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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에 선비라는 뜻인 '士'자는 도끼날과 도끼자루로 그려져 있다. 장기판에 있는 사(士)의 역할은 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사(士)라는 글자 속에는 정예화된 무술 실력자인 '무사'의 의미를 가진다.

이 글자가 조선에 와서는 '무(武)'보다는 '문(文)'의 의미가 더 커져 '문사(文士)' 즉 선비의 의미를 지니게 됐지만, 그 정신과 결기는 문과 무를 떠나서 그대로 이어진다. 선비는 몸과 마음을 같이 갈고 닦아 시대의 고통을 넘어 평화를 일구는 존재다.

유교 지식인인 선비의 삶을 보면 모순과 극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말이 안 통하는 존재이고, 어떤 점에서 보면 지조 있고 곧다. 이 두 가지가 하나에 들어 있는 양면이다. 이 둘 사이에 있는 것이 '공부'이다. 공부를 통해 모순을 극복하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존재이고,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고리타분한 복고주의이다.

선비의 마음이 느껴지는 선생님

농민인문학 강의는 10대에서 80대까지 같이 강의를 듣는다. 이 넓은 간격을 메우고 청중을 다 모을 수 있는 강사가 많지 않다. 배병삼 선생님의 강의는 모든 연령층을 집중시켰다. 왜냐면 유교라는 오래된 가치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 배병삼 선생님의 강의 모습 농민인문학 강의는 10대에서 80대까지 같이 강의를 듣는다. 이 넓은 간격을 메우고 청중을 다 모을 수 있는 강사가 많지 않다. 배병삼 선생님의 강의는 모든 연령층을 집중시켰다. 왜냐면 유교라는 오래된 가치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 김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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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선생님을 보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공부를 많이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하는데 '사(士)의 마음'으로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머리 위에 칼날을 얹어 둔 삶을 살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공부를 통해 지금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것 너머를 보는 안목을 얻게 됐던 것 같다. 공자께서 이야기한 입지(立志·뜻을 세워 공부해서 스스로 자기 눈과 자리를 가지게 되는 단계)를 통과한 면모가 보인다.

농촌과 유교처럼 잘 어울리는 말도 없다. 농촌 문화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질서가 잡혀있다. 정해진 질서를 넘어서게 되면 어떤 고통을 겪게 되는지는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안다. 또 유교적 가치와 흐름을 이해하면 아무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일도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걸 보게 된다.

우리 도서관은 어쩌면 '공부'에 대한 오랜 유교적 존중을 기반으로 책에 대해 숭상하던 문화를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문화적 기반이 없었다면 어떤 기획을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농촌에서 조금씩이지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우린 돈도 없고 조직도 거의 무너졌는데도 어쨌든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려움이 생기면 어디서 오든 도움이 온다. 이건 누구 한 사람이 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유교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기독교에 교회가 있다면 유교에는 뭐가 있을까

유교를 포함한 동양의 가치는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의 성인 세대는 동양보다는 서양이 더 익숙했다. 달이 차면 기울듯 서양의 가치는 조금씩 줄어들고 동양의 가치는 청년과 학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 함께 공부한 분들과 함께 유교를 포함한 동양의 가치는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의 성인 세대는 동양보다는 서양이 더 익숙했다. 달이 차면 기울듯 서양의 가치는 조금씩 줄어들고 동양의 가치는 청년과 학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 김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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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서 기독교의 교회, 기도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곳이 학교와 도서관이다. 학교는 배움을 주고받는 곳이고, 도서관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곳이다(가톨릭 수도원이 도서관 기능을 가진 것도 같은 개념).

배병삼 선생님의 유교 강의는 '여민(與民), 호학(好學), 관계와 소통, 인격도야' 이 말 사이를 다양하게 변주한다. 이 말들은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이 말들이 다양한 맥락 속에서 해석된다. 중국 여러 왕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교는 혁신 이론이 되기도 하고 권력 유지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조건에서 이 개념이 받아들여지는 방법도 다양하다.

결국 2500년 동안 역사와 상황에 따라 해석돼 온 유교는 동양학 하나로 불리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유럽의 지성사를 공부할 때 민주주의 하나만 가지고도 로크의 민주주의, 루소의 민주주의,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등 다양한 갈래에서 그 차이를 찾아내듯 유교의 공부도 이제 그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공자와 맹자, 주자, 동중서, 왕양명, 정주, 정이. 그들이 꿈꾼 세상과 조건이 다 달랐고 실제 다른 이야기를 했음에도 모두 하나의 유교로만 보면 그들 사이에 깔린 다양한 변주를 읽을 수 없다. 정교하게 유교를 재구성해야 하는 이유는 유교 속에 다양한 배경이 깔렸기 때문이다. 이 배경과 유교를 같이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 현실에 적용할 때 무리가 없어진다.

확실히 농촌에서 유교적 담론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지역을 새롭게 구상할 때 유리한 점이 많다. 처음 도서관을 시작할 때 이런 담론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결국 알지 못했지만 무의식 속에 깔린 흐름을 탄 것 같다.

그리고, 농민인문학 강좌를 시작할 때의 각오도 이 공부를 통해 흐름을 바꾸겠다는 결기를 가지고 시작했는데, 그것도 결국 조선의 선비들이 입지의 단계에서 머리 위에 칼을 걸어두고 공부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의지를 불태운 것과 흐름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농민인문학이라는 공부 운동이 될 듯 안될 듯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라는 인류사에 보기 드물 정도로 혼란스런 시대를 살아냈던 제자백가의 지식인들이 꿈꾼 것은 평화로운 세상,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는 세상이다. 그들은 유토피아를 그리기도 하고, 현실적 전략을 짜기도 했다. 유교는 그 중간의 길, 중용의 길을 찾고자 한 지혜이고 이 길이 인간의 품성에 가장 부담이 덜 되는 방식이다. 자신을 바꾸고 새롭게 함으로 세상을 밝히려고 했던 그들의 의지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 누구도 나에게 길을 알려줄 수 없는 탈권위의 시대에 나를 찾음으로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위하여'와 '함께'의 차이를 아시나요

양반과 선비.
 양반과 선비.
ⓒ 문화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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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선생님은 여러 글에서 '위하여'와 '함께'라는 개념의 차이를 설명했다. 맹자 사상을 설명하는 '위민(爲民)'은 '백성을 위하여'라는 개념인데 '위하여'라는 생각 속에는 나와 너가 분리돼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내가 너를 위해 베푼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유교는 친구에게는 고맙다는 말하지 않는다. 너와 나가 분리되지 않았기에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선비의 '까칠함'은 위함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온다.

'위민(爲民)'은 맹자가 꿈꾼 세상이 아니다. 맹자가 꿈꾼 세상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세상이다. 누구를 위해서 베푸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는 세상이다.

'위민'과 '여민'은 말로 구별해서 구별되지 이걸 구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배병삼 선생님께서 이번 강의를 받아들이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과정 하나 하나에서 '여민'의 모습을 꾸준히 보였다.

농민을 위해서 강의를 하러 온게 아니라 농민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유교의 전통이 더 많이 남았기에 급격한 변화 이후에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도 더 많이 있을 수 있다. 유교를 제대로 공부하고 읽을 수 있기만 하다면.


태그:#죽곡농민열린도서관, #농민인문학, #배병삼, #김재형, #유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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