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에이핑크 정은지는 1997년 열여덟살을 H.O.T 토니에게 바친 광팬 성시원을 연기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에이핑크 정은지는 1997년 열여덟살을 H.O.T 토니에게 바친 광팬 성시원을 연기한다. ⓒ CJ E'&M


"오빠를 지켜주지 못했어요. 우리 오빠 행복해야 하는데"

1996년, 서태지의 은퇴 기자회견 이후 팬들은 울부짖었다. 2012년,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제작발표회에서 공개된 이 영상을 보고 실소했다. 고작 10대 소녀 한 명이 무슨 수로 '오빠'들을 구원하겠다는 말인가.

그런데 정말 소녀들은 그들이 '오빠'로서의 삶을 영유할 수 있도록 도왔고, 또 다른 '오빠'들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냈으며, 대중문화를 이끌었다. 이 거창한 담론은 '빠순이'에 대한 것이다.

조직화된 팬덤, '오빠'를 구원하다

'빠순이'는 오빠와 순이의 합성어로 운동선수나 연예인을 쫓아다니면서 응원하는 여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다소 광적인 행동에 대한 경멸적 어감이 포함된 이 단어는 1990년대 아이돌 태동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 팬의 등장은 1990년대 훨씬 이전부터다. 조용필의 '비련' 도입부인 "기도하는" 뒤에 가사가 "오빠~"라는 함성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빠부대'의 역사는 짧지 않다.

 베이징 완스다중신(구 우커송 체육관)에서 열린 이날 신화의 콘서트는 8천석이 매진됐다.

베이징 완스다중신(구 우커송 체육관)에서 열린 이날 신화의 콘서트에서 그들을 연호하는 팬들의 모습 ⓒ 신화컴퍼니


하지만 좋아하는 스타와 관련된 모든 상품을 구매하고, 콘서트를 관람하며, 스케줄에 동행하는 강도 높은 '팬질'을 하는 이들의 등장은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급부상하면서부터일 것이다. 1996년, H.O.T의 데뷔에 이어 젝스키스·신화·GOD 등 여러 아이돌 그룹이 줄지어 탄생하면서 팬 활동은 가요계를 중심으로 주로 10대와 20대 여성 사이에서 좀 더 확장됐다. 응원하는 풍선의 색깔을 정하고, 응원 구호를 만드는 등 조직적이 됐다.

까만 바탕의 도화지에 형광색으로 응원 문구를 써넣는 아날로그 방식이 LED나 야광봉으로 바뀌는 등 기술적인 발전이 있었을 뿐, 그때 만들어진 전문화·조직화된 팬덤 문화는 지금의 초석이 됐다. 그 전방위적인 지지와 지원 덕분에 아이돌은 지금까지도 대중가요계의 가장 잘 팔리는 상품으로 기능하고 있다. 팬덤의 크기와 힘에 따라 반짝 스타로 사장될 수도, 십 수 년 동안 '오빠'로 군림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1990년대에 데뷔해, 팀이 해체됐더라도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스타들이 증명하고 있다. <응답하라 1997>에 출연하는 배우 은지원은 젝스키스로 데뷔해 15년 동안 예능인으로 더 활약했고, 양대산맥이었던 H.O.T의 문희준 역시 마찬가지다. 신화는 올해 데뷔 14주년 콘서트를 열어 아시아에서만 10만 명의 팬을 동원했다. '누나' '언니' 부대를 이끌었던 핑클의 이효리는 연예계를 넘어 패션과 소셜테이너의 아이콘이 됐다.

스스로 '진화'해온 '빠순이'들

 1996년 데뷔해 활동했던 5인조 아이돌 그룹 H.O.T(왼쪽)와 그 당시를 배경으로 2012년 만들어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출연 배우들.

1996년 데뷔해 활동했던 5인조 아이돌 그룹 H.O.T(왼쪽)와 그 당시를 배경으로 2012년 만들어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출연 배우들. ⓒ SM엔터테인먼트, CJ E'&M


<응답하라 1997>이 1990년대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온 지금, 작년부터 불기 시작했던 '1990년대 향수' 바람의 끝물일지도 모른다. 199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정점을 찍었고, <문나이트90> <컴백쇼 톱10> 등이 이미 그 시기 가요계를 추억했다. 그래서 <응답하라 1997>은 그 팬들로 추억의 매개체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응답하라 1997>의 연출을 맡은 신원호 PD는 소위 '빠순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대중문화를 떠받들고 있는 주체인데, 전반적으로 한심하다는 시선 때문에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제 '오빠'들은 더 이상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고 일갈하지 않고, "음악 미술은 저리 밀어두고 국영수를 우선으로 해야"하는 우리를 위해 학교를 비판하는 전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꺼하자'고 외치는 귀여운 '남동생'이든, 상의를 찢고 식스팩을 보여주는 섹시한 '남자'든 그들을 쫓는 팬들의 마음은 비슷하다.

 SBS 새 수목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제작발표회장을 가득 채운 쌀 화환. 대부분 박유천의 팬들이 보낸 것이었다.

SBS 새 수목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제작발표회장을 가득 채운 쌀 화환. 대부분 박유천의 팬들이 보낸 것이었다. ⓒ 최민호


팬의 역할은 좀 더 확장됐다. 기자회견장에 마련할 간식을 직접 챙기고, '오빠'들의 이름으로 봉사를 하거나 기부를 한다. 맹목적으로 '오빠'를 쫓아다니는 줄만 알았던 이들이 스스로 역할을 스스로 넓히고 있는 것이다. 그 전에 오빠들에게 선물을 바치는 조공이 먼저 있었고, 이를 좋은 일에 쓰자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가 만들어낸 산물인 '빠순이'는 이렇게 진화해왔다. 

'빠순이'의 재발견을 그려주길 바라는 이 드라마에서 더불어 기대하는 것은 1990년대를 소환하는 방식이다. 종종 이 시기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한 물 간 스타가 다시 인기를 얻기 위해 구걸하는 식으로 그리는 모습은 지금의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력을 웃음거리로밖에 추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롱하기에, 빠순이는 정말로 오빠를 지켜냈고 그 오빠들은 지금 대중문화의 한 축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응답하라 1997 빠순이 H.O.T 젝스키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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