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추석 다음날인 10월 1일,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봤다. 먹고 사는 일에 묶여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내가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얼마 전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김종성 씀, 지식의 숲 펴냄)를 통해 만난 광해군을 어떻게 그렸을까 궁금해서였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자신의 안위와 왕권강화에 급급한 광해군(1575~1641)이 평소와 달리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는 어느 해 보름 동안이다. 정말 그런 보름간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광해군이 그 기간동안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할 정도로 자신의 안위보다 백성들 먹고 사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

<광해> 포스터
 <광해> 포스터
ⓒ 리얼라이즈픽쳐스

관련사진보기


여하간 영화는 광해군이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는 그 기간동안 외모부터 음성까지 광해군과 정말 많이 닮은 광대 하선이 광해군 노릇을 하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신이 하층민인지라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가짜 광해군 즉 광대 하선은, 알 수 없는 물질에 정신을 잃은 광해군이 정신을 차리는 동안 이제까지의 광해군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런 보름간이 있었든 없었든 이런 설정을 통해 폭군과 성군의 모습과 그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 궁궐 생활을 전혀 몰랐던 하선이 민간인과 다른 왕의 생활에 적응하며 관객들도 평소 궁금해 했을 법한 왕의 일상을 알 수 있다는 점, 대선을 앞둔 이즈음 백성들이 원하는 왕(대통령)의 바람직한 모습과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나름 흥미로운 영화였다.

영화는 5년 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된다는 자막과 함께 끝난다. 영화 속에서 광해군이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했던 일이 5년 후에 결국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되고 만다. 광해군 뒤를 잇는 인조는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아들이다. 즉 조카에게 왕위를 뺏기고 만 셈이다.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되어 십 수 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죽었다고 한다. 실제로 말이다.

글쎄? 이 영화가 실제 역사와 얼마나 가까운지 모르겠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영화 속 광해군의 처지나 당시 조선의 상황이나 국제정세, 도승지 허균이 새로운 국가를 꿈꾸는 작품 <홍길동전> 저자라는 것 등, 조선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보면 영화에 대한 이해도 훨씬 빠르고, 그런 만큼 훨씬 재미있다는 점이다. 항간에는 조선의 역사를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이 보면 한심한 영화일지 모른다는 평도 보이지만 말이다. 

조선을 뒤흔든 광해군의 실각

광해군은 형식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표방했지만 사실상 명나라를 버리고 여진족을 지지했다. 이제껏 동맹을 해온 나라와 반대편에 있던 나라사이에서 중립을 취한다는 것은 사실 후자와 손을 잡겠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버리겠노라 명확히 표방할 수 없었던 것은 명나라와 계속해서 무역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복잡하게 얽힌 국내세력관계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여진족의 세력이 계속 확장되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본다면 명나라보다는 여진족을 택하는 게 더 이로웠다. 여진족이 중원을 점령하는 날에는 그들과 무역을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에서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 겉표지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 겉표지
ⓒ 지식의숲

관련사진보기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는 광해군 폐위 또는 인조반정처럼 당시는 물론 훗날까지, 당사자는 물론 주변사람들이나 주변국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야말로 조선을 뒤흔든 조선시대 중요한 역사 사건 30가지를 '만약'이라는 가정으로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측면을 들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오마이뉴스>를 비롯하여('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연재 중)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등 다양한 매체에 역사물을 연재하는 김종성 시민기자.

이 책에는 '광해군의 실각, 청나라의 중국 정복을 돕다', '선조의 콤플렉스, 조선왕조를 유지시키다', '임진왜란, 여진족의 중국 제패를 돕다' 등 광해군이 어떻게 왕이 되었고, 왜 그토록 독살의 위험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는지, 광해군 폐위 후 조선은 어떤 변화를 겪고 인조반정이 조선과 주변국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등을 알 수 있는 글이 여러 편 실려 있다.

광해군이 독살의 위험을 느끼며 매사 신경을 썼던 이유는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지배층 대부분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광해군이 이런 명나라보다 그들이 오랑캐라며 하찮게 여기며 멀리하는 여진족을 사실상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해군 재위(1608~1623년) 당시 금(후금)나라를 세우는 여진족은 훗날 조선왕실이 광해군과 소현세자를 죽이면서까지 그토록 지지해 마지않았던 명나라를 비롯하여 주변의 몽골과 위구르, 티베트 등을 정복하는 강대국이 되고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여기서 만약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만약에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다면 여진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여진족이 이처럼 번성할 수 있었을까?'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친명을 표방한다. 인조의 이런 선택은 결과적으로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7년)을 부르는 원인이 되고 만다. 인조 재위 4년과 14년에 각각 일어난 이 두 전쟁은 광해군이 사실상 지지한 여진족이 세운 후금(1616~1936)과 청나라(1636~1912)가 명나라와는 손잡고 자신들에게는 맞서는 인조정권에 대한 보복차원으로 일으킨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지 않았다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삼전도의 치욕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여진족이 중원을 점령하는데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국을 침공할 명분이 없으면 함부로 침공할 수 없는 바, 여진족으로선 자신을 지지하는 광해군이 권좌에 있는 한 조선을 침략할 명분을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광해군을 폐위시켰기 때문에 여진족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무릎까지 꿇는 일을 자초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야말로 조선이 광해군을 버린 덕분에 여진족은 훗날 몽골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 가장 큰 영토를 갖게 되고, 이민족이 세운 나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광해군 폐위가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고 할까.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 중요한 사건

0~3시 방향이 패권 대결의 한 축이 됨에 따라 한반도의 전략적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한반도를 사전에 제압하지 않고서는 0~3시 방향의 국가가 중원으로 마음껏 진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반도를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중원으로 밀고 내려갈 경우, 배후에서 혹은 옆에서 한반도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요나라와 금나라가 끝내 중국 정복에 실패한 것은 이들이 사전에 한반도를 굴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고, 반대로 원나라와 청나라가 중국 정복에 성공한 것은 사전에 한반도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10세기 이후의 구도는 광해군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이 정권을 유지하고 여진족과 화평관계를 유지했다면, 그래서 여진족이 조선을 침공할 명분이 없었다면, 여진족의 중원진출도 그만큼 더뎌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진족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제거된 것이 당장에는 불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리했다. 이들로서는 인조 정권 같은 친명집단이 출현해서 한반도를 좀 더 일찍 굴복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에서

동북공정 및 동아시아 역사연구 전문가인 저자는 이처럼 광해군과 인조 재위 당시 동아시아 패권다툼 구도와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 등을 조목조목 설명해줌으로써 광해군 폐위 혹은 인조반정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한편 폭넓은 역사지식도 얻게 하고, 다양한 측면으로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진짜 광해군(오른쪽)과 가짜 광해군(왼쪽)의 만남
 진짜 광해군(오른쪽)과 가짜 광해군(왼쪽)의 만남
ⓒ 리얼라이즈픽쳐스

관련사진보기


솔직히 이 책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를 읽지 않았다면 이처럼 입체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으리라. 그리하여 광해군과 광해군을 막상 세자에서 끌어내리고 싶어했던 선조와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와 소현세자 주변에서만 서성거리며 지극히 단편적인 것들만 봤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광해군처럼 자신의 의지와 달리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권력을 잃은 경우 승자의 입장을 부각시켜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특히 더 커진다. 때문에 기록된 역사를 온전한 진실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다양한 가능성으로 살펴봐야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봤다는 사람들에게 광해군에 대해 묻자 아쉽게도 모두 '폭군'이라고 말했다. 사실 영화에서 중전이 가짜 광해군에게 옛날의 광해군을 회고함으로써 예전에는 따뜻하고 현명한 지아비요 군주였음을 알려주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의 치적은 거의 묻힌 채 광해군이 폭군의 대명사처럼 알려졌던지라 영화를 본 사람들 대부분 그런 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그들에게 이 책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를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다양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진짜 광해군과 진짜 왕을, 나아가 우리가 원하는 나라와 우리가 원하는 왕(대통령)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할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ㅣ김종성 씀 ㅣ지식의 숲 펴냄ㅣ2012.8 ㅣ15000원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 - 단 하나의 사건이 역사를 바꿨다

김종성 지음, 지식의숲(넥서스)(2012)


태그:#광해군, #2012 대선, #광해, 왕이 된 남자, #추창민, #이병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