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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기사 수정 : 4일 오후 5시 55분]

"언니, 엄마가 하루에 한 번씩 꼬박 언니 걱정해. 그 집에서 나와야 한다고..."

지난 설 연휴 때 만난 사촌 동생이 하는 말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시는 외숙모는 외삼촌과 함께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신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 오신 외숙모는 반지하인 내 자취방을 보시고는 "나였으면 여성에겐 절대 보여주지 않을 집"이라며 화를 내고 속상해하며 돌아가셨다.

반지하에 살아본 건 처음이 아니다. 중학교 1학년 당시, 가족들과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 오면서 처음으로 살아본 반지하. 어렸을 때에는 서울로 이사 가면 뉴스에서 보던 보기만 해도 눈이 아플 정도로 높고 빽빽한 아파트에서 살 줄 알았는데... 길가 허름한 빌라의 반지하에 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서울에서 가장 집값이 싼 지역이었다.

난 혼자 살 수 있어 행복한데... 주위에서는 걱정만

내부가 사진과 같이 깔끔해서 선택한 내 첫 자취방
▲ 내가 살았던 방 내부가 사진과 같이 깔끔해서 선택한 내 첫 자취방
ⓒ 고시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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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혹은 흔하디흔한 가정사의 이유로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독립을 꿈꿨고, 중학교 3학년 당시 그저 혼자 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고 진학을 결정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전에 취업을 한 나는 회사 근처로 도망치듯 이사했다. 그렇게 이사한 곳은 햇볕이 잘 드는 고시원 5층. 흰 벽지, 흰 가구, 2.5평의 싱글 침대 2개 정도의 넓이의 방. 고시원 총무는 "고시원에서 제일 넓은 방"이라고 했다. 부모의 도움이 전혀 없었기에 보증금 없는 고시원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릴없이 좁은 싱글 침대에 누워, 발을 뻗으면 닿는 14인치 TV를 보면서 넋을 놓을 때는 여기가 정신병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그 좁은 고시원 방에서도 소음이 그리워 들어오자마자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켜놨다. 아침에는 공용샤워실을 늦지 않게 사용하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주말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나 같은 거주민들은 조금이라도 늦으면 주말 내내 열심히 돌아가는 공용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놓치면? 내 빨래는 그대로 묵힐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친구가 내 자취방에서 자고 싶다며 어머니께 허락을 받으려고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친구가 어머니께 내 이름을 대자마자 여과 없이 "걔 고시원에서 산다며, 너 거기서 자다가 불나면 어쩌려고 그래!"라고 하시며 언성을 높이셨다. 수화기 건너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내 처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당시 뉴스에서는 고시원의 저렴한 자재와 안전시설 미비로 잇달아 발생한 방화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20세 고절의 저소득층 서민이었다. 그 친구 어머니는 불과 며칠 전, 혼자 사는 내가 안됐다며 반찬을 잔뜩 싸주셨는데...

혼자 사는 여자,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나는 "혼자 산다"라고 했을 뿐인데, 술자리에 동석한 한 남성이 "혼자 사는 여자~ 유후~"라며 신나 했다.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나는 "혼자 산다"라고 했을 뿐인데, 술자리에 동석한 한 남성이 "혼자 사는 여자~ 유후~"라며 신나 했다.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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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솔직함'은 '독'이라는 것을. 첫 직장에서 내가 혼자 산다는 것은 공공연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급여가 미뤄질 때 나보다 더 내 월세 걱정을 해주는 상사는 고맙다기보다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으로만 느껴졌다.

게다가 퇴근할 때 즈음 별다른 이유 없이 일을 맡기는 과장도 있었다. 딸 둘이 있는 과장이었는데, 일을 맡기면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길 권했다. 몸이 좋지 않아 한의원 예약을 했는데, 예약시간이 지나자 한의원에서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연신 울렸지만, 그 과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집으로 데려다 주는 길, 그 과장은 이런 질문을 했다.

"너 자취방에 남자친구도 데려오고 그러니?"
"요즘 애들은 언제 처음 하니?"
"너도... 아, 아니다..."

고시원에서 사는 게 창피해 항상 근처에서 내려달라고 하던 나는 차에서 내린 후 집에 오는 길 내내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야한 옷 입은 적도 없는데, 남자친구 얘기를 한 적도 없는데, 내가 웃음이 많아서 헤프게 보이는 걸까?' 이런 일을 처음 겪고 털어놓을 대상이 없었던 나는 이 모든 것을 그 사람 잘못이 아닌, 내 행동과 환경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는 새로운 모임과 이성 친구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회사와 집 근처에서 운동을 하게 됐는데,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어울리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술자리도 같이 하게 됐다. 그때도 역시 "혼자 산다"고 했는데, 동석한 한 남성이 "혼자 사는 여자~ 유후~"라며 신나 했다.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이후 그 남성은 일찍 가려는 내게 "너 혼자 살잖아? 오빠가 데려다 줄게"라며 오전 2시까지 붙잡는 일이 다반사였다.

순진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나는 내 나름대로 영악하고 똑 부러진다고 생각했는데,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나 보다. 나는 자취 생활의 고달픈 경험을 이렇게 톡톡히 치렀다.

그 후로도 수차례 직장을 옮겼던 나, 자연스레 수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만났다. 하지만 나는 절대 '혼자 산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행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보호 아래 사는 여자인 척 행동했다.

'투 잡'으로 보증금 마련... 드디어 탈출한 고시원

전 세입자는 여름에 텐트치고 친구들을 불러 삼겹살도 구워먹었다고 한다.
▲ 시린 겨울날 옥탑방 옥상 전 세입자는 여름에 텐트치고 친구들을 불러 삼겹살도 구워먹었다고 한다.
ⓒ 전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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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집에만 있는 내게 주인할머니는 손수 해주신 따뜻한 떡국 한상을 차려주셨다.
 설날에 집에만 있는 내게 주인할머니는 손수 해주신 따뜻한 떡국 한상을 차려주셨다.
ⓒ 전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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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되지 않는 박봉에 고시원 월세 30만 원, 적금 50만 원을 지출해야 했다. 생활비 외에도 용돈이 부족했던 나는 주말을 이용해 고깃집,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결국 고시원에서 2년을 꽉 채워 1000만 원을 모아 이사를 결심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시세'라는 것을 알았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을 주고도 반지하밖에 못 산다니! 반지하 방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나는 '그럴 바에는 옥탑방에 살겠다'며 보증금 500만 원·월세 40만 원의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한국에서는 천대받는다는 옥탑방은 내게 '로맨스의 펜트하우스'였다. 어릴적부터 내가 원하는 '꿈의 방'으로 하나하나 꾸미며 사랑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혹독한 추위 앞에서는 '로맨스의 펜트하우스'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겨울이 되면 벽의 네 면이 차가웠고, 아무리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매일 밤 외투를 챙겨 입고 잠이 들어도, 가스비는 꼬박꼬박 16만 원이 찍혀 있었다. 결국 계약 기간 1년을 채 한 달 앞둔 채, 예쁜 내 원룸 사진에 온갖 찬사와 미사여구를 붙여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나는 세입자를 구해 급히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소득층 전세자금대출 덕분에 이제는 전세방 살아요

모든이들이 걱정했던 통로. 비오는 날 우산하나 제대로 펴기도 힘들다.
 모든이들이 걱정했던 통로. 비오는 날 우산하나 제대로 펴기도 힘들다.
ⓒ 전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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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일이지만, 박봉을 받고 일했기에 득을 보기도 했다. 나는 적절한 시기에 '저소득층 전세자금대출'이라는 제도를 알게 됐다.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해줬던 것은 나도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라고나 할까. 이자율 연 2%에 상환기간은 무려 15년이나 됐다. 이 말인 즉 '거저 돈 주고 15년 동안이나 갚으라'는 뜻이었다.

자격요건 및 구비서류를 준비하는 게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거래 은행에서의 대출심사. 업무 때문에 은행을 오가는 일이 많았기에 적잖이 눈도장을 찍은 직원임에도 대출심사 앞에서는 왜 이리 까칠하고 모질게 대하는지... 그는 "거참 어린 친구가 뭘 잘 모르나 본데..." "정직원 맞아요? 급여가 꽤나 적네요..." 등 나로 하여금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많이 했다. 모든 절차를 밟은 뒤에는 반강제로 신용카드도 하나 더 만들어야 했다. 그쪽 말대로 '박봉' 받고 사는 어린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원리금 상환으로 부담되던 월세도 줄이고, 전보다 더 넓고 깔끔한 내부 구조를 갖춘 방으로 이사 갔다. 무엇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내가 닿은 곳은 반지하였다. 눅눅한 곰팡이에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안 되는 환경, 게다가 지난 여름에는 난생처음 '곱등이'라는 괴생물체와 마주하기도 했다. 또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여성이 혼자 살기에는 조금 위험하다는 점 역시 나를 힘들게 했다.

물론 고시원-옥탑방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왔던 나였기에 다시 차근차근 예쁘게 꾸며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속상하게도 예전에 집에 놀러 와도 아무 말 하지 않던 내 친구들이 이젠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제 내 나이 20대. 나를 태워줄 호박마차가 없는 이상 그전에는 결혼 생각은 하지도 못할 듯하다. 만약 결혼을 한다고 해도 지금과 같이 좋지 못한 주거환경을 전전할지도 모른다.

예전에 혹시 떨어뜨려 놓은 유리구두라도 있었나 기억을 되감아 보지만, 아니다. 지금까지 나는 타들어 갈 정도로 외로웠고, 홀로 버려진 고아마냥 서럽게 울기도 했다. 그저 나밖에 없었기에 나만 보살피며 이기적으로 살아왔다. 난 이 힘든 시절을 함께 했던 내 집들에게 먼 훗날 '그때가 그리웠노라'라며 유쾌하게 회상하고 싶다. 그래도 나에겐 생각한 대로 행동할 수 있는 튼튼한 사지와 세계 어느 갑부도 사지 못할 '젊음의 여유'가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믿는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달팽이처럼 꾸준히 전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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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는 세입자다' 공모에 응모한 기사입니다.



태그:#고시원, #고시텔, #옥탑방, #반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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