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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한시라도 더 빨리 사촌 동생네 집에 닿기 위해 서둘러 준비하고 아침 식사를 마쳤다. 문호영 안내원을 불러 사촌 동생네가 사는 신해리로 당장 가자고 재촉했다. 문 안내원은 알았다며 누군가를 전화로 부른다.

"김철 동지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구리스 선생 식구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해리에 간다는 말을 듣고 가는 길에 함께 가자고 해서요. 이곳 사람들은 모두 신 녀사님 사촌 동생 가족분들을 좋아합니다.

저도 관광 안내 일정 중 신해리 가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경치도 좋고 또 손님들이 체험학습 '로동'을 하는 동안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구리스 선생 부인께서 만들어 주시는 서양 료리를 맛보는 것도 정말 좋고요.

언젠가는 감자로 '포테토샐라드샌드위치'라는 것을 만들어주셨는데, 감자로 그렇게 맛있는 양념빵을 만들 수 있다니 깜짝 놀랬드랬습니다. '아, 정말 감자로 별걸 다 만들 수 있구나' 했습니다. 근데 오늘은 서양 료리 안 하실 겁니다. 서양 손님들 올 때만 하시는데 선생님들은 조선 사람들이니 조선식으로 상을 차리실 겁니다."

손님들이 '로동'을 하는 동안 쉴 수도 있다며 자기도 빨리 신해리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일행 다섯 명은 소풍 가는 심정으로 신해리를 향해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은 가까이 동해를 내려다보면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운치 있게 펼쳐진다.

"신선놀음"이란 말에 북한주민 "얼마나 고생한지 아십니까"

사촌 동생 은영이네 가족이 살고 있는 신해리
 사촌 동생 은영이네 가족이 살고 있는 신해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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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네요.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라 동생이 오래도록 여기서 살고 있나 봐요. 조카들도 미국에 오면 빨리 신해리 집으로 가자고 하고..."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나도 이런 곳이라면 살아보고 싶네. 매일 낚시하고 신선한 생선도 먹고... 뒷산에다 야채도 심고 산행도 즐기고... 신선놀음이 따로 없겠구만!"

김철이라는 분이 우리의 대화가 철딱서니가 없어 보였는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한소리 한다.

"선생님, 이 산동네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촌 동생분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셔 가면서리 이렇게 해 놓은 건지 아시기나 합니까? 지금은 최근에 집도 멋있게 잘 지어 놓으시고 '체험학습 로동관광' 손님들을 위해 큰 강당 건물도 지으시고, 공장도 세우시고 했지만 그전에는 오랫동안 움집 같은 데서 사셨습니다.

또 도로가 다 뭡니까. 한 번 시내로 나오려면 몇 시간에 걸쳐 험한 산길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나마 눈 오는 추운 겨울에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말입니다. 전기가 들어오길 합니까, 물이 나오길 합니까. 도로를 내고, 버스들도 이곳으로 다니게 하고, 풍력발전소도 어렵사리 가동시켜서 전기도 들어오게 하고... 물론 전기사정은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김철 선생은 계속해서 동생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나한테 전한다.

"또 식수며, 비닐하우스 야채재배며, 염소농장이며... 그것뿐인가요? 필수품 생산 공장도 운영하시면서 이곳 주민들을 잘살게 해 주시고... 참, 얼마 전에는 해삼 전복 양식장 공사까지 시작하셨습니다. 지금은 서로 들어와서 살려고 하는 마을이 됐단 말입니다."

김철 선생의 말 속에서 이 마을이 이렇게 살기 좋고 윤택한 마을이 되기까지는 뼈를 깎는 듯한 인고의 세월이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다시 만난 사촌 동생 부부

최근에 지었다는 신해리 사촌 동생 은영이네 집
 최근에 지었다는 신해리 사촌 동생 은영이네 집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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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집이 보인다. 반가움과 동시에 안쓰러움이 교차해 눈물이 왈칵 솟구친다. 우리가 닿을 때를 학수고대했는지 세 명의 사랑스러운 조카들이 집으로 들어서는 산길 입구까지 나와 있다. 자동차를 보더니 두 손을 흔들면서 팔짝팔짝 뛴다. 내 마음도 조카들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간다.

우리의 도착을 알았는지 사촌 동생네 부부도 뛰어나온다. 보기 좋고 아름다운 가족 상봉. 자동차에서 내린 우리 부부는 집으로 들어갈 새도 없이 한참을 자동차 앞에 서서 그간 쌓아뒀던 그리움을 풀어놓는다.

왼쪽부터, 신해리에 함께 사는 미국인 수의사 선생님, 조카 예솔 그리고 지성. 금세 뒷산에 가서 캐온 더덕을 다듬고 있다.
 왼쪽부터, 신해리에 함께 사는 미국인 수의사 선생님, 조카 예솔 그리고 지성. 금세 뒷산에 가서 캐온 더덕을 다듬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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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들어가니 음식 향기가 코를 찌른다. 동생이 우리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나와 동생은 점심 준비를 마저 하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선량하게 생긴 한 미국인 아저씨가 집에 들어온다. 동생이 자기들과 함께 이곳 신해리에서 살고 있는 수의사라고 소개해준다. 이 수의사도 이곳에서 산 지 10여 년이 넘었단다. 자기네들과 신해리 정착 초창기부터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봉사하며 살고 있단다. 평온하고 선한 얼굴 인상에서 이분이 걸어온 삶의 여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수의사 선생님이 조카들을 부르러 왔단다. 귀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더덕과 산나물을 캐오겠다고. 그는 "더덕, 산나물 맛이 일품"이라며 "꼭 먹어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조카들도 "더덕과 나물을 캐와서 이모한테 꼭 맛을 보여줄 거예요"라며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아이들마냥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신바람 나게 집을 나선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과 수의사 선생님이 신이 나서 들어온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뒷산 초입에서 크고 신선한 더덕과 나물들을 다 캐왔다고. 오자마자 숨도 안 돌리고 더덕을 다듬기 시작한다. 더덕 향기가 사방에 진동한다. 아무런 양념 없이 고추장에 찍어만 먹어도 그 맛이 어떨지 짐작이 된다. 군침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커다란 문어 잡아온 북한 주민, 돈 건네자...

신해리 주민이 잡아온 문어 요리
 신해리 주민이 잡아온 문어 요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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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 마을 사람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커다란 문어를 들고 온다. 아이들이 반기며 안기는 것을 보니 친하게 지내는 이웃임이 틀림없다. 동생이 말을 건넨다.

"어머나, 지금 잡으신 문어인가 봐요. 와 크다. 그런데 왜 이걸 들고 오세요?"
"구리스 선생님 댁에 친척분이 오셨다는데... 이 문어, 반은 데쳐서 드시고 반은 회 쳐서 드십시오."
"이 귀한걸... 내다 파셔야 할 텐데..."

사촌 동생은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에 문어 값에 해당하는 돈을 들고 나온다. 아저씨에게 돈을 전하려 하자...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제가 구리스 선생님 댁에 문어를 드리고 돈을 받으라고요? 이러지 마시라요. 섭섭합니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신해리에서 누가 구리스 선생님한테 돈을 받습니까, 큰일 나려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훈훈한 모습. 덕분에 우리 일행은 신선하고 맛있는 북한산 동해 문어를 맛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조카들과 수의사 선생님이 캐온 산더덕과 나물들, 사촌 동생의 특기인 중국식 만두와 이 동네 사람들이 직접 재배한 유기농 야채들,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은 김치까지... 북한 식당에서 먹은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북한 주민이 바다에서 직접 잡은 문어를 손님 대접으로 얻어먹었으니 내 생에 최고의 식사라고 할 만하다. 식사하는 내내 문어를 잡아온 그 아저씨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고마워요. 아저씨!'

북한에 전복·해삼 양식장을 짓겠답니다

문호영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소쟁기를 끄는 필자
 문호영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소쟁기를 끄는 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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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염소와 함께
 아기 염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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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에 우리는 사촌 동생네 집 주위를 구경하러 나간다. 크리스의 안내로 염소 농장과 비닐하우스를 둘러봤다. 그리고 산을 개간해서 밭을 일구고 있는 주민 아저씨 덕분에 '소쟁기'도 끌어봤다. 보기에는 쉬워 보여 큰소리치고 덤볐다가 아저씨가 일궈놓은 밭만 망쳐놓고 말았다.

염소 농장에 닿은 우리.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끼 염소를 안아봤다. 이 염소가 자라 북한 아이들에게 젖을 먹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이 새끼 염소가 동물이 아니라 천사처럼 느껴진다.

신축 중인 전복 해삼 양식장
 신축 중인 전복 해삼 양식장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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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이 지금 공사 중인 '해삼·전복 양식장'을 구경시켜 준단다. 양식장은 산 밑에 있는데 바닷가에 접해 있었다. 덕분에 바닷가 옆에 있는 어촌 마을을 둘러볼 수 있었다. 마을에 있는 집들의 겉모습은 초라하고 누추해 보여 내 마음이 안쓰러워진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엿보이기도. 사촌 동생은 "풍부한 수산물 덕분에 이곳 어촌 사람들은 바다에 고마워하면서 자족하는 마음으로 걱정 없이 살고 있다"고 귀띔해준다. 밝게 웃으면서 사촌 동생을 반기는 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서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 마음 역시 풍요로워진다.

이곳 신해리 사촌 동생네 집에 오니 흘러가던 시간조차 멈춰버린 것처럼 여유롭고 평온하다. 사촌 동생네 가족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얼굴도 햇살처럼 따스하다. 서로가 한마음이 돼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는 모습은 불협화음 하나 없는 심포니 연주를 듣고 있는 듯 아름답다.

"미국에서 잘나갔다던데... 왜 여기서 고생합니까"

크리스(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이)가 우리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크리스(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이)가 우리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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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네 집 거실에 앉아서 여유롭게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사촌 동생네 부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김철 선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남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 사촌 동생분은 미국에서도 좋은 교육을 받고, 유능한 컴퓨터 공학자로 대접도 잘 받고 직장도 훌륭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곳에 오셔서 어려운 고생길을 마다치 않고 계시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궁금해서리..."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김 선생님도 저분이 기독교인인 것 아시지요?"
"네, 잘 압니다만, 그것이 어떻게 련계가 되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참 설명이 힘든 이야기인데... 기독교인들은 하늘에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니 우리 인간들은 그 신의 자식인 겁니다. 우리가 그 신의 자식이니 그 신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니 신의 자식인 우리도 그 뜻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믿고, 행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거지요. 또한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잘 모르긴 하지만 대충 그런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나도 집사람이 교회에 나가니까 가끔 골프 약속 없을 때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정도라서... 충분히 설명을 잘 못하겠네요."

"그리스도 교인들은 다 그렇게 삽니까?"
"천만의 말씀. 다른 사람 말 꺼낼 것도 없이 우선 우리 집사람 하는 것만 봐도..."

잘 나가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막말인가. 굳이 이런 식으로 질책하지 않아도 내가 살아온 오십 평생을 송두리째 내려놓고 반성하고 있던 참인데... 남편은 인정사정없이 내 상한 심정을 한층 더 도리질한다. 아마 골프나 치고 보트 타고 나가 낚시질이나 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반성해 보며 자기 몫까지 내게 빗대 꾸짖고 있는 것이겠지.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집이 떠나갈 듯이 웃으며,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들을 풀다 보니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됐다. 따뜻한 마음을 안고 우리는 이별을 고했다. "우리, 내년 8월에 또 올게." 섭섭한 마음을 위로해가며 자동차에 올랐다. "이모, 가지 말고 우리랑 오래 오래 함께 있다가 가면 안 되요?"라고 조르며 사정하던 막내 조카 예솔이는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만다. 나 역시 마찬가지... 자동차가 산비탈을 돌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촌 동생네 가족들은 손을 흔든다.

우리는 이산가족도 아니며, 또 언제든지 이곳에 올 수 있다. 그러나 마치 남북정상회담을 하듯, 가물에 콩 나듯, 그것도 한 번 만나면 끝이 돼버리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그나마 상봉이라도 하신 분들은 다행이지만, 대다수의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생사조차 모른 채 세상을 떠나고 있는 현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오지'라는 말에 깜짝 놀란 남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발견된 웅기읍 굴포리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발견된 웅기읍 굴포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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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진-선봉에서의 4박 5일도 어느새 마무리되고 있다. 우리는 어느새 북-중 국경의 북한 측 출입국 사무소가 있는 원정리로 돌아가고 있다. 원정리로 가는 길에,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서 관광 일정에 넣지 않는 곳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을 들를 예정이란다. 이순신 장군께서 여진족을 물리치셨다는 곳인데 그곳이 우리나라의 맨 끝이라는 설명이다. 북한의 마지막 기차역인 두만강역도 그곳에 있단다. 또 그곳에 가면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가는 모습,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아,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의 맨 끝으로 가는구나. 생각지도 않았던 일정이다. 북한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 가슴은 쿵쿵거린다.

올 때와는 다른 길을 탔다. 올 때는 원정리에서 라진으로 직접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두만강 하구로 먼저 가 국토의 맨 끝을 본 뒤, 두만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원정리로 간다고. 라진을 출발해 선봉을 지나는데 문호영 안내원이 이곳의 옛 이름이 웅기였다고 설명한다. 남편이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이곳의 옛 이름이 뭐라고?"
"웅기라고 합니다." 
"아, 여기가 바로 웅기였구나. 굴포리가 어디쯤인가?"
"아니, 어떻게 굴포리를 다 아십니까? 이제 곧 호수가 나오는데 그 근처가 굴포리입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있는 곳이 바로 웅기읍 굴포리란다. 선사시대에 관심이 많은 남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터 '선봉'으로 바뀌었나?"
"오래됐지요, '수령님'께서 살아 계실 때니까요. 한 30~40년 됐습니다. 지명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원래 이곳이 경흥군인데 지금은 은덕군으로 바뀌었고 또 군내의 웅기, 아오지 등 옛 이름들이 모두 새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뭐라 그랬어? 아오지?"
"네. 바로 요 옆입니다. 아오지란 옛 이름을 아십니까?"
"잘 알지. 그곳에 탄광이 있다고 배웠지."
"남조선에서 학교 다니실 때 말씀이십니까?"
"응."
"남조선에서도 북조선 지리를 다 가르치는가 보지요?"
"그럼 물론이지. 근데, 문 안내원, 내년 8월에 우리가 여기 올 때, 아오지에 한번 가볼 수 없나?"

"가 보실 수는 있는데... 그곳에는 관광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저 산업지역입니다."
"아니, 학교 때 배운 곳이라 어떤 곳인지 그냥 궁금해서..."
"그럼 다음에 오실 때 가보실 수 있도록 일정을 조직해 보겠습니다. 가 보셔야 그저 공장하고 탄광인데... 근데 참 이상합니다, 선생님. 외국서 오신 손님들은 '체험학습'이라 해서 로동을 일부러 하질 않나 아니면 선생님처럼 광산이나 공장을 관광하시겠다고 하질 않나... 혹시 선생님, 아오지에서 '체험학습 로동'해 보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체험학습 로동'은 구리스 선생 농장에서만 가능합니다."

"아오지에서 무슨 체험학습이야. 난 크리스네 집에서도 제대로 안 했잖아. 걱정하지마. 그런데, 아오지에는 꼭 가지 않아도 돼."
"하여간 원하시면 구리스 선생 크라훈 회사에 말씀하십시오."

아, 나의 조국이여!

우리나라 국토 끝 농촌 마을
 우리나라 국토 끝 농촌 마을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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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숫가를 따라 국토의 가장자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 국토 끝에는 호수가 많이 보인다. 이곳에 큰 호수가 세 개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만포'라는 호수를 지나고 있다. 낚시하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눈에 보인다.

좀 더 달려가니 주위에 있는 논의 흙 색깔이 시커먼 색이다. 이런 색의 논은 처음 본다. 멀리 논 한가운데 큰 탑이 보인다. 저게 뭐냐고 물으니 석유 시추를 하고 있단다. 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곳에 석유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커 시추탑을 세우고 파고 있다는 설명이다. 생각해본다. '우리 한반도에서도 석유가 나올 수 있다면...'

우리나라 맨 끝 기차역인 두만강역.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이 역 앞을 지나고 있다.
 우리나라 맨 끝 기차역인 두만강역.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이 역 앞을 지나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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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왔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서번포'라고 불리는 호수가 있고 왼쪽으로 기차역이 보이는데 '두만강역'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는 얼른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이곳이 우리 국토의 마지막 기차역이다. 아이들이 걸어간다. 아, 이 국토의 끝에도 우리말을 하고, 우리 음식을 먹고, <아리랑>을 부르는 우리 아이들이 살고 있구나. 얼른 뛰어가서 안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우리나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만나는 지점. 왼쪽 건물들이 있는 곳이 중국이고 그 아래 보이는 철교가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철도다.
 우리나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만나는 지점. 왼쪽 건물들이 있는 곳이 중국이고 그 아래 보이는 철교가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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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작은 동산에 오르니 두만강이 굽이쳐 동해로 흘러가고, 강 너머로 넓은 평원이 보인다. 동산 위에 이순신 장군 기념관이 있고, 그 옆에는 이순신 장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후손들이 여진족을 토벌한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세운 것이란다. 우리는 이곳에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중국-러시아 대륙을 바라본다.

왼쪽의 중국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국경이 끊어져 바다가 없다. 그 바로 옆으로는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철교가 놓여 있다. 이곳에 와 보니 왜 라진-선봉이 이들 나라에게 그리도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아, 천혜의 황금 같은 라진-선봉.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이 대륙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관문임을 온몸으로 느낀다.

국경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문호영 안내원이 우리에게 흐느끼며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국경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문호영 안내원이 우리에게 흐느끼며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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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만강을 오른쪽에 끼고 국경 출입국사무소가 있는 원정리로 달려가고 있다. 차 안에서 문호영 안내원이 이별의 슬픔을 삼키며 울부짖듯 애절하게 <아리랑>을 부른다. 반대 방향으로 중국의 화물차들과 승용차들이 끊임없이 줄지어 오고 있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외국인들은 분초를 다퉈 이곳에 몰려들고 있는데, 내 나라 한국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운전기사 '사슴' 아저씨, 문호영 안내원의 눈가에도... 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고개를 돌려 북한 땅을 바라본다. 내려서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본다. 2011년 10월, 평양에서 시작된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 오늘 조국의 북쪽 끝에서 그 막을 내리려 한다.

내 마음에 드리워져 있던 두터운 차단의 장막을 조국의 최북단, 이곳에 흐르고 있는 두만강 물결에 훨훨 던져 동해로 흘려보내련다. 잠시 멈춰 있었던 찬란한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함께 써 내려가길 간절히 기도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불러 본다.

"아, 나의 조국이여!"

덧붙이는 글 | 이번 여행기를 마지막으로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연재가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신은미 시민기자의 연재 여행기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태그:#북한, #민족, #통일, #평화, #북한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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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음대 졸업.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 음악박사.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이후 모두 9차례에 걸쳐 약 12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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