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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되면 마음이 아이처럼 돼서 사소한 일에도 싸운다. 광산노인복지관에서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하는 인사를 동작을 곁들여서 하고 있다. 이렇게 하고나자 갈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사랑합니다 인사를 하는 장면.
▲ 강위원 여민동락 대표와 함께(앞줄 가운데) 노인이 되면 마음이 아이처럼 돼서 사소한 일에도 싸운다. 광산노인복지관에서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하는 인사를 동작을 곁들여서 하고 있다. 이렇게 하고나자 갈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사랑합니다 인사를 하는 장면.
ⓒ 김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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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 오랜동안 농민 운동과 문화 운동을 하면서 제일 많이 받았던 유혹 중의 하나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는 거였다. 만약, 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우리 도서관의 규모와 역할은 몇 배 더 커질 것이다. 나는 그 정도 유혹은 넘어설 힘이 있었고, 다행히 우리는 아름다운 자율 공동체의 문화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강위원 선생은 그런 점에서 불운하고 동시에 '복지 사회'라는 미래 과제를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얻은 축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강위원 대표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5기 의장을 역임하고,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한 핵심 학생운동 지도자였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논어를 읽으면서 '여민동락' 사회의 꿈을 꾸고, 그 사회를 실현할 구체적인 전략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농촌에서 사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여민동락 사회의 꿈과 전략에 동의한 친구들이 야간대학과 사이버대학에 등록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전략적 실현지로 강위원 대표의 고향인 전남 영광군 묘량면을 선택하고 세 가정이 함께 들어가게 된다.

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무수한 언론과 방송에서 너무나 자세하게 보도했고, 강위원 여민동락 대표는 단순히 여민동락 공동체 뿐만 아니라 모량초등학교 살리기 운동, 모싯잎 할매 송편, 광주 광산노인복지관 관장 등 하는 일마다 사회복지 운동을 넘어 우리 삶을 근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온 것으로 유명하다.

귀농, 귀촌 단체에서 농담으로 하는 '귀농 십계명'이 있다. 그 중에 첫번째가 '고향으로 가지마라' 이다. 고향 사람들이 농촌으로 돌아오는 친구들, 자녀들 무시하는 건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아들이 농사짓겠다고 고향에 돌아오면 그 집 부모는 천불이 나서 얼마 못살고 죽는 경우가 많다. 마을 망하라고 고사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강 위원 대표는 빨갱이라는 소리, 정치할려고 왔다는 소리, 갖가지 모진 소리 들으며 고향에서 버텼다.

귀농, 귀촌 한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면의 힘이 단단해지고 자기를 바꾸는 힘을 얻는 건 사실이지만 이런 형태의 귀농은 40대가 넘어선 사람들이나 버티는 일이지 20대, 30대 초반의 젊은 미래 세대가 이걸 견디진 못한다.

최태석 시인은 강위원 대표가 동생같다며 사진 한장 찍고 싶다고 했다. 강위원 대표는 이렇게 농촌 마을의 반가운 동생이 되어 '농민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번 강의 주제 '농민과 희망'에 가장 어울리는 강의였다.
▲ 최태석 농민 시인과 강위원 여민동락 대표 최태석 시인은 강위원 대표가 동생같다며 사진 한장 찍고 싶다고 했다. 강위원 대표는 이렇게 농촌 마을의 반가운 동생이 되어 '농민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번 강의 주제 '농민과 희망'에 가장 어울리는 강의였다.
ⓒ 김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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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사회가 적당한 선에서 이런 오래된 악습을 끊어야 하는데, 결국 그 일은 모진 고생하면서 자리잡은 이들이 지역 사회가 귀농 후배들에게 모진 짓 못하도록 막는 수 밖에 없다. 강위원 대표가 심혈을 기울인 묘량초등학교 살리기 운동은 폐교 위기의 초등학교를 살리자는 제안과 함께 아이가 있는 젊은 귀농 세대를 보호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운동 시작 당시 12명이었던 묘량초등학교 학생은 현재 초등 34명, 유치원 15명으로 확대되면서 폐교의 위기를 넘기게 되고, 지역 귀농 확대의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이날 강연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왔다. 요즘 농민인문학 강의는 정말 알 수 없다. 어떤 중요한 끌림이 사람들을 모은다는 느낌이 든다.

한 학생이 후기를 남겼다.

강 위원 선생님 강의를 듣고 난 뒤에 도서관 밖을 나왔을 때의 풍경은 이러했다. 강렬하다기 보다는 밝고 따스하게 내리쬐던 태양빛, 여름이 우거진 푸른 들 계곡의 시냇물 흐르는 소리, 강의를 듣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사람들... 아이들의 웃음소리... 냇가의 대학생들...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행복일까?

강의를 듣기 전의 하늘과 강의를 듣고 난 뒤의 하늘이 달라지고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지는 강의. 강위원 대표의 강연은 시종일관 진지함과 웃음이 그치지 않는 강의였다. 재미있는데 깊어지고 생각이 맑아지는 청럄함이 넘쳐 흘렀다. 왜 이랬을까?

일단 외모가 재미있었다. 두 아이의 아빠인데도 개구쟁이 느낌이 얼굴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바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좌충우돌 부딪치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 자체가
안쓰러우면서도 그 흐름에 빨려들게 하는 힘이 있다. 함께 한 공동체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서 이혼을 할려고 하자.

"이혼하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돈은 못준다."

결국 돈이 없어서 이혼을 못하는 이야기. 87세 되신 어머니와 같이 사는 형수가 관계가 불편한 것을 보고는 해법으로 어머니 이름이 붙어있는 텃밭을 만들어 드리고, 키우는 닭에 대하여 닭을 산 건 형이니까 닭은 형이 소유하고 모이를 주는 건 어머니이니까 달걀은 어머니 것이라는 해법을 제안해서 형수 눈치보지 않고 어머니로부터 떳떳하게 텃밭의 채소와 계란을 얻어오는 이야기.

공짜 복지의 포로가 된 노인들이 에쿠스타고 와서 공짜 점심 얻어 먹고, 시비만 붙다 가는
걸 넘어서기 위해 감사하고 나누는 노년을 이야기하고 노인들이 돈내고 재능을 기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자 서로 싸우지 않더라는 이야기.

이동가게인 동락점빵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이야기. 두 시간 내내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이야기가 있는 삶이란 게 뭐냐면, 자기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복지관 관리자가 되어 복지 공무원의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다면 청량감을 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 위원 대표는 건물짓고, 프로젝트 제안해서 돈으로 하는 복지를 넘어 '자율적이고 가난한 복지, 사회복지사가 되는 게 아니라 주민이 되고 이웃이 되고 농민이 되는 여민동락의 세상'을 살고 싶었고, 그 세계가 현실화되는 만큼 이야기가 늘고 있었다. 신영복 선생님은 새로운 세상은 변방에서 시작되는 데 그 변방에 있는 사람들이 중앙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강 위원 대표의 여민동락 공동체와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의 공통점은 둘 다 말할 수 없이 외진 지역이고 초등학교가 언제 폐교될 지 모르는 경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중심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강 위원 대표가 도서관 카페에 짧게 남긴 글.

"어제 행복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어김없이 곳곳에 든든한 동지들이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고 신명났습니다.돌아오는 내내 콧노래를 부르며 왔습니다."

변방이 이렇게 강해지고 있기에 이제 도시와 중심이 무너져도 큰 걱정없다. 언제나 문제는 우리 안의 패배주의였다. 강위원 대표의 강의가 이번 강의 주제인 '농민과 희망'에 가장 많은 답을 가진 강의가 될 것같다. 이런 희망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정치적 권력으로 얻을 수 있을까?


태그:#강위원, #농민인문학, #죽곡농민열린도서관, #여민동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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