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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원림을 찾은 때는 늦여름(지난 8월 말) 한낮이다. 일부러 이 시간에 맞춰 찾았다. 한낮과 붉은 배롱나무가 잘 어울리기도 하고 예전 이 맘 때에 들렀을 때 명옥헌 정자에서 느낀 정취가 그리워 다시 그 시간에 맞추어 찾은 것이다.

명옥헌에서 본 정경 한여름 한낮 명옥헌에서 보낸 정취가 그리워 같은 때에 다시 찾았다
▲ 명옥헌에서 본 정경 한여름 한낮 명옥헌에서 보낸 정취가 그리워 같은 때에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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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원림은 담양 고서면 후산마을에 있다. 예전 같으면 찾아가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표지판도 잘 돼 있고 해서 찾아 가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마을입구에 주차장도 생겼다. 정자나 고택을 찾아갈 때면 좁은 마을길을 비집고 들어가야 해서 혹여 마을 분이라도 만나면 미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제 그런 부담은 덜어져서 다행이다.

마을 입구엔 제법 나이든 팽나무 한그루와 그 옆 연못가에 버드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어 마을 초입부터 분위기가 여느 마을과는 다르다. 그러나 감나무 밭을 끼고 마을길을 가다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곳곳에 공사를 하는 곳이 많아지고 시골마을과는 동떨어진 집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무인경비시스템을 갖추고 도심 속에서나 볼만한 집들이 마을을 점점 점유해가고 있다.

물가 심어진 왕버드나무 연못가에 심어진 왕버드나무는 어떤 가뭄에도 견디어 내어 이 마을의 저력을 내보이고 있는 것 같다
▲ 물가 심어진 왕버드나무 연못가에 심어진 왕버드나무는 어떤 가뭄에도 견디어 내어 이 마을의 저력을 내보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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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원림과 어울리는 마을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이제 거꾸로 마을길을 걸어서 가기보다는 차로 빨리 명옥헌만 보고 나오는 게 나을 성 싶은 심정이다.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 서둘러 마을길을 빠져나와 명옥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명옥헌 초입에 낮은 언덕이 있다. 언덕을 넘기 전까지는 언덕 너머에 어떤 풍광이 펼쳐질까 상상하기가 어렵다. 언덕을 살짝 넘으면 어마어마한 풍경이 펼쳐진다. 얕은 산비탈을 타고 배롱나무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연출한다. 선계인지 속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명옥헌원림 정경 배롱나무꽃 핀 명옥헌원림 정경은 선계인지 속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 명옥헌원림 정경 배롱나무꽃 핀 명옥헌원림 정경은 선계인지 속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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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중심으로 양편에 배롱나무가 엉겨서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다. 연못에 비친 빛깔도 붉은 빛이어서 원림 전체가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배롱나무는 여름부터 가을 초까지 백 일간 꽃을 피운다하여 목백일홍이라 하였다.

연못가에 핀 배롱나무꽃 배롱나무는 연못 안에도 물속에도 땅에도 연못가에도 붉은 꽃을 토해내 명옥헌원림은 온통 붉은 빛이다
▲ 연못가에 핀 배롱나무꽃 배롱나무는 연못 안에도 물속에도 땅에도 연못가에도 붉은 꽃을 토해내 명옥헌원림은 온통 붉은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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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관련하여 농화일년간화십일(弄花一年看花十日),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전자는 '한 해 동안 꽃을 가꾸어서 그 꽃을 즐기는 것은 열흘뿐이다'라는 뜻이고 후자는 '열흘 붉은 꽃은 없다'라는 말이다. 꽃으로 말하면 열흘은 짧고 그에 비해 백일은 긴 시간을  의미한다.

꽃은 혹독한 겨울을 나고 봄에 꽃을 피운다. 배롱나무는 남들이 꽃을 피우며 자랑할 때도 묵묵히 참고 있다가 다른 꽃이 지고 시들어질 때서야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도종환의 시구처럼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다. 남들이 십일 자랑할 때 백일홍은 백 일간 피어 자랑한다. 참고 또 참고 기다린 결과다.

배롱나무는 꽃송이 하나가 100일을 유지하는 게 아니다. 한 송이에서 꽃이 피고 지고나면 다음 송이에서 꽃이 연이어 피고 그러한 일을 백일 동안 계속한다. 붉은 피를 토하듯 선혈 같은 꽃잎을 자기의 몸 밑에 토해 놓는다. 그래서 여름 내내 배롱나무 몸에도, 몸 밑에도 붉은 꽃잎이 가득하다.

배롱나무 꽃송이 꽃송이가 번갈아 가며 꽃이 피고 지고하여 붉은 기를 백일동안 유지한다
▲ 배롱나무 꽃송이 꽃송이가 번갈아 가며 꽃이 피고 지고하여 붉은 기를 백일동안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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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 한 모퉁이에 나이 든 적송이 줄지어 자라고 있다. 한여름에는 배롱나무에 치여서 소나무가 시들었는지 푸르게 서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배롱나무의 잎과 꽃이 지고 반드러운 맨살이 드러날 때 비로소 그 푸름이 보인다. 배롱나무는 소나무와 정반대다. 심한 한겨울의 추위가 지나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고 했듯이 다른 꽃은 지거나 시드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와서야 배롱나무의 붉음을 안다. 세한도를 패러디하여 시 한 수 지어볼까 한다.

歲寒然後知 松柏之然後凋 (세한연후지 송백지연후조)
猛暑然後知 紫薇之然後紅 (맹서연후지 자미지연후홍)

 배롱나무와 소나무 세한연후에야 소나무의 푸름을 알 듯, 한여름이 돼서야 배롱나무의 붉음을 안다
▲ 배롱나무와 소나무 세한연후에야 소나무의 푸름을 알 듯, 한여름이 돼서야 배롱나무의 붉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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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는 순우리말이고, 한자로는 자미(紫薇)라 부른다. 담양 남면에 흩어져 있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독수정 등의 원림과 정자 앞을 흐르는 개울이 자미탄(紫薇灘)이었다. 지금은 광주호라는 큰물이 삼켜 그 일부만 남았지만 예전엔 자미탄이라는 아담한 개울이었다. 이 자미탄이 배롱나무인 자미에서 나오고 자미탄이 배롱나무개울이니, 과연 배롱나무는 남도의 꽃이 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명옥헌은 명옥헌정원이었다. 원림의 개념이 널리 퍼지면서 도로표지판도 모두 명옥헌원림으로 바뀌었다. 개념적으로 원림은 동산과 계곡,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살려 적당한 곳에 정자나 집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명옥헌원림은 개념적으로 완벽한 원림이다.

계곡에서 흘러온 물은 원림 위쪽에 있는 작은 연못과 밑에 있는 큰 연못으로 흘러간다. 예전에는 위에 있는 연못은 윤곽이 명확하지 않았으나 이제 뚜렷해 졌다. 두 연못 모두 네모난 연못 모양을 하고 있다. 작은 연못, 큰 연못 모두 가운데 둥근 섬이 떠있다. 둥근 섬 안에는 여지없이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둥근 섬 안에 심는 나무는 정원과 원림, 후원의 분위기에 맞게 심어진다. 창덕궁 후원 부용정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고 종묘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명옥헌원림 작은 연못 명옥헌 위에 작은 연못이 있다. 예전엔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뚜렷해 졌다
▲ 명옥헌원림 작은 연못 명옥헌 위에 작은 연못이 있다. 예전엔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뚜렷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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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연못을 만드는 데에 자연을 훼손한 흔적은 없다. 물이 흘러가는 계류는 하나도 손대지 않고 연못으로 흘러가는 길만 내주었다. 계류 중 더 큰 물줄기는 아래에 있는 큰 연못으로 흘러가고 작은 물줄기는 작은 연못물이 넘쳐흐르는 물과 합수하여 내려간다.

명옥헌원림 계류  계류는 물길만 내주었을 뿐 인위적으로 손댄 흔적은 없다
▲ 명옥헌원림 계류 계류는 물길만 내주었을 뿐 인위적으로 손댄 흔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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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에는 담이 없다. 소쇄원에는 담이 인공과 자연을 나누고 아늑함을 주는 반면 명옥헌은 자연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다. 차라리 자연에 안겼다는 표현이 맞은 것 같다. 자연이 주인이고 사람은 객인 셈이다. 사람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자연을 빌린 셈이다.

명옥헌 원림의 규모에 알맞아 크지도 왜소하지도 않다
▲ 명옥헌 원림의 규모에 알맞아 크지도 왜소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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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뒤편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 원림의 규모에 알맞은 크기의 정자다. 정자의 이름은 명옥헌이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옥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에 비가 많이 와서 과연 옥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정자위에서 담소를 나누는 중년부인들의 웃음소리에 간간히 옥소리는 끊기긴 했어도 기분 좋은 한낮의 풍경이다. 배롱나무 만발할 한여름 한낮의 명옥헌 원림이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원림이라 할만하다.

후산마을 은행나무 마을이 변하고 있어 은행나무 보러가는 길이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
▲ 후산마을 은행나무 마을이 변하고 있어 은행나무 보러가는 길이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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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마을 깊숙한 곳에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명옥헌을 보고 마을길을 걸어 은행나무를 보고서 이 여정이 마무리되는 건데 오늘은 왠지 거기까지 가고 싶지 않다. 후산마을 집들은 문이 잠기고 보안시스템들이 문을 대신하고 있다. 앞으론 어떻게 변해있을지 걱정까지 된다. 명옥헌만 달랑 보고 와야 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그 날이 되면 명옥헌원림은 우리나라 최고의 원림 자리를 내줘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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