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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네건 그곳만의 이야기가 있다. 한국 역사의 아픔이 그대로 남아있는 대구 이천동, 그곳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 기자말

대구 수도산의 건들바위와 샘물
 대구 수도산의 건들바위와 샘물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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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한한 동네라고들 했다. 조선, 근대, 현대의 역사가 짬뽕처럼 뒤섞인 곳인데, '물'과도 연관 있다고 했다. 그래선지 동네 이름 이천동(梨泉洞)이나 그곳 상징인 수도산(水道山)에도 물을 지시하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대구 이천(梨泉)동. '배나무샘골' 이란 뜻답게 이곳엔 예전부터 배나무가 많았다 한다. 특히 수도산 밑에 많았는데 그 주위로는 맑은 샘이 솟았다 한다. 사철 대구천(大口川)에 물을 공급하던 이 샘에는 봄이면 짙푸른 미나리가 만발해 그윽한 서정을 자아냈고, 임신을 기원하는 여자들은 이곳 물가에서 바위를 쓰다듬었다. 삿갓 쓴 노인 형상의 이 바위는 '손대면 건들거린다'고 건들바위라 불렸다.

아무리 그래도 노인 형상은 아닌데 하며 수도산 꼭대기로 올라가 본다. 야트막한 언덕 같은 이 산 안에 대구시 상수도사업본부가 있는데,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아름다운 배수지가 그 안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공터 벤치에 나앉은 노인들은 '저게 말이야....'하며 은근한 자랑이 끝이 없다. 낮은 철책 너머 인부들은 '이런 걸 찍어서 뭐 할라꼬예?' 하며 배수지에다 담뱃재를 털어댈 뿐이고.

대봉2호기
 대봉2호기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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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의 아름다운 대봉 2호기. 오랫동안 연모하던 이를 만나면 이런 기분이 들까?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안고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1925년에 지어진 건물이라는데 사방 어디서도 강렬하고 눈에 띄는 미모다. 내심 흡족함으로 셔터를 눌러대다 순간 흠칫 놀라고 만다. 그 곁에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日夕新'이란 머리띠를 동여맨 남자는 '낮이나 밤이나 새롭고 맑은 물을 공급한다'며 자신의 성실성을 자랑하는 중이다. '대봉1호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것은 1918년에 지어진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물이란다. 풍채 좋고 사내다운 기품이 풀풀 넘치지만 어째, 아까운 재능을 가진 자가 현실에 치여 그 재능을 잃어가는 모습이랄까. 지난날 장엄했던 모습은 오늘날 아파트숲에 가리어져, 이렇듯 아는 이들의 입에만 오르내리는 중이다.

곁에는 베레모 쓴 아이까지 딸려 있는데,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염소투입실이란다. 일제시대에 대구의 한국인 부자와 일본인에 한정 공급된 수돗물은 수도산의 한 기슭에서 그렇게 유입되고 배출됐단 역사를 남기며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름다운 풍광과 애틋한 정서는 덤으로 간직한 채 그렇게.

이제 근대를 지나서 조선의 미를 보러간다. 이름하여 서봉사. 수도본부 곁에 붙은 비구니의 절이다. 조선 후기에 한 기생이 양반의 재취로 들어간 후, 남편에게 상속받은 재산으로 지은 절이라 했다. 모든 과거를 잊고 청신녀로 살고 팠던 한 여자의 갈망이 담겨서일까? 현재는 비구니들만 기거한단 사실도 절의 역사와 더불어 아련한 정서를 만들어낸다. 툇마루에 앉자 법당 문이 열리며 중년의 비구니가 나앉는다. 깊은 눈매로 먼 산을 보는 그녀에게 바람이 불어온다. 향불 냄새가 스친다.

이천동 고미술품거리
 이천동 고미술품거리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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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사의 호젓한 돌계단을 내려서니 이천동 고미술품거리가 반긴다. 1960~70년대 분위기를 간직한 곳. 인테리어 소품을 찾는 카페 주인이나 옛 물건을 좋아하는 할아버지들이 자주 들르는 거리다. 원래는 일본인과 미군들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판매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점포세가 싸니까 버티지' 하며 툴툴대는 가게 주인의 뒤로는 온갖 포스터가 붙어있다. '시민과 더불어 고미술품 판매 행사', '일요 골동품 장터'.

절구 공이, 등잔, 물확 같은 걸 구경하며 걷노라니 그 자체로 골동품인 양 낡은 반점 하나가 다가선다. 고작 짬뽕 한 그릇 먹으려고 아침 아홉 시 부터 줄을 죽 늘어서게 하는 이상한 가게. 대구식 육개장 짬뽕이 유명하다는 바로 그 집이다. '재료가 떨어져 오늘 영업 종료'라 써 붙인 종이 위론 이미 셔터가 내려져 있다. 온갖 문화가 뒤섞여 '짬뽕 같은 곳'이라 불리는 이천동은 실제로도 이렇듯 맛있는 짬뽕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쉬움에 가게 앞을 돌아서니 캠프 헨리의 높은 담장이 다가온다. 이천동의 또 다른 상징인 이곳은 한국 근현대의 아픔이 녹아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논밭이던 이 터에 일본군80연대가 자리를 잡았고, 대구중학교 교정으로 바뀐 후론 한국전쟁과 함께 미군이 들어왔다. 며칠만 쓰고 돌려주겠단 약속은 60년이 흐르도록 지켜지지 않은 채 캠프 헨리(Camp Henry, 미8군19지원단)란 이름은 세월과 함께 굳어갔다.

그랬다. 한때는 젊은 미군들의 월급이 이 언저리 가게들과 여자들을 먹여 살렸다. '한국남자는 출입금지'란 팻말을 단 클럽에선 미군과 한국여자들이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었고, 주말마다 그곳에 들르던 '날라리'는 반 애들을 모아놓고 경계 너머의 무용담을 자랑했더랬다.

이윽고 세월은 흘러 이 거리에도 변화가 왔다. 미군들의 군복 다림질로 쏠쏠하게 돈을 벌던 세탁소엔 '세 내줌' 이란 종이가 나붙었고, 낡은 건물 꼭대기 환전소엔 해외여행객들이나 찾아들 뿐이다. '러시아 무희 출연'이라 써진 클럽 간판은 비바람에 삭아만 가고, 푸른 눈의 무녀들은 한국여자들이 떠나간 이 거리를 대신 메우고 있다. 한편으론 시대의 변화를 따라간다 할지, 정문 앞 작은 레스토랑엔 '샘'이나 '톰'이 먹는 미국 조식을 맛보려는 맛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렇다. 역사의 영욕 속에서 온갖 난동질을 당하고 때론 섣부른 영화를 누리면서, 이천동은 조금씩 변해왔다. 그런데도 변함없는 일편단심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무능함을 구박당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세월은 흘러만 가는데 과거의 헌신적 사랑으로 그 자리에 붙박이 된 자라 할까? 답답하고 한심해 보이지만 섣불리 핀잔을 할 수도 없는 진정성과 간절함이 이곳에 있기에 오늘도 찾아드는 자들은 존재한다.

그런 것이다. 누구나 성공을 꿈꾸고 갈망한다. 그 확실한 팻말을 쥐고자 안간힘을 쓰며, 때로 온갖 편법도 감행한다. 그런 가운데, 기준에서 떨어져 온갖 상처를 안고 '그 다음'을 기약하는 자의 열망을 망각한 채, 그 소중함을 바보스러움이라고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런 부당함 속에 말문을 닫아버린 동네가 이천동이다. 왜 당하고만 사냐고 묻고 싶은 곳. 모든 것을 품어주기만 하고 남을 해치지는 못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눈물 나게 하는 곳. 바로 그런 곳이 이천동이다.

대봉배수지, 서봉사, 고미술거리, 캠프헨리. 지나간 역사의 한켠에서 길을 잃어버린 곳. 변화와 발전만을 향하는 도심에서 한 걸음 물러섰기에 그 존재 가치가 더 빛나는 곳. 안타까운 지난날과 오늘의 열망을 이야기하는 대구 이천동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태그:#이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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