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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주차장에서 열린 숭모제에 참석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10년 11월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주차장에서 열린 숭모제에 참석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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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누리당의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박근혜 의원이 5·16쿠데타에 대해 "그 당시로 돌아가볼 때 우리 국민들이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세계에서 끝에서 2번째로 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로서 힘들게 살았고, 그 당시에 안보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위기 상황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게 아닌가 한다. 그 후에 나라 발전이라든가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를 돌아봤을 때 5·16이 그 어떤 초석을 만들었고, 그런 것을 봤을 때 바른 판단을 내리셨다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힌 후 많은 이들이 이 발언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며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민주당정권이 집권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61년 5월 16일에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혁명은 박정희 장군의 영도 아래 추진되어 전격적으로 무혈혁명을 완성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치,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여 밝은 민주정치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그 중점은 종래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중공업으로 발전시킬 첫 단계로서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두었다.(1970년 동아출판사에서 펴낸 국사교과서의 서술 내용)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혁명군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구출하고 국민을 부정부패와 불안에서 해방시켜 올바른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1961년 5월 16일 혁명을 감행하여…(1976년 문교부에서 펴낸 국사교과서의 서술 내용)

위의 인용문들은 모두 박정희 독재정권 당시에 나온 국사교과서에서 5·16쿠데타에 대해 서술한 내용들이다. 놀랍게도 박근혜 후보의 관련 발언과 사실상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위의 교과서 내용과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비교해보면, 먼저 쿠데타의 당위성으로 제2공화국 이른바 장면 정권기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북한의 남침 위협을 공통적으로 꼽고 있다. 그리고 쿠데타의 결과와 영향으로 장면 정권기 정치·사회적 혼란의 수습, 북한 남침 위협의 제거, 경제성장정책의 추진과 경제발전을 꼽고 있는 점 역시 사실상 동일하다.

그러면 5·16쿠데타의 본질이 과연 그러한 것인가. 더 나아가 5·16쿠데타가 과연 '구국의 혁명', '바른 판단'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부정될 수 있다.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옹호'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쿠데타의 배경으로 장면 정권기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음을 들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을 박정희가 쿠데타를 결심한 배경으로 강조한다. 5·16이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말 속에도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결국, 장면정권의 무능과 혼란상이 부각되면 부각될수록 쿠데타의 정당성이 강화되는 논리구조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박정희가 쿠데타 계획을 수립한 시점이 1961년 5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밝혀졌다시피 박정희는 4월혁명 이전인 1960년 1, 2월에도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이렇게 보면 박정희가 쿠데타를 감행하게 된 동기가 반드시 장면 정권기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상에 있지 않았음이 명백해진다.

4월혁명으로 열어놓은 '민주공간', 쿠데타로 뒤집어

또한 제2공화국 시기를 '혼란의 시기'로 덧칠해버릴 수 있는지도 문제다. 물론 장면 정권 초기 학생운동과 각종 사회단체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거리를 누비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분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혼란'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시기는 적어도 1987년 이전까지의 한국현대사를 놓고 볼 때 해방공간을 제외하고 나면, 가장 자유스럽고 민주적인 분위기의 시대였다. 한마디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만든 극우반공체제 아래에서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민주적, 민족적 열망이 4월혁명의 바람을 타고 자연스럽게 분출한 것이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그동안 꾹 참아왔던 말들을 '행동'과 '실천'으로 옮겼을 뿐이다.

문제는 장면 정권이 그러한 열망과 요구를 최대한으로 수렴해줄 수 있는지였다. 그 점에서 장면정권은 한계를 보였지만 일부 성과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한 현대사 연구자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리고 있다.

장면 정권기의 사회적 혼란이 과연 기존의 민주주의 체제를 완전히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 문제를 담당했던 미국의 외교 관리들도 사회적 혼란이 있기는 하지만 당장 이것이 무장봉기 같은 것으로 폭발할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의 저항운동은 대부분 합법적인 틀 안에 있었고 폭력적인 체제 전복활동이나 무장봉기 같은 것을 조직할 비밀조직 같은 것이 번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적 혼란은 민주주의적 틀 안에서 점진적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홍석률, <5·16쿠데타의 원인과 한미관계>, <역사학보> 168호, 2000, 82쪽)

특히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5월의 시점에선 특별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장면정권은 비록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경제개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쿠데타를 모의하던 세력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대로 더 미루다가는 쿠데타의 '기회'를 놓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설령 장면정권이 무능과 부패로 점철되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를 꼭 비합법적이고, 반헌법적이며, 국민의 주권을 부정하는, 그야말로 '비상한' 수단인 쿠데타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장면정권은 4월혁명을 계기로 수립된 정권이 아니던가? 그러면 박정희가 '쿠데타'라는 '발상'을 하게 된 내면적 동기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점은 박정희가 1936년 일본 육군내의 한 파벌이던 황도파(皇道派)가 일으킨 2·26반란사건을 높이 평가하고 내면화했던 사실이다.

그는 5·16 쿠데타 직전, "2·26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서 보듯 박정희가 쿠데타라는 발상을 하게 된 데에는 2·26사건이 그에게 내면화되어 있던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이와 관련해선 이준식, <박정희의 식민지 체험과 박정희시대의 기원>, <역사비평> 2009 겨울호, 241∼243쪽 참조)

한편, 2·26사건을 일으킨 황도파는 말 그대로 '천황'을 군국 일본의 구심점으로 받들며 '국가개조'를 내걸었는데, 여기에는 기성의 정치인과 재벌 등에 대한 강한 반감이 그들의 군국주의적 이상 및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과 결부되어 있었다.

2·26반란은 결국 실패하고 황도파는 몰락했지만, 그 결과 이 시기 일본에선 거국내각이 수립되어 정당내각이 붕괴되었고 군부가 득세하게 된다. 이는 이후 일본이 파시즘적 군국주의를 강화하고 전쟁의 길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었다.

"민중을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이 아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박근혜 새누리당 예비후보가 18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육군 3사단 백골부대를 방문해 최전방초소에서 전방을 둘러보며 취재진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박근혜 새누리당 예비후보가 18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육군 3사단 백골부대를 방문해 최전방초소에서 전방을 둘러보며 취재진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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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동기가 어디에서 나왔건 간에 한 가지 확실히 해둘 점은 5·16쿠데타가 4월혁명이 열어준 공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5·16쿠데타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이 쿠데타가 과연 4월혁명과 연속성을 지닐 수 있느냐는 점이다.

현재 일각에선 5·16쿠데타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들고 있지만, 당시 장면정권도 경제개발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평가기준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적어도 1961년 그 당시의 시점으로 돌아가볼 때 5·16쿠데타의 본질과 성격, 지향점은 4월혁명을 기준으로 보아야 뚜렷해질 수 있다.

그런데 4월혁명의 성격과 지향은 한마디로 억압적인 극우반공(= 반북) 체제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였다. 하지만 2·26반란을 모방한 5·16쿠데타는 다시금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내세우고 강압적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4월혁명이 열어놓은 공간을 뒤집었다. 박정희는 장면정권의 혼란상을 확 뒤집어 엎으려했다지만, 그의 쿠데타는 결국 4월혁명이 열어준 역사적 공간을 뒤집는 것이었다.

즉 4월혁명으로 만들어진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진로에서 이탈하는 결정적 계기를 연출했던 것이다. 대신 박정희 정권은 신격화된 천황을 절대적 구심점으로 삼아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채택하고 근대 일본과 만주국에서 시행한 제도들을 그대로 한국에 이식했다. 과연 이를 역사적 맥락에서 '혁명'이라 할 수 있을까?

5·16쿠데타 직후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은 이 쿠데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준다.

그때는(4월혁명을 가리킴) 믿은 것이 정의의 법칙, 너와 나 사이에 다 같이 있는 양심의 권위, 도리였지만, 이번은(5.16쿠데타를 가리킴) 믿은 것이 탄알과 화약이다. 그만큼 낮다. 그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은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묵인이다. 그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을 했지만, 이번은 밤중에 몰래 갑자기 됐다.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낮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민중을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이 아니다. 반드시 어느 때에 가서는 민중과 버그러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리고 오래 속였으면 속였을 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는 깊다.(서중석, <분단체제 타파에 몸던진 장준하>, <역사비평> 1997 가을호에서 재인용)

이 글은 5·16쿠데타가 4월혁명의 대척점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이를 통해 쿠데타 세력이 뒷날 보여준 행태를 무서우리만큼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태그:#5.16쿠데타, #박정희, #박근혜, #4월혁명,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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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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