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나와 있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좋은 사람일 거야"

매력적인 중년 남자가 임신부를 유혹하여 전망 좋은 집으로 데려간다. 순순히 따라나선 임신부는 돌연 태도를 바꿔, 남자더러 뒤로 안아 등을 토닥여달라고 부탁한다. 남자는 얼마간 난감해 하더니 임신부를 뒤로 안아 만삭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그리고 외려 자신이 위안을 얻는다. 영화 <레퓨지>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프랑소와 오종은 좋은 사람일 거야." 오종은 <레퓨지>의 감독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종종 이런 장면을 만나곤 한다. 숭고하거나 아름답거나 눈물겹도록 슬픈 장면. 늙은 노숙자가 국부를 다친 망나니 용패를 간호하는 장면(<악어>)이나 이 집 저 집 떠도는 두 남녀가 허름한 집에 들어갔다가 죽어 있는 홀몸 노인을 발견하곤 손수 매장하는 장면(<빈집>)을 보면서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김기덕 감독은 좋은 사람일 거야"라고.

 영화 <피에타>

영화 <피에타>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났다. 김기덕 감독의 열여덟 번째 영화 <피에타>를. 누구도 악마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만 만들어질 뿐이다. 그리고 이 악마조차도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이 감독의 메시지다. 감독은 다소 묵직한 메시지를 가지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고픈 감독의 마음이 느껴질 정도다. 너무 친절해서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장면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피에타>는 핏덩이 때부터 버림받아서 죽을 때까지 버림받는 '이강도'의 수난극이자, 제도권으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가난한 공장 노동자들의 수난극이다. 도무지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강도는 사채업자의 하수인이다. 그는 채무자들의 몸을 망가뜨려 보험금을 갈취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간다. 그 짓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해치운다. 전형적인 사이코 패스라고 해도 좋다. 남의 고통과 아픔에 철저히 무감각한 사람. 그런데 이 자가 어느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기를 강도의 어미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고부터. "미안해. 널 버려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여자, 정말 강도의 어미가 맞을까?

책임지지 않는 행위에 극도의 증오심을 품은 남자 

 강도 앞에 불쑥 나타나 용서를 비는 여자

강도 앞에 불쑥 나타나 용서를 비는 여자


갓 지은 밥과 반찬을 차려놓고 강도를 기다리는 여자. 뜨개질을 하며 강도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 천생 어미다운 모습을 보이는 여자를 강도는 모질게 대한다. 그래도 여자가 계속 들러붙자 강도는 여자에게 저의 살점을 먹이고 여자를 욕보인 뒤에야 어미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강도는 여자가 나타난 순간부터 어미로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강도는 태어날 때부터 사랑에 굶주려 있었으니까. 서른 살이 넘도록 사랑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착한 아이였으니까.

그리하여 뒤늦게 나타난 어미가 강가에 나무를 심어달라고 하면 심어주고, 그 나무에 물을 주라고 하면 고분고분 물을 준다. 한없이 순한 아이로 돌아간 강도. "불안해.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다시 혼자가 되면 못 살 것 같아." 어느 날 강도가 여자에게 말한다. 강도는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 다시는 날 버리지 말아요."

이렇게 순한 사람이 어찌 채무자들한테는 무자비하게 굴었던 걸까. 그것은 책임지지 않는 행위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기실 강도는 책임지지 않는 행위에 대해 섬뜩하리만치 증오심을 품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기 어미가 자기를 낳아놓고 무책임하게 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채무자들이 돈을 갚지 못하는 처지를 전혀 헤아리지도 연민하지도 못할 수밖에.

강도는 돈을 빌려갔으면 당연히 기일에 맞춰 갚는 것이 돈을 꾼 자의 책임감이라고 믿는 게 분명하다. "돈을 빌려갔으면 갚아야 할 것이지 책임지지 못할 일을 왜 해?" 이것이 강도가 채무자한테 던지는 냉혹한 말이다.

어미가 나타난 뒤로 강도는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어미는 사라지고 강도는 극도로 불안에 떤다. 한참 뒤 그는 잔인한 현실과 마주한다. 다시 버림을 받는 강도.

남자를 흔들어 놓았다가 끝내는 복수하는 여자

여기서 의문 하나. 모성애를 이용하여 강도를 흔들어 놓았다가 끝내는 복수를 완성하는 여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 여자는 강도를 구원으로 이끄는 '성모 마리아'일까. 그럴 리가. 여자는 단지 복수욕이라는 추악한 욕망을 채우고 사라진 인간일 뿐이다. 아들의 원한을 갚고자 모성애를 이용하여 강도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속된 사람일 뿐이다. 설령 강도가 거짓 어미의 죽음을 목격하고 나서 속죄의 의미로 처절하게 죽어간다고 해도, 설령 여자가 죽기 직전에 강도를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정말이지 여자가 참된 모성애를 지닌 사람이라면 아들의 원한을 갚기 이전에, 왜 강도가 짐승으로 떨어지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고 연민해야 옳다. 참다운 모성애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자식을 연민하는 것이야말로 모성애의 진면목일 테니까. 그러나 여자는 자기 새끼만 연민하였지 남의 새끼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초반에 강도에게 "나 때문이야, 내가 널 버려서"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여자는 강도가 왜 악마로 변해버렸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복수를 완성하고 보란 듯이 최악의 길을 택했다. 강도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기고. 만일 여자가 끝까지 살아 남아서 강도를 속죄의 길로 이끌었다면 어땠을까. 친자는 죽고 없지만 그 아이를 간접 살인한 강도를 아들로 거두어, 가짜 모성애가 아닌 진짜 모성애로 그를 양지로 이끌어냈다면? 여자 자신도 더불어 구원을 받지 않았을까.

공장노동자들, 또 하나의 수난자

 예수의 십자가상을 연상하게 하는 도발적인 <피에타> 포스터

예수의 십자가상을 연상하게 하는 도발적인 <피에타> 포스터


여자에 비하면 차라리 강도는 동정의 여지가 많다. 강도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을 불구로 만들면서까지 사채 빚을 받아내는 것은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행위이나 그가 왜 그처럼 괴물이 되어버렸는지를 우리는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다. 강도는 어느 누구한테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곧바로 경쟁사회에 내던져졌을 것이다. 그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생을 버텨왔을 것이다. 강도가 그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일은 학력이나 경력을 따지지 않는, 사채업자 하수인 노릇이었을 것이다.

강도가 이기적인 핏줄주의와 거짓 모성애에 농락을 당한 수난자라면, 철거 직전의 공장 노동자들은 사회제도로부터 버림받고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 또 하나의 수난자다. 애초에 그들이 제1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더라면, 제3금융권이나 현대판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사채업자의 돈은 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중 은행이 융통성 있게 가난한 영세업자나 공장 노동자에게 돈을 빌려주었더라면, 그리고 정부 금융기관이 불법 사채업을 책임감 있게 단속했더라면 그렇게 몸과 맘을 훼손당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그 사람들을 짓밟는 자는 확실히 이강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사회가 그들을 짓밟은 것이다. 왜냐하면 강도 역시 사채업자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채업자는 강도를 폭행하며 말한다. "너 말고도 이 일을 할 사람은 많아!" 사채회사를 교묘히 양산하는 국가와 그것을 감독할 생각이 전혀 없는 금용기관의 태만으로 소외계층은 점차 구석에 몰리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시신 옆에 누운 강도를 보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감독은 <피에타>에서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빚어놓았다. 강도가 스웨터를 입고 여자의 시신 옆에 누운 장면. 여자가 자기를 기만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여자가 짠 스웨터를 기어이 입고 시신 옆에 누운 강도를 보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물론 이것은 강도의 환상이고 꿈이지만 이것이야말로 강도의 진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미(여자)를 살릴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은 스러져도 좋다고 절규한 사람이었으므로, 강도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마흔네 살에 마태수난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김기덕은 쉰두 살에 버림받은 인간의 수난극을 만들었다. 물론 강도는 예수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다. 예수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강도 역시 혈연주의와 사회로부터 수난을 당하다 죽었다. 가난한 서민들 또한 금융당국과 거대자본한테 버림을 받고 법의 사각지대에서 수난을 당하다 몸이 훼손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피에타>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수난을 때론 극적으로 때론 서정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강도는 자기 몸을 채무자의 트럭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속죄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어미 대신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했을 때부터 강도는 이미 속죄의 길로 들어섰다, 고 나는 생각한다.

김기덕 피에타 베니스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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