머니의 공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나에게 그 순간 간절한 소원이 하나 생겼다. 요즘 사람들에게 너무나 보편화 돼 버린 핸드폰. 어머니가 얼른 한글을 배워 나와 이런 저런 문자를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살갑지 못한 딸의 애교를 부려보고 싶다. 지금 나와 딸아이가 늘 문자로 별의별 얘기들을 주고받는 것처럼 어머니와 나 역시 그동안 소통하지 못한 가슴에 묻어둔 애잔한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 그런 재미를 즐거움을 어머니와 한번 느껴보고 싶다.

책가방 속에 담긴 것이 공책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삶이 담겨있다.
▲ 책가방 속 소중한 것들! 책가방 속에 담긴 것이 공책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삶이 담겨있다.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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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면 꿈이 이루어지던가. 지금 나의 이 마음이 어머니의 책가방 속에 고스란히 담겨서 앞으로 한글 공부에 더 많은 힘을 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가방이 담긴 유모차를 밀고 어머니의 공부방으로 향하는 그 모습이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어머니, 열심히 공부하이소.


태그:#어머니, #책가방, #한글공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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