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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원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고, 상(기자 주:정조)이 이르기를 '심인과 정윤교를 들어오게 하라'.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이부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 종기자리가 어떠한지 궁금하므로 경들을 부른 것이다."(정조 실록 24년 6월 25일)

정조는 즉위 초부터 재위 기간 내내 크고 작은 종기 때문에 고생을 했고, 결국 종기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특히 여름에는 종기로 고생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위 실록에 적힌 날짜인 음력 6월 25일은 요즘과 같은 더운 때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에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하다가 훗날 종기 때문에 죽은 정조의 삶이 비참하고, 측은하게 와 닿는다.

해박한 의학지식 갖고 있던 정조를 죽인 건...

<조선,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겉표지
 <조선,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겉표지
ⓒ 시대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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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정조 24년'은 정조가 죽은 1800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조는 실록 속 날짜 그 며칠 뒤인 6월 28일에 죽는다. 즉위 초부터 걸핏하면 발생했던 종기가 그해 여름에도 생겼고, 종기가 발생한 지 24일 만에 죽고 만 것이다.
정조는 의학에 상당한 지식과 식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유의(유학자로 의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진)인지라 종기가 발생하면 자신의 증상을 신하들에게 말하고, 어떤 약을 처방하는 것이 좋을지 토론했다고 한다. 그해 여름, 종기가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800년 여름, 정조는 고통스러운 종기와 싸우는 한편, 일련의 신하들과 팽팽하게 대립한다. 어느 해 여름에 인삼 5푼이 들어간 육화탕 3첩을 먹고 겪은 부작용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은 인삼과 맞지 않으니 인삼이 들어간 약은 처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극구 반대한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끊임없이 인삼이 들어간 약들을 추천했다. 결국 정조는 인삼이 들어간 '경옥고'를 먹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 뒤 신하들은 더욱 많은 인삼 성분이 들어간 '팔물탕'과 '가감내탁산'을 정조에게 먹였고, 그는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만다.

"경들은 의술에 밝은 자를 두루 찾아 반드시 오늘 안으로 당장 내 병에 차도가 있게 하라. 나의 병세가 이러하여 백성과 나라의 일을 전혀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나, 일마다 관심이 있는 것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아 이따금 꿈을 꾸기도 한다."(정조 실록 24년 6월 23일)

"이러한 와중에 국사를 처결하기가 어렵지만 호남 수령들에 대한 포폄(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의 장계는 당장 뜯어보지 않을 수 없으니, 당직 승지로 하여금 와서 기다리게 하라"(정조 실록 24년 6월 23일)

정조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이끈 종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아프기 때문에 백성들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함을 지극히 미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꿈속까지 나타났을까 싶다.

정조의 죽음 뒤 조선에 일어난 만신창이와 같은 역사를 배운 후세인으로서 '정조가 10년 만 더 살았더라면 우리의 조선 후기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조선 역사를 뒤흔든 종기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는 종기를 통해 만나는 조선의 역사 그 한 부분을 담고 있다. 저자 방성혜는 한의사로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한의학 관련 논문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면서 우리 한의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의학자다. 그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종기를 둘러싼 조선의 치열한 질병사를 들려준다.

내가 어렸을 때(1970년대)만 해도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은 가정 상비약일 정도로 흔했다. 종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약을 붙여 독소를 빼내고 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새살이 돋을 정도로 쉽게 나았다. 물론 모든 종기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종기는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는 동전만한 고약으로 어느 정도는 다스릴 수 있었던 병이라 걸핏하면 종기로 고생하다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정조가 죽었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에 따르면 조선의 27대 임금 중 12명이 종기를 앓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종기 때문에 고생한 임금이 있는가 하면 종기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사망에까지 이른 임금들도 여럿이다.

종기로 고생하는 동안 임금은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한다. 또, 종기로 임금이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 왕위 계승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왕세자에게 왕좌가 넘어가 정치적 혼란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문종(제5대)의 죽음 후 세조(제7대)가 일으킨 피바람이다.

문종은 병약한 임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책은 문종이 등창에 걸린 세종 31년까지 병에 걸렸다는 어떤 기록도 없음을 근거로 '원래는 건강했지만 등창, 즉 등의 종기 때문에 건강이 쇠락해 죽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종기가 우리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어의, 임금의 종기를 치료하지 못해 죽기도

정조 임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소재.
 정조 임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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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임금을 죽게까지 한 종기지만 치료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궁중에 속한 의원(어의 등)이든, 민간에서 백성들을 주로 치료한 의원이든 종기 치료에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종기는 오늘날의 암과 같은 비중으로 크고 작고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종기와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치료 방법들이 등장한다. 또한 종기 치료에 특출한 의원들도 생겨난다. 조선시대 종기치료 전문의를 치종의라 불렀는데, 종기가 흔하면서 무서운 존재인 만큼 종기치료를 잘하는 의원들이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또한 임금의 종기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해 임금의 죽음과 함께 죽는 의원도 생겨난다.

"이 땅의 백성들을 종기가 괴롭힌 세월이 500년, 아니 1000년이 넘었는데, 놀랍게도 이 종기가 사라지는 데는 단지 50년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체 왜 21세기에는 종기가 잘 생기지 않는 것일까? (…) 종기는 지금도 여전히 생기고 있으나 그 종류가 바뀌었다. 겉으로 터지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종기는 외옹이라고 한다. 반대로 오장육부에 생겨서 보이지 않는 종기는 내옹이라고 한다. 지금은 주거 환경의 개선으로 외옹의 빈도가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인체 내부의 불균형에서생기는 내옹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만성화된 종기, 곧 음적인 종기 역시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내옹 중에서 음적인 종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암이다. 또한 고름의 형태도 바뀌었다. 종기가 생긴 곳의 꼭대기 부분에서 노란색으로 끈적하게 나오던 고름은 이제 넓은 환부에서 만연히 퍼져 나오는 진물로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아토피성 피부염이다.

21세기는 암의 시대, 아토피의 세계다. 종기의 성질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셈이다. 종기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종기는 단지 그 가면만 바꾸어 썼을 뿐, 여전히 우리 곁에서 으르렁 거리고 있다."(<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마치는 글에서)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는 오늘날의 '암'과 같은 비중으로 조선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한, 한 사람의 일생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모자라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 종기에 얽혀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 성종, 종기와 대장암으로 죽다 ▲ 꽃미남 외모를 망친 연산군의 얼굴 부스럼 ▲ 화병과 눈병, 뺨의 종기 등으로 고생한 광해군 ▲ 아들의 병을 걱정하다 자신의 종기를 놓친 효종, 병을 알린지 7일 만에 죽다 ▲ 병을 달고 살았던 현종의 여러 부위의 종기들 ▲ 하복부가 지저분했던 숙종? 간경화로 죽다 ▲ 고통 속에 살다 고통 속에 죽은 인현왕후의 사인은 종기의 독이 입심(入心)한 것 ▲ 마음이 더 병들었던 경종, 종기에는 분노를 경계해야 ▲ 조선의 역사를 바꿔버린 정조의 종기, 정조를 죽인 것은 종기일까? 인삼일까? ▲ 쓸개가 정조의 수명을 연장해 주었다? 쓸개의 성분과 쓸개 때문에 일어난 연쇄살인사건 ▲ 천민 출신 김순몽, 종기치료로 당대의 내로라하는 의원이 되다? ▲ 문맹자 피재길, 최고의 고약을 만들다 등의 이야기는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를 읽으면 만나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덧붙이는 글 |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방성혜 씀 | 시대의 창 | 2012.07. | 1만5000원)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 조선의 역사를 만든 병, 균, 약

방성혜 지음, 시대의창(2012)


태그:#종기, #암, #고름, #고약, #조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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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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