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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과연 전·월세값의 고통은 해결될까
▲ 민주당의 홍보용 플래카드 과연 전·월세값의 고통은 해결될까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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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차] 없는 사람들끼리의 전쟁... 네팔 노동자가 온다고?

주인과 우리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가장 문제가 된 점은 '주인이 돈이 있는데도 안 주는가', 혹은 '돈이 정말 없어서 못 주는가'였다. 견디다 못한 우리는 결국 내용증명을 주인에게 보냈다. 주인이 압박을 받아 돈이 있다면 내놓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여기에는 법원에서 일하는 신랑 친구의 의견이 보태졌다. 대부분의 집 주인은 돈이 있으며, 없는 척하고 안 주다가도 무엇인가 서류로 된 것들이 날아오면 돈을 준다는 귀띔을 했기 때문이다.

내용증명은 여지없이 날아갔고, 그걸 손에 쥔 주인은 펄펄 뛰며 자기를 사기꾼으로 몬다고 난리였고, 우리도 지지 않고 우리 사정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되받아쳤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구경을 나올 정도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나서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애기 엄마, 빨리 올라와 봐요. 의논할 게 있어."

불편한 냉전이 지속되던 어느 날, 주인의 숨 넘어가는 듯한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이번에야말로 방이 나간 것인가. 일말의 기대를 안고 나 역시 숨 넘어가게 2층으로 올라갔더니 이번에는 옆집의 아가씨와 밑의 또 다른 반지하방 세입자까지 모두 와 있었다. 이건 또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기, 우리 비어 있는 반지하방 말이야. 거기 새로 사람들이 온다는데 먼저 통고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 반지하에 누가 온다니 주인으로서는 좋은 일이겠지만, 왜 모든 세입자들을 다 불러모았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온 내가 앉자마자 주인이 다급하게 전말을 쏟아내었다.

"사실 이런 거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 처지니까 말인데, 거기 네팔에서 온 노동자들이 들어오게 됐거든. 오늘 낮에 방보고 갔는데 좀 전에 살러온다고 연락이 왔어요. 한 여섯 명이 한꺼번에 방을 쓸 건가봐. 어때? 괜찮지? 요즘 이 동네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잖아. 당장 다음 달부터 온다는데, 너무 이상하게들 대하지 말고, 다 같은 이웃이니까 잘 좀 봐달라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잘난 '동정심'은 저만치 사라지고

옆집 아가씨가 "주여"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네팔 노동자라니. 안 그래도 방이 안 빠지는데 네팔 노동자가 여섯이나 들어오면 이 방이 빠지겠는가. 방을 내놓은 지 무려 2년이 넘어가는 옆집 아가씨는 아예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네팔. 나는 네팔에 가본 적이 있다. 결혼 전,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포카라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왔다가 손가락이 잘리고 얻어맞았다고 하는 네팔 사람들을 몇 명이나 만났던가.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분노하며 한국 사람들이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던 그 잘난 양심과 동정심이 지금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의 방 빼기 전쟁은 어떻게 될까. 점점 더 막막해지는 심정이었다. 나머지 하나의 반지하방 아주머니는 한밤중에 우리 집에 와서는 네팔 노동자들이 못 들어오게 막자고 했다. 무슨 수로? 그리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저 없는 사람들끼리 전쟁을 하고 있는 이 현실에서 나는 정말, 진지하게, 없는 사람들끼리 정으로 뭉쳐 사람 냄새 풍기며 살 수 있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였다. 분명히 이 동네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전세값이 하룻밤 사이에 천정부지로 뛰고 역전세 대란이 일어나는 것은 서민의 잘못이 아니다. 농간을 하는 그 누군가는 아마도 잘 살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 없는 사람들끼리 원수가 되어 싸우고, 이주노동자를 못 들어오게 할 방법을 고안하는 중이라니. 이전까지 믿어왔던 가치관이 무너진 자리에는 오로지 돈만 남은 것 같았다. 그날도 불면의 밤이었고 신랑과 나는 또 소줏잔을 기울였다.

나는 오기가 났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아이와 떨어져 지낸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이렇게 가다가는 인간성도 망칠 것 같았다. 그날부터 인터넷을 뒤졌다. 안 빠지는 방을 빼기 위해 누구는 경품을 걸었다고 하고 누구는 진짜 소송을 걸었다고도 했다. 우리는 일단 가구를 옮겼다. 언젠가 집을 보러왔던 사람이 했던 말, 집이 좁고 어두워 보인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집이 넓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문짝을 다 떼어 뒷담 옆의 보일러실에 처박아 넣었다.

좁은 복도에 놓아두었던 냉장고를 작은 방으로 옮겨 복도가 넓어보이게 했고 현관에 가득 찬 신발은 신발장을 사서 대문 밖에 놓아두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과감하게 침대를 치웠다. 분리된 침대를 양평의 친정집에 보내는 데만 꽤 많은 돈이 들었다. 그뿐이랴. 낡고 낡은 싱크대를 우리 돈을 주고 교체하기까지 했다. 주인이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애기 엄마, 방 빠졌어요"... 여관 잠을 자더라도 나간다!

모두가 조금씩 더 행복해지는 사회, 아직도 꿈꾸고 있다
▲ 고물을 줍는 노인 모두가 조금씩 더 행복해지는 사회, 아직도 꿈꾸고 있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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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었다. 우리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가 하는 나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주인의 숨 넘어가는 듯한 전화가 또 걸려왔다.

"애기 엄마, 방 빠졌어요. 빨리 올라와봐."

이번에는 진짜였다. 단, 조건이 황당했다. 1주일 만에 방을 빼주면 즉시 들어오겠다는 것이다. 1주일 만에! 그동안 부지런히 대전을 왔다갔다 했지만 아직 이사갈 곳을 정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1주일 만에 이사를? 그러나 몇 년 만에 온 호기임은 틀림없었다.

"중년 여잔데 이혼했데요. 당장 딸을 데리고 살 곳을 찾는데, 마음이 급한 거야. 여기가 1주일 만에 방을 빼주면 여기로 오고, 아니면 다른 데 반지하라도 가겠다고 그러네. 어때, 할 수 있겠어?"

주인도 우리와의 이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역력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밤샘 회의를 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우리의 살림은 짐을 맡아주는 보관소에 맡겨두고, 당장 필요한 살림살이만 꾸려 어머님 댁으로 들어가기로. 서울의 일을 정리할 때까지는 대전에서 KTX로 출퇴근을 하고 정 안 되면 여관 잠을 자기로 말이다. 회의는 끝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섭게 짐 보관소에 연락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 새벽, 우리의 짐을 실을 차가 도착했다.

"에구, 좋겠다. 어떻게 방을 뺐어? 나도 1년이 넘도록 안 나가는데."
"정말 부럽네요. 전 어떡해요? "
"이 동네에서 방 빠지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보네. 좋겠다."

옆집 아가씨와 다른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짐을 쌌다. 그 와중에 어떤 동네 아저씨가 한탄조로 한 말이 귀에 와서 박혔다.

"돈이 좋다, 돈이 좋아. 포장이사 하니까 이렇게 좋네. 나는 이사를 열 몇 번을 다녔어도 평생 포장이사라고는 해본 적이 없어. 이사할 때마다 그놈에 박스 줍고 바구니 얻으려고 며칠씩 돌아다니고 짐 싣느라고 온몸에 골병이 다 들었는데, 이렇게 포장이사 하니 얼마나 좋아? 다음 번에는 빚을 내더라도 포장이사 꼭 해야지."

가난은 조금 불편한 것일 뿐? 그런 말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집주인은 새로 이사 오는 사람에게 신나게 집 자랑을 하고 있었다.

"봐요, 여기 젊은 부부도 잘돼서 나가는 거야. 아파트 한 채 떡하니 사가지고 간다니까. 우리 집에 오면 이렇게 다 재수가 좋아요. 아줌씨도 잘 들어오시는 거야."

주인의 거짓말에 기가 막혔지만 우리는 그저 못 들은 체했다. 주인들의 뻔한 말장난임을 다 알더라도, 처음 이사 오는 사람들은 이 집에서 뭔가 더 행복한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집터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나도 모르는 어떤 집귀신이나 터줏대감이 나의 어려운 삶을 동정하여 기가 막힌 운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누군들 없을 것인가. 아아, 부디 우리가 떠난 자리에 오는 사람이 좀더 행복해지기를. 그리고 우리가 정착할 곳에서 우리 역시 조금만 더 행복해지기를. 그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집주인에게도 마음으로 화해의 악수를 청하며, 우리는 그렇게 그 동네를, 서울을 떠났다. 

5년 정도만 죽어라고 돈을 벌어보자고 했던 그날의 다짐은 불행히도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죽어라고 돈을 버는 날의 종말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가난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말도 믿지 않는다.

대신, 오래 전에 이미 맹자가 했던 말을 믿는다. 백성들은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는 그 말을.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항산(恒産)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 해온 것인가. 그렇다고 믿고 싶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항심(恒心)이 어떤 것인지 이제 가물가물해졌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다. 아직도 남아 있는 삶에 대한 의문부호 속에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 기다린다고 믿고 싶다.

혹시 이번 대통령 선거가 아주 잘되면, 그렇다면 항산(恒産)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열릴까. 길고 긴 다세대주택의 행렬들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어떤 삶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상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에 응모하는 글입니다



태그:#사는 이야기, #세입자, #역전세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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