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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나는 매년 몇 편, 희곡 속의 인물로 연극 무대에 오른다.

울고 싶을 울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울고 싶을 울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 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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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는 일은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는 일이다. 내 배역의 인물로서 그 인물과 맺어진 또 다른 연극속의 인물들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고, 그 연극을 준비하는 두어 달 동안의 연습에서 만나는 현실속의 인물들과 관계 맺는 일이기도하다.

매번, 무대 위에서는 '신들린 배우'로, 무대 아래에서는 '신명난 동료'로 임하고자 마음을 다잡지만 팽팽하게 시위가 당겨진 활처럼 날선 감정을 뜻대로 조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는 누구나 삶이라는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때로는 누구나 삶이라는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 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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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성의 활이 켕기어 좀처럼 느슨해지지 않은 시간들과 씨름하면서 생각했다. 내 감정의 소비들을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의 안위를 대신 걱정해줄 소속회사가 있는 것도 아닌 무명배우의 메마른 감정에 윤기를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서는 상처받지않은 것처럼...
 여행지에서는 상처받지않은 것처럼...
ⓒ 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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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구성하는 두 요소. 배우와 관객.

"그래! 나는 이번에 배우가 아닌 관객이 되어보는 거야!"

그날 나는 파리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리고 그 항공권의 용도에 대해 나는 '무명배우의 나 홀로 연수'용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여행기는 지난 6월 5일부터 7월 19일까지, 45일간 유럽 길 위에서의 나 홀로 연수의 기록이다.

누구에게 초대장을 받은 것 처럼 불쑥 일상으로부터 떠나라
 누구에게 초대장을 받은 것 처럼 불쑥 일상으로부터 떠나라
ⓒ 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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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행선지는 바람에 맡겨라"

두 달 전에 예약해놓은 티켓의 출발 날짜가 다가오는 걸 느끼면서 굉장한 기대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함께 밀려왔다. 인터넷을 뒤지고 친구들에게 수소문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오랜 준비를 통해 루트를 확정짓고 그에 따른 이동수단을 결정한 다음, 티케팅까지 마치고 숙소를 예약한 뒤 출발한다는 걸 알았다.

항상 그렇듯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부모님께 여쭈어보는 법. 아빠에게 물었다.

"네가 한 달 내내 한 나라, 한 도시에서만 지낸다 해도 그곳에서 경험하는 게 많을 것이다. 다른 나라 문화를 접할 때,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그들의 삶에 뛰어들어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유명하기 때문에 깃발 꽂듯 들러서는 안 된다. 예약으로 스스로를 구속하지 마라. 우연히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며 네가 하고픈 대로 자유롭게 다녔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네 행선지는 바람에 맡겨라."

때로는 길을 잃어도 좋다
 때로는 길을 잃어도 좋다
ⓒ 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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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여행지에서 발걸음을 이끄는 것은 바람이어야 한다며 치밀한 여행준비를 오히려 만류하셨다.

"옳다구나!"

이렇듯 '준비 없는 여행'을 강조하는 아빠의 충고를 위로 삼아 나는 아무 준비 없이 떠났다.

준비없이 떠나다
 준비없이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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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물들고 싶다

끝난 지 얼마 안 된 연극의 후유증, 출발 전날까지 있었던 촬영과 나의 게으름 탓으로 미뤄놓았던 환전과 유레일패스 구입을 한나절에 모두 마치고 짐을 싸느라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이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은 달콤한 잠으로 긴 비행시간이 지루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눈을 뜨니 샤를드골공항이었다.

파리에 있던 동생, 주리에게 받은 정보는 파리 시내 '동역(Gare de l'est)'으로 와서 전화 달라는 숫자뿐이었다. 나의 여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리라 믿었던 시작은 공항에서부터 날 흔들어 놓았다. 시내로 나오는 길을 한참을 헤매다 4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주리를 만난 것이다. 한 시간이면 충분할 거리를 4시간이 걸리다니…. 알려준 대로만 믿고 가면 되는 걸 그것을 의심해서 탈이 생겼다.

낯선 곳의 지하철
 낯선 곳의 지하철
ⓒ 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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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으로 공연이나 일로 갔었던 경험들 때문에 뭐든 다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 홀로였고, 영어권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프랑스 말이 나를 둘러싸고 이질감과 긴장감이 증폭되었다. 완벽하게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동역에서 주리를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일 년 만에 재회하는 기쁨도 있지만,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공간에서 혈육을 만나니 구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짐을 숙소에 놓고 바삐 나왔다. 주리는 이게 바로 파리지앵이 사는 모습이라며 이리저리 자기 은행 업무를 보러 데리고 다녔다. 나는 어떨 수 없이 파리지앵을 자처하는 동생의 사사로운 일에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 동안이나 달려 다녀야 했다.

내가 보는 파리의 풍경들은 영화에서 보았던 익숙한 유럽의 모습들이 많아서인지 어느 건물이나 공간을 보면 특정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캠코더를 가져왔어도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에게 일상적인 풍경들이 나에겐 일상적이지 않게 다가오는 것처럼 파리가 가지고 있는 혹은 다른 나라들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담아가면 내 작업에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낯선 곳에서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나를 느낀다.
 낯선 곳에서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나를 느낀다.
ⓒ 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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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일을 보는 주리를 기다리며 카페 노천에서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명 한 명 유심히 살폈다. 그들에게 익숙해져서 이방인의 생소함을 떨치고 싶었다.

수많은 인종들이 고루 섞여서 수많은 빛깔의 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각각의 색깔들에 물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행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파리의 카페. 드디어 일상과 멀어졌다.
 파리의 카페. 드디어 일상과 멀어졌다.
ⓒ 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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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유럽배낭여행, #나홀로연수, #이나리,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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