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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게다가 그 죽음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애틋한 갈증이 더해져서 남은 자들에게 더욱 각별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는 자살하던 날 저녁에도 전혀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한다. 가족들과 TV 보면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마감했고, 다음날 아침에 자택 실내 난간에 목을 매고 죽은 채 발견됐다 한다. 그 죽음에 관해서는 분분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대중에겐 요절한 천재 가수 김광석으로 기억될 뿐이다.

가수 김광석 벽화
 가수 김광석 벽화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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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대구 수성동에 김광석을 기리는 골목이 있다. 작은 골목 하나만이 아니라 방천시장 전체가 김광석을 기리는 공간으로서, 익살스럽거나 혹은 그윽한 감성을 가진 벽화들 안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 시장 한 켠에서 전파사를 하던 아버지의 재롱둥이 아들로서 잠시 살았던 대구를 알리며, 김광석은 오늘도 방천시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김광석 보리밥집', '김광석 건어물전' 등 이 시장 많은 상인이 '김광석'이란 브랜드를 걸고 장사를 한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의 이름을 내건 보리밥집에는 마실 나온 노인들이 막걸리 한 사발을 앞에 두고 혼자 낮술을 하기도 하고, 손님 없는 건어물전에는 길고양이들만 호시탐탐 처마 밑의 북어를 노리고 있다.

'셋방 있음', '개조심' 같은 정겨운 글들이 써진 종잇조각이 붙은 대문. 그 앞에선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노인들이 평상에 앉아 삶의 타래를 풀어내기 바쁘고, 시장 안 빈 점포들을 빌려 작업실을 꾸민 작가들은 문을 꽁꽁 닫아걸고 어딜 출타한 것인지 보이질 않는다.

골목길 저 너머론 고층아파트의 정수리가 불끈 솟아있지만 이 골목만큼은 여전히 과거를 간직한 채 멈춰 섰다. 최근에는 선진국의 전통시장 활성화 대책을 모방해서 화가들에게 작업실을 무료 임대해주고, 그 혜택을 입은 이들은 시장 상인들과 공동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한마디로 상인과 작가들이 시장이란 거대한 도화지 위에 창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시장 자체를 하나의 설치작품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두드러지지만 그 무엇보다 '김광석 벽화 골목'에 기울이는 애정이 가장 돋보인다. 그 중 상인들의 젊은 시절과 김광석의 사진을 섞어 걸어둔 '김광석 길'은 전국의 아마추어 사진사들이 모여드는 명소가 됐다.

상인들 젊은 시절과 김광석 사진 건 '김광석의 길'

대구 방천시장
 대구 방천시장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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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걸린 자신의 사진이 부끄럽다는 보리밥집 여인. 그저 '현이 엄마'라고만 밝혀줬더라면 하고 얼굴을 붉힌다. 김광석과 동갑이라 더 각별하다는 그녀는 찾아든 노인들에게도 얼마나 살뜰한지, 수박 한 쪽이건 김치 한 쪽이건 살갑게 권하며 정을 낸다. 대통령 내외가 그들에게 보낸 '여러분, 힘내세요'라는 글귀가 무색해질 정도로 가게 안엔 정이 넘쳐난다.

그 시절,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부르며 청춘들은 삶을 이야기했다 한다. 지독히 광활한 그 숲에서 때론 젊음에 겨워 헤매고, 때론 자신만을 비춘다고 여기는 황홀한 별빛을 따라 너나 할 것 없이 그 고통의 숲을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이윽고 격렬한 숨 한 번 들이쉬고 나자 머리 희끗한 장년이 되어 지금에 섰다는 것이다. 지난 시절 자신의 아픔과 함께 한 김광석이기에 그리움으로 기억할 것이란 말을 덧붙이며, 여자는 먼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가수 김광석 동상
 가수 김광석 동상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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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영화 <첨밀밀>이 떠올랐다. 장만옥과 여명이 타국 생활의 힘겨움에도 굴하지 않은 데에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국민가수 등려군의 노래였다. 타국에서 서럽게 돈을 벌면서도 그들 마음 한 켠에는 굳건한 한 사람의 영웅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다가갈 순 없지만 언제나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의 곁에서 그는 노래 부르고 있었다. 라디오건 티비건 어디서건. 그리고 영웅의 죽음과 자신의 고난을 동일시하며 그 가련한 이들은 울고 힘겨워했다.

떠나간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영원히 그 나이 그대로, 살아생전 보다 더 거룩한 이름으로 새로운 역사를 얻을 뿐이다. 그리고 요절한 가수 김광석은 대구 방천시장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중이다.


태그:#김광석, #방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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