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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동성애자 연예인이 커밍아웃한 지 12년. 이제 커밍아웃은 다양한 관계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고민으로 커밍아웃을 주저하고 있는 성소수자나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수많은 이성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커밍아웃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를 직접 만나 그 이후 삶의 변화나 생각들을 들어보고, 왜 커밍아웃이 필요한지에 대해 얘기해본다. - 기자말

2008년 18대 총선 당시 최초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로 종로구에 출마한 최현숙씨(오른쪽), 왼쪽은 홍석천씨
 2008년 18대 총선 당시 최초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로 종로구에 출마한 최현숙씨(오른쪽), 왼쪽은 홍석천씨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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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최현숙 위원장. 친해지고 나니 현숙 언니. 술 자리에서는 갑자기 최현숙. 이렇게 불렀던 것 같다. 최현숙을 처음 만난 때는 아마도 2005년이 아닐까 싶다. 그때는 그가 민주노동당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위원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편하다.

그런 그를 7년 만에 조금은 진지하게, 또 조금은 간만에 만났다. 성소수자 관련 행사나 집회 농성장에서 만나던 사람을 좀 더 가깝게 만나는 자리였다. 이번 만남에서는 그가 민주노동당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고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시기, 최초의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로 종로구에 출마한 2008년 18대 총선 그리고 이후 당 활동을 그만두고 요양보호사협회 수석 부협회장으로 활동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활동 속에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서 느꼈던 속내, 그 속에서 최현숙의 욕망은 무엇이었는지 묻고자 했다.

- 2004년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면서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우선 기혼자였고, 두 아들의 엄마이기도 했다. 커밍아웃 이후 좀 삶이 복잡했을 것 같은데.
"나는 자신에 대한 자존감, 인정이 강한 스타일이다. 내 정체성에 대해서 남들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틀린 것인가 하는 흔들림은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한 혼돈이나 자신 없음은 없었다. 그 전부터 사회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남들의 반대, 비난에 대해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기도 했고. 사실 나는 그 전부터 막연하게 이성애자만은 아닌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2004년 이전 여성위원장 시절부터 당 활동을 하면서 성소수자 의제와 자주 만났고, 2004년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성소수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물론 그 후 이혼의 과정을 겪었지만, 아들들과는 그 전부터 여성운동 문제들에 대해 자주 대화했기 때문에 나의 커밍아웃에 대해서도 잘 이해했다. 다만 남편이 겪었던 상처가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문제보다 둘 사이의 관계에서 겪었던 문제에 대한 상처였기 때문에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이후 이혼은 잘 정리됐다."

- 노동, 여성 운동을 해왔던 사람이 성소수자 운동에 뛰어들면서 힘들었던 점은 없었는지?
"나는 아마도 힘든 쪽에 마음이 더 가는 것 같다. 사회운동을 하면서 지지부진함이 있거나 동력을 잃을 때 내 역할이 허락하는 한에서 새로운 곳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 마침 2000년 이후 정당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2002년 여성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주의, 성정치와도 만났다. 그러면서 2004년 성소수자 운동과 만나게 되었는데. 사실 이 운동이 정말 힘들더라. 견고한 억압과 배제 속에서 문제들이 보였고. 그러면서 내가 해야 한다고 여긴 것은 결국 진보적 성정치였다.

성전환자 성별변경 문제를 우연하게 접하게 되어 실태조사와 입법 운동까지 진행했다. 그러다 2007년 성소수자 위원회 엠티 때 2008년 총선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을가를 우연히 이야기 했고 성소수자도 후보를 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역에서 성소수자가 커밍아웃을 해서 존재를 알리고, 성소수자 의제를 이슈화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다보니 결국 내가 나갈 수 있다고 판단돼 18대 총선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사실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해 선거에 뛰어드는 데엔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지지도 필요한 것인데, 진보정치만 해오던 내가 탈 정치적이었던 성소수자 운동 진영에서 어떻게 지지를 모으고 뜻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2008년 초 성소수자 활동가 워크숍에서 나이 50이 넘은 중년 여성이 20~30대 젊은 활동가들과 함께 성소수자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힘듦을 이야기하니 눈물이 절로 나왔고, 다행히도 그 때 마음이 통했는지 레즈비언 홛동가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어 2008년 총선까지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2008년 총선 출마 통해 '진보적 성정치' 알리고 싶었다"

최현숙씨
 최현숙씨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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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총선 이후 선거에서 졌지만, 그 활동들이 고스란히 기록에 남아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했고, 2008년 진보신당 부대표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런데 2009년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총선 때 나의 전략이 진보적 성정치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알리는 것이었다면 진보신당 부대표 출마의 목표는 진보정당 안에서 진보적 성정치를 확장해 진보운동 속에 진보적 성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성소수자 의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생태 등 다양한 의제를 성정치와 결합하여 성소수자만의 무지개가 아닌 진보 운동 전체의 무지개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던 선거였다. 그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느꼈던 한계는 여전히 나를 성소수자만을 대표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이전 노동, 생태 관련 운동을 해온 경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소수자의 정체성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많이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와 55세 여성이 무엇으로 밥을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다 요양보호사 관련 사회서비스 운동에 관심있다는 말을 서너 살 많은 요양보호사에게 건넸더니 바로 교육 받자고 나를 이끌어 한 달 동안 240시간을 교육을 받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사회서비스 부분은 부대표에 출마했을 때도 내가 중심적으로 내놨던 부분이다. 노인·아동·장애인 관련 영역이 넓어지면서 복지 문제가 부각되고 여기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 봤는데, 현재 이 일들이 싸구려 노동으로 취급받고 있는 상황과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여성에 집중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내가 제시했던 그 정책과 관련해 직접 뛰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만 하고 돌봄 노동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던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 요양보호사 활동하면서 레즈비언, 진보 정치 활동 경력에 대한 주위 시선은 어땠는지?
"사실 종로에서 그렇게 떠들어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종로에서 요양보호사 활동을 하면서 나를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 전혀 몰랐기에 잠입하기엔 오히려 좋았다. 처음부터 걸림돌이 생기는 것 보다 일을 통해 섞여서 같이 하는 과정이 좋았다. 가끔 어르신들이 내 개인에 대해 물으면 어떤 분한테는 이혼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분에게는 이혼했고 여자가 훨씬 더 좋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 맞장구 쳐주는 분위기가 있고, 가부장적 문화 때문인지 여자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어르신들이 이해하는 점이 있다.

요양보호사들과의 관계에서도 기회가 생기면 커밍아웃을 하고 있다. 다른 것으로 이미 관계 형성이 되어 신뢰가 있기 때문에 크게 무리는 없다. 이번 인터뷰 제안 전화를 받았을 때 같이 활동하는 동료와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 동료가 무슨 전화냐고 물어서 '어떤 게이가 인터뷰하재'라고 말했다. 그 동료에게 말할 계기가 없었는데, 그 때 마침 전화가 와서 그 이야기를 건넸는데 좀 놀래더라. 그러면서 그 동료가 '근데 정말 자기 레즈비언이라매'라고 해서, '어 그래 맞어, 나 그런 사람이야'라고 대답했다. '어머 그렇구나'라고 그 친구가 대답하더라. 그날 밥을 다 먹고 담배 피우는 동안 '애인은 예뻐?' 하면서 물어보더라. 그 다음에 만날 때도 전혀 부담감 없이 나름대로 소화해나가고 있는 과정을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

- 앞으로 계획은 어떤가?
"노인에 대한 돌봄이라는 말을 어떻게 더 확장하느냐가 고민 중 하나다. 노인을 돌보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분이 느끼고 있는 소회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또 이 노인이 처해 있는 주거나 빈곤과 관련한 상황이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노인 복지 정책과 만날 수 없어서 생기는 문제들이라면 돌봄의 기능을 확장시켜야 하는 것 아닌지가 주요 고민이다. 더불어 1920~1930년대 태어나 한국의 주요 역사를 힘겹게 살아온 여성이면서 노인인 분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 일을 하면서 찬찬히 인터뷰를 해 글로 정리하고 있다. 내 활동의 영역을 어떻게 잡아 나갈 것인가, 진보적인 성정치도 어떻게 같이 섞어 갈 수 있을까 역시 고민이다. 그래서 여성 노동 글쓰기, 영상과 같은 문화작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 있어 함께 하려고 한다."

최현숙 언니는 2시간 가까운 인터뷰 동안 지난 몇 년 동안의 삶의 기억을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타인이 갖고 있는 생각이 옳든 그르든 자신의 자존감, 주관이 확고하다면 사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물론 상대방이 나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해주고 이해해주기 위해서는 커밍아웃 하는 이의 노력도 필요하다. 그것을 실천해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운동하는 최현숙의 현재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8월 19일 인터뷰입니다.



태그:#최현숙, #동성애, #레즈비언, #게이,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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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활동하는 이종걸 입니다. 성소수자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이 공간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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