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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논현동 고시원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중국동포 유족들이 울부짖고 있다. 그들의 코리안드림은 비참한 죽음으로 끝났다.
 2008년 논현동 고시원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중국동포 유족들이 울부짖고 있다. 그들의 코리안드림은 비참한 죽음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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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급식소에서 식사 중인 정성환씨.
 무료급식소에서 식사 중인 정성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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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중국과 수교가 되면서 빛도 있었고 그림자도 있었다. 이주민 돕는 일을 하는 나는 어두운 그림자를 주로 보았다. '코리안드림'을 품고 한국에 왔다가 병들고, 버려지고, 죽어서도 고향으로 못 돌아가는 중국동포들…. 코리안드림을 이루며 팔자를 고친 중국동포도 적지 않겠지만 조국도 타국도 아닌 한국에서 흘린 그들의 피눈물은 비극의 강이 되었다.

중국동포 정성환(49)씨는 중풍 환자다. 정씨는 2007년 12월경에 누이라는 여성에 의해 서울 구로구 가리봉에 있는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에 입원했다. 그대로 표현하면 누이는 그를 병원에 버리다시피 하고 갔다. 2009년까지는 누이라는 여성이 병원을 간혹 찾아왔고 전화연락도 됐다. 이제 그만 데려가라고 하면 "알겠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2010년부터는 일체 연락이 끊기면서 정씨는 사고무친(四顧無親) 신세가 됐다.

중국 지린(길림)시가 고향인 정씨는 농민이었다. 그러다가 도회지로 나와서 운전수가 됐다. 덩샤오핑(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배금주의 풍조가 중국을 휩쓸면서 그와 아내는 사이가 더 나빠졌다. 결국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2005년 2월 코리안드림에 합류했다. 정씨는 한국에 돈 벌러 가면서 단단히 다짐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겠다는 다짐과, 이혼한 아내와 다시 결합해서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은 바람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자본주의 수렁에 빠지면서 그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당시는 건설 경기가 좋을 시절이어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했던 정씨의 벌이 또한 좋았고, 번 만큼 써도 또 다시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번 돈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 그러다가 뇌출혈이 찾아왔다. 

중풍에 버려지고, 대소변 못 가리고... "그래도 고향으로 가자"

중풍 환자인 정성환씨가 중국동포교회 정문에서 바람을 쐬고 있다.
 중풍 환자인 정성환씨가 중국동포교회 정문에서 바람을 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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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누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누이는 연락을 영영 끊었다. 정씨는 한국에서 번 돈을 누이에게 맡겼고 누이가 그 돈으로 중국 선양(심양)에 집을 사놓았다고 주장했다. 주변에선 정씨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란다. 돈을 맡긴 것은 사실이지만 큰돈이 아니었고, 그 돈은 정씨의 치료비로 다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씨는 선양에 사놓은 집이 있고, 지린 고향에는 자신의 땅이 있다고 믿고 있다.

병원 치료가 끝나면서 퇴원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오갈 데도 없고 보호자도 없었다. 그래서 정씨는 쉼터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시무룩하게 지내던 정씨가 재활훈련을 하며 운신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1~2번은 쉼터에서 가리봉오거리 인근까지 지팡이를 짚고 뒤뚱거리며 오고갔다. 보통 사람들이 5~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1~2시간 걸려서 땀을 흘리며 오고갔던 것은 제 발로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20012 설날맞이 다문화축제에서 무대에 올라갔다가 자원봉사의 도움을 받고 내려오는 정성환씨.
 20012 설날맞이 다문화축제에서 무대에 올라갔다가 자원봉사의 도움을 받고 내려오는 정성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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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설상가상의 일이 벌어졌다. 지난 6월이었다. 쉼터 화장실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골반 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정씨는 "팔자가 참 사납다"면서 망연자실했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은 그의 중상을 처리할 정도가 못 됐다. 정씨의 수술을 위해 여러 곳에 도움을 청했지만 어려웠다. 도움을 여러 차례 받은 전력 때문에 지원대상자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서울시가 운영하는 보라매병원에 데려갔다. 아니 떠맡기고 돌아왔다.

지난 7월 말부터 보라매병원에서 쉼터로 연락이 왔다. 수술을 다 끝냈으니 정씨를 어서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정씨를 데려오기에는 쉼터 상황이 달라졌다. 정씨가 병원으로 옮겨진 뒤에 병자나 장기 체류자를 비롯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퇴소시켰다. 그렇게 한 뒤로는 '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중환자인 정씨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정씨의 인수인계를 놓고 보라매병원과 실랑이가 벌어지다가 8월 초순에 정씨를 데려왔다.

정씨는 돈 한 푼 없이 수술을 마치고 다시 쉼터로 돌아왔다. 정씨는 예상대로 대소변을 혼자 처리하지 못했다. 쉼터 사람들의 도움으로 대소변을 처리하곤 했지만 다급할 때엔 이불과 옷에 오줌을 지렸고, 골을 흔드는 악취는 쉼터와 주변을 진동시켰다. 쉼터는 요양원이 아니어서 정씨를 돌볼 간병인이 없다. 쉼터에는 여전히 건강의 여의치 않은 사람들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러니 정씨든 누구든 돕거나 배려할 처지가 못 된다.

최근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쉼터는 4층에 있고 무료급식소는 1층에 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면서 정씨의 휠체어가 묶인 것이다. 쉼터 사람들은 비상계단을 이용해서 오르고 내렸다. 계단이 가파른 탓에 휠체어에 탄 정씨를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정씨는 이틀 동안 식당 바닥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내가 사무실을 이틀 비운 동안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갔더니 피골은 상접했고 악취는 진동했다. 정씨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아우라고 불렀다. 구안와사(口眼喎斜)에 걸리면서 중풍 환자인 정씨가 남 같지 않았다. 그래서 목욕탕도 함께 갔다. 서로 친해지자 정씨는 나를 보면 씨~익 하고 웃어주었고,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알렸다. 그런데 정씨는 나를 보고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고달픈 인생과 병든 몸뚱이가 힘겨운 것이다. 비상계단을 이용해 4층 쉼터까지 정씨를 옮기고 씻기는데 어떤 슬픔이 찾아왔다.

마누라에게 버림받고, 아들(18)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팔자 고치러 한국에 왔다가 돈벌이는커녕 병든 몸으로 똥오줌도 못 가리고, 의지 가지할 피붙이도 일가친척도 없는 인생…. 누군가를 슬퍼하는 것은 자신의 슬픔 때문이다. 그를 씻기는데 가슴이 아렸다. 나의 인생 또한 버림 받고 쓰러진 적이 있었기에…. 인생은 나그네, 나그네로 떠돌다가 병들고, 외롭고, 버려지기도 하는 게 인생인가.

사망 414일 만에 장례 치른 노인... 7년 만에 귀국하는 중풍 환자

사망한 지 414일 만에 치러진 중국동포 한재준씨 장례식
 사망한 지 414일 만에 치러진 중국동포 한재준씨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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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한재준씨의 유해는 지구촌사랑나눔이 운영하는 '안식의집'에 안치됐다.
 중국동포 한재준씨의 유해는 지구촌사랑나눔이 운영하는 '안식의집'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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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모두에게 짐이었다. 악취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어떻게 좀 해달라고 모두들 아우성이었다. 중국 사람이니 중국대사관 앞에 데려다 놓으면 알아서 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중국대사관 앞에다 버리고 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정씨에게 중국으로 가자고 했더니 가겠다고 했다. 정씨를 중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주한 중국대사관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있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에 2년 동안 입원해 있던 중국동포 한재준(당시 77세) 할아버지가 2007년 사망했다. 중풍병자였던 할아버지는 아들 내외에 의해 병원에 유기됐고 아들 내외는 연락을 끊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해드리고 싶었지만 유족의 동의가 없어서 불가능했다. 중국대사관 측에 '유족을 찾아주거나 아니면 장례에 대한 법적 책임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차일피일 미루었다. 수백 통의 전화와 공문이 핑퐁처럼 오고가면서 1년이 지났다.

장례식장 냉동고에 있는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도와주던 장례식장은 도가 지나치다면서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중국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한계에 다다랐다. 시신을 떠메고 가겠다는 최후의 통보를 했다. 그러자 중국대사관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중국 정부로부터 장례 위임을 받아서 2008년 8월 27일 장례를 치러드렸다. 사망한 지 414일 만이었다.

정씨의 귀국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주한 중국대사관에 보냈다. 예상대로 책임 떠넘기기 태도를 보였다. 외교통상부와 법무부에도 공문을 보냈다. 도울 방법이 별로 없다는 답변에 그쳤다. 예상한 반응이어서 계획한 대로 벼랑 끝 전술을 펼치기로 했다. 정씨를 중국대사관에 데려가서 시위농성을 벌이겠다고 일방 통보했다. 중국대사관에서 즉각 연락이 왔다. 만나서 문제를 풀자는 것이다. 그런 실랑이 끝에 정씨의 귀국을 중국 정부가 책임지기로 했고, 그런 결론이 나자 정씨 귀국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5일 지린시에서 연락이 왔다. 지린시정부 관계자 3명이 정씨를 데리러 한국에 오겠다는 것이다. 정씨는 지린시에 있는 '동광원'이라는 양로원에 입소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문제는 촉박한 일정이었다. 법무부에 서둘러서 전화를 했다. 불법체류자인 정씨의 원활한 귀국을 협조하기로 했다. 정씨에게 귀국 일자를 알리자 일그러진 표정으로 씨~익 하고 웃었다. 반기는 피붙이 하나 없지만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마음이 부푸는 가보다.

정씨는 10일 비행기로 떠난다. 성금과 선물도 챙겨줄 것이다. 특히, 민폐가 되지 않도록 잘 씻겨서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이다. 정씨는 이곳 병원과 쉼터에서 장장 6년 동안 지냈다. 정씨를 떠나보내는 마음이 시원하고 착잡하다. 몸도 마음도 지친 정씨를, 돌봐줄 가족도 없는 중국으로 보내는 마음이 안타깝다. 가난한 직원들이 성금(誠金)을 모아서 정씨에게 주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씨보다는 형편이 낫지 않느냐고, 어떻게 빈손으로 보낼 수 있겠냐면서…. 정씨와 이별인사를 미리 나누었다. 그리고 손도장을 찍으며 이렇게 약속했다.

"길림의 양로원에 가면 많이 힘들 거야. 누가 돌봐주지 않더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여기서처럼 그냥 감사기도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다. 팔자가 좋든 궂든 우리는 죽는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자. 그럼에도 사는 것이 너무 억울하면 '이 세상에선 고달픈 인생이었지만 죽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편히 좀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자. 우리 다시는 만날 수는 없겠지만 너무 눈물 흘리지 말고 살다가 죽으면 나중에 거기에서 만나자!"

2008년 1월 서울출입국의 단속을 피하려다 추락사 한 중국동포 권봉옥씨 장례식에서 헌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국동포들.
 2008년 1월 서울출입국의 단속을 피하려다 추락사 한 중국동포 권봉옥씨 장례식에서 헌화를 기다리고 있는 중국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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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코리안드림, #중국동포, #중풍병자, #장례식,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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