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백종원 옹이 다녀갔다고 소개한 금강산 삼일포
 백종원 옹이 다녀갔다고 소개한 금강산 삼일포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조국 남녘땅을 찾아갈 수 없는 나는, 이번에 쓴 책이 삼천리출판사에서 출판되어 작은 글이나마 남녘땅에 가닿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 <조선 사람> 5쪽, 우리말판 머리말 중

'여러 가지'로 뭉뚱그려 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90이라는 연세에 조국 남녘땅을 찾지 못하고, 글이나마 남녘땅에 가닿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는 저자 백종원옹의 인생이 퍽이나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삼천리에서 출판한 <조선 사람>의 저자 백종원옹은 192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백종원옹의 고향마을은 일가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동고동락하며 사는 집성촌,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고향마을 모습입니다.

하지만 식민지 국가에 태어난 백종원의 삶은 순탄치 않습니다. 식민지 국민에게 부과되는 견딜 수 없는 억압, 참을 수 없는 핍박을 견디지 못해 고국 땅, 고향마을을 등지는 부모님들을 따라 어린 백종원은 만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고단하고 서러운 '식민지 국민의 삶'

<조선 사람> 표지
 <조선 사람> 표지
ⓒ 삼천리

관련사진보기

고국을 떠났다고 해서 나라 잃은 설움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랑의 땅 만주에서의 생활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만주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백종원옹은 1942년 3월 하순, 친척들이 모아 준 귀한 거금 30엔을 받아 일본으로 향합니다.

<조선 사람>은 식민지 국민으로 태어난 백종원옹이 고향을 떠나 이국 만주에서 유랑민으로 살고, 일본에 들어가 유학생활을 하고, 광복을 맞아 재일조선인 1세대로 살며 헤쳐야 했던 풍파 같은 삶, 풍파 같은 삶을 살면서 헤쳐야 했던 역사들을 모노드라마처럼 엮고 있습니다.

그날 전차는 탈 수 있었지만 찾아간 백화점에서 우리를 '더럽다'며 쫓아냈다. 짚신을 신은 데다가 바지저고리를 입고 시골에서 온 아버지와 아들이 아무리 봐도 깨끗할 리는 없겠지만, 나는 그런 일을 겪으며 크게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 <조선 사람> 72쪽

내가 친척들한테서 귀한 거금 30엔을 받아 일본으로 향한 것은 1942년 3월 하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우리 세대에게 압록강이나 두만강, 현해탄이라는 장소는 그냥 지도상의 지명이 아니다. 그것은 만주, 시베리아, 일본으로 유랑의 길에 오른 사람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고향 산천을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되돌아보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나도 현해탄을 건널 때에는 무척 감상적인 상태에 젖어들었다. - <조선 사람> 170쪽

유랑민의 삶 역시 멸시 당하고 괄시 당하는 삶이었지만 고국의 광복을 향한 꿈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배워야만 집안을 일구고, 집안을 일궈야만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친척들의 생각은 유학자금으로 모아집니다.

제4고등학교 학우들과 함께(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지은이 백종원 옹) - <조선 사람> 173쪽
 제4고등학교 학우들과 함께(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지은이 백종원 옹) - <조선 사람> 173쪽
ⓒ 삼천리

관련사진보기


백종원옹이 <조선 사람>을 통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한일합방이 이어지는 과정에서부터 2012년까지로 이어집니다. 임진왜란의 주범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야기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로 전하고 그 후의 이야기들은 당신이 겪었거나 경험한 사건과 역사로 설명합니다.

빼앗긴 조국에서 겪어야 했던 설움, 타국에서의 고단함과 차별, 무참히 짓밟힌 종군위안부, 피고름까지 착취당하던 강제징용, 올가미처럼 민족의 정체성을 조여오던 창씨개명에 대한 이야기들이 재일조선인 1세대가 겪은 삶으로 그려집니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 할머니는 늘 잠자리에서 옛이야기를 해주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많은 우리 백성을 죽인 흉악한 인간이고 그 부하인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평양 기생 월향의 도움을 얻은 의병대장 김응서의 칼에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 <조선 사람> 115쪽

음침한 감방의 기나긴 밤, 나는 여기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죽어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젊은 내가 왜 이딴 곳에서 죽어야 하는가 하고 반발도 했다. 삶에 대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감자를 마흔 번쯤 잘게 씹어서 삼키곤 했다. 그렇게 하면 양분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고 위장에서 흡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한 헌병의 눈을 피해 될 수 있으면 팔과 목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 <조선 사람> 198쪽

색안경 쓰고 배운 '사시 역사' 교정해주는 책

어쩌면 재일 조선인들도 투옥된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 나고야 성에 있는 감옥
 어쩌면 재일 조선인들도 투옥된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 나고야 성에 있는 감옥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조선 사람>은 반공과 승공이라는 이념이데올로기가 채색된 색안경이 씌워진 채 역사를 공부해 외눈박이 역사관을 가진 적지 않은 사람들의 시력을 교정해 줄 것입니다.

항일 운동을 한 독립투사 중에는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없다거나, 김일성이라는 인물 자체가 조작된 인물이라는 식으로 배운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는데, 김일성의 실체, 독립운동을 한 김일성의 활약상을 접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조총련이 어떻게 결성되고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는지 또한 알게 되면 가려졌던 역사, 사시를 강요당했던 해방 전후의 역사를 조금은 실체적으로 보게 되리라 기대됩니다.

억압과 핍박, 수탈과 고초를 겪는 재일조선인들에게 북조선(북한)에서는 1957년부터 오늘날까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해마다 한 차례도 빠짐없이 158차례에 걸쳐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469억2505만 엔이라는 거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끊이지 않는 지원과 관심은 춥고 배고프고 미래조차 암담한 재일조선인들에게는 한기를 막아주는 솜이불이 되고 곡기가 되고 기댈 수 있는 촛불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나고야 성에 걸려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
 나고야 성에 걸려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아무 것도 모르는 아가도 배고플 때 젖 주고, 추위에 떨 때 안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따릅니다. 그게 인지상정입니다. 조총련의 역사에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조총련은 친북단체가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백종원옹은 금강산에도 다녀가고, 헤어졌던 가족들도 평양에서 만났지만 한국에는 현재까지도 들어와서는 안 되는 사람, 들어올 수 없는 금지된 사람으로 분류되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20세기를 겪은 재일조선인 1세의 절규

우리 재일조선인 1세의 간절한 소망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벌어진 비참한 경험과 굴욕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분단된 조국을 이대로 후세에 물려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대가 통일된 민족의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세계에서 활약하는 날이 오기를 바랄 따름이다. - <조선 사람> 265쪽

어깨를 걸고 질풍노도의 시대를 함께 싸워 온 많은 친구들은 조국통일의 여명이 밝아 오는 전환의 시대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나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다. 내 생애에 허용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늘 몸과 마음을 꼿꼿이 세우고 똑바로 앞날을 내다보며 조국통일의 영광스런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가리라 마음을 다지고 있다. - <조선 사람> 267쪽

재일조선인 1세대의 삶은 어쩜 이 나무 신발처럼 짓밟히고 핍박받는 삶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재일조선인 1세대의 삶은 어쩜 이 나무 신발처럼 짓밟히고 핍박받는 삶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조선 사람>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백종원옹의 글은 20세기를 겪은 재일조선인 1세의 절규입니다. 조국통일의 여명이 밝아 오는 전환의 시대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떠올리는 글은 살 날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 남긴 유서만큼이나 간절하고도 진지합니다. 

백종원옹은 <조선사람>을 통해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의 새로운 총리가 된 아베는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사고방식이나 수법이 기시와 많이 닮았다는 걸 고발하고 있습니다.

백종원옹이 조국 남녘땅을 찾아갈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에는 일본의 강점, 해방 이후 분단된 국가, 분단 이후의 이념적 대립, 조총련에서의 활약과 정체성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손 치더라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격랑의 20세기를 겪은 재일조선인 1세대, 살 날이 그렇지 많이 남아있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 명의 옹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옹졸하고 쩨쩨한 국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조선 사람>┃지은이 백종원┃ 펴낸곳 삼천리┃2012.09.14┃값 14,000원



조선 사람 - 재일조선인 1세가 겪은 20세기

백종원 지음, 삼천리(2012)


태그:#조선 사람, #백종원, #삼천리, #재일조선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