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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혁명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국부(國父)'가 되기를 원하며 자신의 '우상화'에 열을 올렸던 늙은 독재자 이승만은, 민중의 힘에 의해 하와이로 도망가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2년. 이제 시대는 이승만이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을 휘두르던 1950년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니, 상상을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동안 한국은 여러 부분에서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에 따라 사회는 훨씬 복잡해졌고, 세분화되었으며, 다원화되었다. 1950년대는 반공이데올로기 하나로 정적(政敵)도 제거할 수 있고, 사회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 사회와 시대는 그런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래서 이승만은 비록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제 그 이름조차 잘 모를 미미한 존재가 되어가는 듯했다.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그리고 2012년 지금, 우리는 대선이라는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 대선은 새로운 정권 창출의 계기인 동시에 그 전 정권의 행적이 '역사화' 됨을 의미한다. 이명박 정권도 이제 곧 그런 과정을 밟게 된다. 즉,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 이제 우리는 이를 고민할 시점에 와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승만이라는 과거 시간 속에 묻힌 존재를 다시 끄집어내야만 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왜? 이명박 정권 5년사에서 보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이 이승만과 유사하다는 점을 여러모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21세기 국가 통치자의 리더십이 1950년대 늙은 독재자의 그것과 유사할 수 있을까. 참으로 의문스럽기만 했다. 시대도 변했고 사람도 변했고 환경도 변했다. 그런데 최고통치자의 리더십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던 것이다. 놀라움을 금치 못할 수밖에.

이명박식 유체이탈화법의 원조, 이승만

이승만 전 대통령 (자료사진)
 이승만 전 대통령 (자료사진)
ⓒ 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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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을 박장대소하게 만들 때가 있다. 바로 그가 일명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할 때다. 유체이탈화법은, 대통령 본인이 저지른 일이 분명한데도, 정작 그 자신은 '유체이탈' 상태가 되어 전혀 그 일과 관계없다는 투의 화법을 이른다. 우리네 언어 중에 '얼굴에 철판을 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그런 화법이 유체이탈화법이다. 이 화법의 본질은 한마디로 무(無)책임(혹은 책임회피)과 무(無)반성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유체이탈화법은 여러 사안에서 발휘된 바 있다. 특히 내곡동 사저 논란이 불거졌을 때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사저문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돼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은, 유체이탈화법의 절정판이었다. 도대체 본인이 퇴임 뒤 머물 사저 문제를 '본의 아니게' 추진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는 것인가. 그리고 이 발언 속에는 "사저 문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된 것"에 대한 사과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게 생각한다"라는, 모호한 표현만이 들어 있다. 전형적인 책임 회피이자 반성이라고는 털 끝 만치 없는 태도이다. 여기서 유체이탈화법의 본질이 드러난다.

또 서서히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문제가 터져 나올 무렵, 이명박 대통령은 현 정권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자화자찬한 바 있다. 이 역시 곧이어 대통령 본인, 아들, 형, 측근의 비리 및 부정부패가 줄줄이 밝혀지면서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누리꾼들은 "도둑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풍자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두 건의 유체이탈화법을 선보였다. 올 여름 초, 브라질로 날아간 이명박 대통령은 어느 연설 자리에서 "4대강 사업으로 홍수와 가뭄 모두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그런데 하필 이때는 전국적으로 극심한 가뭄이 들어 농민들이 애가 타던 시기였다. 이어 몰래 추진하던 한일군사협정이 들통 난 직후에도 특유의 유체이탈화법은 또 한 번 발휘됐다. 중남미 순방에서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 협정의 추진을 강하게 질책했다.

이 대통령은 "도대체 (국무회의) 긴급 안건 상정은 누구의 발상이냐"라고 따지며 자신은 이 협정의 진행 과정에 대해선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참으로 가당찮은 '발뺌' 이었다. 이런 중요한 협정을 진행하면서, 그 협정의 진행과정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는다면, 이미 그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닌 것이다. 정부 내 보고 체계에서 무시되는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성난 국민들은 이 소식에 더욱 분노했다.

이처럼 그의 유체이탈화법은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비논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체이탈화법은 이미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선보인 바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승만은 4월혁명으로 하야할 당시 담화에서 "3.15선거가 많은 부정이 있다 하니"라고 말했다. 자신이 사실상 부정선거의 총책임자였으면서 마치 자신은 부정선거와 전혀 관련 없다는 투의 화법이었다. 갖가지 방법의 부정으로 진행된 3.15선거에 대해 자신은 책임질 일도 없고, 반성할 일도 없다는 식이었다. 당시 3.15부정선거 계획은 이미 선거 전부터 신문 지상에 보도되어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도 이승만 자신은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호도했던 것이다. 이명박과 똑 닮았지 않은가.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무책임성은 꼭 이와 같은 '유체이탈화법'으로만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무책임성은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한껏 발휘됐다.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이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이 전쟁발발 이틀 뒤 서울시민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말하며 그 자신은 정부요인도 모르게 서울을 빠져나와 대전으로, 목포로, 부산으로 달아났다. 대통령의 말에 서울시민들도 속았고 국회의원들도 속았다.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이승만의 이와 같은 태도는 국가지도자로서 그의 무책임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명박 정권 역시 무책임하기로는 이승만 정권을 뺨칠 정도다. 이명박 정권은 지난 5년 내내 논란이 되는 주요 사안마다 참여정부 탓만 했다. 심지어 민간인 불법사찰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참여정부를 걸고 넘어졌다. 이는 진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결코 자신의 책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대통령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하무인격의 인사스타일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인사스타일에서도 비슷한 면을 보여준다. 두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은 한 마디로 '안하무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이런 방식의 인사를 단행하고 있다. 각계각층에서, 심지어 여당조차 반대한 현병철을 국가인권위원장으로 또 한 번 임명 강행한 사례는 대표적이다.

지난 5년 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과 연줄이 있는 '범죄자'들을 정부의 주요 요직에 앉혔다. 야당이나 언론에서 아무리 그 인사의 문제점과 편향성을 지적해도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다. 논문 표절,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혐의는 차라리 예사였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강행한 측근 인사들을 연임시키거나, 원칙을 어겨가며 다른 자리로 돌리는 식의 회전문 인사가 판을 쳤다. 특히 2010년 말에 단행된 이명박 정부의 인사 개편은 임기 후반의 정국운영방식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으나 이 역시 이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식'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경향신문>은 사설에서 "측근들을 요직에 포진시킴으로써 반대 목소리를 억제해 마지막까지 절대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대통령의 뜻"(2011. 1. 2일자)이라고 비판했고, 이어 며칠 후 내보낸 기사에선 이 대통령의 인사 방식이 "국민 정서나 도덕성·자격 논란을 무시하고 충성도 위주의 측근 중용과 돌려막기식 인사를 반복하는" 특징을 지닌다고 지적했다.(2011. 1. 10일자) 뿐만 아니라 촛불집회와 용산참사를 비롯한 현 정권의 '위기(?)'를 막아낸(?) 인물들에게는 어김없이 승진과 영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물론 이는 주로 검찰, 경찰을 비롯한 사법 계통의 자리에 해당됐다.

이승만 역시 이런 태도에선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부패와 주민들에 대한 억압이 일상화된 친일 인사들을 측근으로 삼고 요직에 중용했다. 이 과정에서 인사의 원칙이나 기준은 없었다. 단지 이대통령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이면 됐다. 그렇다보니 이승만 정권기의 공직 기강은 대단히 문란했다. 여순사건 당시 일본도를 휘두르며 주민들을 학살한 김종원, 일제시기 만주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밀정 노릇을 한 김창룡, '최후로 써먹을 총알'로 불리며 3.15부정선거를 일선에서 지휘한 최인규, 그 외 '낙루(落淚, 눈물)장관' 신성모, 일제시기 경찰서장을 지낸 이익홍과 같은 아부꾼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고,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이에 더해 이승만이 임명한 장관과 자유당 간부들의 부정부패와 권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이승만에게 끊임없이 아첨하며 그의 권력을 떠받쳤다.

이런 인사방식에 대해 이승만은 스스로 "왜정시대에 악질적 해악을 저질렀다고 해도 지금 잘 하는 일이 있으면 애국자"라고 말했다.(서중석,「이승만과 3·15부정선거」,<역사비평>2011 가을, 26쪽 참조) 이승만의 이런 사고는, 인사 후보자가 도덕적으로나 자질 면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음이 드러나도, 그 인물이 실력 있고 전문성 있는 적격 후보라며 임명을 강행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논법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또 이승만은 1951년 국회에서 이른바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신성모 국방장관 등 관련 책임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참다못한 이시영 초대부통령은 사표를 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히려 국회의 거창양민학살사건 조사를 방해한 김종원은 훗날 이승만에 의해 여러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이명박식 '회전문 인사'의 원조였던 셈이다. 이처럼 "장관이 큰 잘못을 저질러 야당이나 언론이 아무리 인책을 요구해도 쉽게 들어준 적이 없는"(서중석, 윗글, 14쪽 참조) 이승만 특유의 인사 방식 역시 이명박 대통령과 똑 닮았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국민의 항거를 대하는 태도

이명박 정권과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항거를 대하며 보여주는 공통적인 현상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는, 국민의 항거 배후에 '음모'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이고, 둘째는, 국민의 항거 배후에 자신의 정적 혹은 정치적 반대파를 얽어 넣는 수법이며, 셋째는, 정권에 항거한 국민을 향한 반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 격분해 마산에서 제일 먼저 시위가 일어나고, 이어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4월혁명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를 접한 이승만은 마산시위에 대해 '철없는 아이들을 앞장세워 부린 난동'으로 규정하고, '폭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를 '법대로 다스려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14-15)

2008년 봄, 이른바 '광우병 파동'으로 촛불집회가 연일 지속됐다. 그러자 당시 한나라당은 촛불집회의 배후에 '불순세력(친북좌파)'이 있으며, 이들에 의한 '선동' 내지 '음모'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며 야권과 시민사회를 몰아붙였다. '공산당'에서 '불순세력' 혹은 '친북좌파'로 용어만 조금 바뀌었을 뿐, 50년 전이나 2008년이나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2008년 5월 6일 국무회의에서 당시 국무위원들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촛불문화제를 특정세력의 사주에 의한 철없는 행동으로 규정했다. 이승만이 마산시위를 '철없는 아이들을 앞장세워 부린 난동'이라 규정한 것과 참 똑같다. 그리고 촛불집회 사태 이후 이명박 정권은 이른바 '법치(法治)'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 역시 이승만이 마산의 시위를 '법대로 다스리라'고 한 것과 동일하다.

한편, 1948년 여수, 순천지역에서 이른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여수 순천 일대를 담당한 국방경비대 재14연대의 반란에서 시작됐지만, 실제로는 당시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이승만 단독정부 및 친일세력에 대한 민중적 반발과 불만이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은 전혀 엉뚱하게도 그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김구는 당시 이승만 최대의 라이벌이자 정적이었다. 이는 그러한 김구를 이 사건의 배후에 얽어 넣음으로써 그를 정치적으로 탄압하겠다는 음모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태도 역시 이명박 정권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이명박 정권은 2008년 촛불집회 및 인터넷에서 진행된 이명박 탄핵 운동의 배후로 노무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옛 참여정부 인사들을 지목했다. 하지만 촛불집회는 어디까지나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한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지, 참여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후 이명박 정권은 과거 참여정부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해선 광범위한 사찰과 조사를 행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방영된 <PD수첩>에서 밝힌 바 있다. 민간인 김종익씨 사찰 역시 이런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후 이어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결국 촛불집회를 현 정권에게 가장 위협적이라 생각한 정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항거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은 점 역시 두 대통령의 공통점이다. 이승만의 경우 앞에서 본대로 사퇴 성명에서 3.15부정선거에 대해 국민에게 전혀 사죄하지 않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촛불집회 당시에는 두 차례나 대국민 사과를 표명했으나 2년 뒤 안면을 싹 바꾸어 촛불집회는 유언비어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심지어 당시 사태의 진상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정부기관에 지시까지 하였다.

'반일(反日)'을 활용한 지지율 결집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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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그동안 이명박 정권에게서 볼 수 없던 현상이 새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반일(反日)'이다. 그동안 이명박 정권은 '뼛속까지 친일친미'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심지어 일본과 군사협정을 추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깜짝 방문하더니 일본에서 '신격화'되어 추종 받는 천황을 직접 겨냥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현재 이를 계기로 한일 간의 외교 분쟁이 장기화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180도 달라진 대일정책'은 국내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즉, 추락할 대로 추락한 지지율을 다시 결집시키고,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에 대한 강경태도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과 군사협정을 맺으려던 대통령이었으니, 이런 혐의는 충분하다. 실제 이명박 대통령의 이런 행보 이후 바닥을 찍었던 지지율은 다시 상승했다고 한다. 국민의 반일감정에 영합해 임기 말 지지율 회복과 존재감 과시 효과를 동시에 누린 것이다.

이 점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이승만 정권기에는 북진통일운동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 1950년대 당시 학생들이나 시민들은 시시때때로 북진통일 집회에 동원됐다. 하지만 당시 북진통일 집회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기간 내내 대일강경책을 고수했고, 반일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1958년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자 이런 태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사실 당시는 해방된 지 불과 10년 정도 지난 시기였으니 이런 행보는 어느 정도 이해할 만도 하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대일강경책을 국민의 반일정서에 기대 국내정치적 목적에도 활용했다. 곧, '방일(防日)' 집회를 대대적으로 열고 여기에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한 것이다. 그래서 '반공방일'은 이승만 정권이 표방하는 상징이 되었고, 이를 통해 국민들을 이승만을 중심으로 결집,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이승만 정권 내부에는 친일파가 활개를 쳤다. 앞서 든 이승만 정권기의 몇몇 인물들은 모두 친일파 출신이었다. 이명박 정권 역시 비슷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오랜 기간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을 지냈고, 이후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되어 한일군사협정을 추진한 김태효는, 다 알다시피 일찍부터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 유사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지난 2009년 제5회 나카소네 야스히로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역사는 과연 반복 되는가

지금까지 이명박과 이승만, 두 대통령에게서 나타나는 유사성들을 제시해보았다. 물론 이외에도 양자 간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더 있을 수 있다. 다만, 두 대통령의 리더십을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2011년, 경기도의 한 역사교사가 다음과 같은 시험 문제를 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보기>
(A)은 △교회장로입니다.
         △대표적인 친미주의자입니다.
         △친일파와 손잡았습니다.
         △정적을 정치적 타살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북한을 자극해 결국 도발하도록 조장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사고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니까 경찰을 앞세워서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러다가 권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해외로 망명하더니 그곳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됩니다.

문제 : 이 글에서 (A)에 해당하는 대통령 이름을 쓰시오

이 문제를 접한 학생들 가운데 일부가 답안에 '이명박'이라고 썼고, 이를 해당 교사가 트위터에 올리면서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한 쪽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이자 편협한 시각이라 비난했고, 한 쪽에서는 역사적 사실이 그렇다며 옹호했다. 어쨌거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처럼 이명박과 이승만 대통령 사이엔 공유되는 부분이 참 많다는 사실일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승만은 '권모술수'에 능했고, 이명박은 '꼼수'에 능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는 두 인물이 권력 있고 힘 있는 자는 무슨 짓이든 저질러도 괜찮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하는 21세기에 사실상 이승만의 재림(再臨)을 보았다. 그런데 이제 곧 또 한 명의 독재자, 박정희의 재림을 볼 시간도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그야말로 기막힌 역사의 반복이 아닌가.


태그:#이명박, #이승만, #인사방식, #국민의 항거, #유체이탈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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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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