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노래를 듣는 순간 '동작 그만'... 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노태우 정부 시절 노동운동탄압을 규탄하는 시위
 노태우 정부 시절 노동운동탄압을 규탄하는 시위
ⓒ 박용수선생 사진첩에서

관련사진보기


햇살 푸른 교정의 맑은 봄날에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1988년. 제대를 하고 복학생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돌아 온 학교는 어수선했습니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어처구니없게 노태우에게 권력을 빼앗긴 탓에 무력감이나 패배감이 학교 전체를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제대 후 새롭게 시작해 보려는 내 희망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죠. 게다가 학생운동의 내용과 형식도 입대 전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2년 반, 학교를 떠나있어야 했던 기간 동안 애타게 그리워했던 시간을 보상 받으려는 듯 열정을 다해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얼굴을 트기 시작한 후배들과 친해져야 했고 학생운동을 하는 복학생들이 많지 않았던 터라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절 윤민석을 만났습니다. 총학생회실에 대자보를 쓰러 갔다가 처음 만났습니다. 기타 반주 위로 흐르는 중저음의 노래 소리와 함께요.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나를 '동작 그만' 하게 했습니다. 곡도 좋았지만 목소리가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나서 금방 친해졌어요. 그의 매력에 빠진 내가 총학생회실을 자주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윤민석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기타와 중저음. 그 시절에 그는 기타로 작곡을 했죠. 가끔은 디지털 건반을 쓰기도 했지만 주로 기타를 퉁기며 작곡을 했고 완성된 후에 곡을 들려줄 때도 주로 기타를 쳤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윤민석의 노래는 <전대협진군가>나 <결전가>처럼 행진곡풍의 노래보다는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편지> 같은 서정적인 포크곡들이었습니다.

그 노래들이 그의 목소리와 잘 어울렸어요. 윤민석은 작곡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내게는 싱어송 라이터, 어쩌면 그보다 가수 윤민석이 먼저입니다.(아,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요!) 그와 친한 덕분에 새 노래가 만들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용기가 필요할 때, 때로는 그냥 넋 놓고 싶을 때 그가, 그의 노래가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는 나보다 한 학번이 아래인 후배였어요. 재수를 해서 나이는 같은데, 나를 형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우린 고민이 비슷한 함께할 게 많은 친구였습니다. 오히려 그가 형처럼 나를 위로할 때가 많았죠.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노래운동에 뛰어들면서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커밍아웃 했기에... 그를 만나기가 두려웠다

내가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개인적인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그와 가끔 연락을 주고받다가 소식이 끊긴 지 몇 달째 되던 때였죠.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의 산하 단체인 '애국동맹'에 가입하여 반체제운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그 근거로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고 3년 형을 받았습니다.

한달음에 면회를 가야했지만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3년을 교도소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면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를 만나는 게 두려웠습니다. 나도 같이 휘말릴까봐 두려워서는 아니었어요. 내가 게이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활동을 하려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족해방계열이었던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던 동지였지만, 내가 게이라는 걸 드러내면서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것 같았어요.

그와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지만 다른 후배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가 험한 소리를 들었던 터라 그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상처 받을까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나는 감옥에 있는 그에게 나까지 고민거리가 될 수는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마음을 접었습니다. 비겁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와 멀어져 갔습니다. 가끔 그가 생각났지만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로 만족해야 했죠.

2004년 3월 27일 저녁 광화문 네거리에서 '탄핵무효, 민주수호' 촛불집회가 8만 여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2004년 3월 27일 저녁 광화문 네거리에서 '탄핵무효, 민주수호' 촛불집회가 8만 여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어 국민들이 거리로 달려 나왔을 때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의 노래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아스팔트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형" 그는 여전히 나를 형이라고 불렀고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습니다.

그 뒤로 몇 번 전화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88년 교정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예전 그대로였는데 난 너무 멀어져 있었죠.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었고 기쁠 때 함께 웃어주었던 그였고 그의 노래였는데, 난 그걸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기억은 했지만 모른 척 했습니다. 한 때 동지였던 사람들이 나를 벌레 취급하는 게 싫었고 그가 나를 그렇게 대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 뒤로 또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윤민석에게 달려가려고 합니다

김조광수 감독
 김조광수 감독
ⓒ 이종걸

관련사진보기


그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얼마 전이에요. 그의 아내가 암과 싸우고 있고 그 곁을 지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살리고 싶습니다." 트위터에 오른 그의 글. 그 글이 두려움에 비겁하게 그에게서 멀어졌던 나를 때렸습니다. 그가 내민 손에 많은 분들도 화답을 했습니다.

공연 연출을 하는 김정환은 '윤민석 음악회'를 열자고 했습니다. 9월 15일에 윤민석의 모교, 나의 모교인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윤민석의 노래를 부르자고 말이죠. 이제 나도 그에게 달려가려고 합니다. 그에게 진 빚이 누구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게 뒤돌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그에게 미안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받았던 위로, 용기, 행복의 10분의 1이라도 갚기 위해 달려갑니다. 못하는 노래지만 그에게 들릴 수 있게 노래도 힘차게 불러야겠습니다.

윤민석 음악회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 일시 : 2012년 9월 15일(토요일) 저녁 6시 30분~9시
○ 장소 : 한양대 노천극장
○ 출연진 : 윤민석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로 열려있습니다.
○ 홍보 : 윤민석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트윗과 페이스북 등으로 알려나갑시다.
○ 분위기 : 윤민석의 노래 부르며, 윤민석과 대화하듯, 사랑 넘치게.
○ 결과 : 윤민석을 사랑하며, 우리 모두를 사랑하며, 윤민석 후원금 많이 모읍시다.
○ 모금 방식 : 당일 공연장에서 모금과 인터넷 생중계를 통한 모금.

※ 페이스북에서 '윤민석음악회'로 검색하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조광수 기자는 영화 감독입니다.



태그:#윤민석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