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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문 모습
 서울대 정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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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정치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프레임 전략 중 하나로 주도전략(strategic initiatives)을 제시한 바 있다. 주도전략이란 주의 깊게 선택한 한 가지 쟁점을 자기들의 뜻대로 변화시킴으로써 다른 많은 영역의 쟁점에까지 자동적으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각종 공안사건이나 특정 개인의 부정부패를 통해 그가 속한 전체 그룹이나 진영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는 것도 일종의 주도전략이다.

물론 주도전략이 보수진영의 전유물은 아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무상급식은 사회적 양극화를 불러온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대체하기 위해 진보진영이 구사했던 주도전략이었다. 선별적 복지 프레임에 대한 대안으로 보편적 복지 프레임을 제시함으로써, 진보진영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반MB'외에는 별다른 대안적 프레임을 제시하지 못했던 지난 총선을 뒤로하고 모든 정치권이 대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진보진영이 주도전략을 발휘할 또 하나의 의제가 등장했다. 바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에 기반 한 대학체제 전면개편 논쟁이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안은 서울대 폐지론?

촉발한 건 민주통합당이고 퍼뜨린 건 보수언론이다. 민주통합당 이용섭 정책위의장은 지난 1일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를 당의 대선공약으로 넣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서울대를 국립대의 서울캠퍼스로 두고 기초과학 관련 학부를 제외한 나머지 학문 분야는 전국으로 분산시키겠다는 것이 골자다.

언론들은 이를 '서울대 폐지론'으로 프레이밍하면서 논란에 불을 지폈다. <조선일보>는 지난 2일 기사에서 "민주통합당이 서울대 폐지론을 들고 나온 것은 '서울 중심·엘리트 교육의 상징'인 서울대 학부를 없앰으로써 교육·취업 등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큰 지방대학과 지역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의도"라고 단정 지었다.

과연 그 이유뿐일까?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는 이미 10여 년 전에 장회익 교수 등 몇몇 서울대 교수들이 제기했던 대학구조개편 방안이다. 이 안은 여러 차례 보완과 개량을 거듭하면서 2004년 총선과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대표 공약으로 채택되었으며, 올해 총선에서도 통합진보당의 교육분야 핵심공약이었다.

통합네트워크안은 여러 변종이 존재하지만 초기에는 서울대를 대학원(중심)대학으로 발전시키며 학부과정은 국립대통합네트워크에 개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서울대' 학적을 소유한 재학생 대신 학부강의가 전면 개방되기 때문에 일부에서 '서울대 폐지론'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지난 1월 16일 오전 서울 관악구 관악로 서울대학교에서 2012학년도 정시모집 논술고사를 치르는 수험생 학부모들이 대기실에서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1월 16일 오전 서울 관악구 관악로 서울대학교에서 2012학년도 정시모집 논술고사를 치르는 수험생 학부모들이 대기실에서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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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는 '서울대 폐지'보다 '대학 평준화'에 강조점이 찍혀 있는 방안이다. 전국 국립대의 입시전형과 학점, 학위를 공동으로 진행함으로써 대학서열체제를 근본적으로 혁파하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물론 평준화의 범위 역시 국공립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진보·개혁진영'만의 생각이었던 것도 아니다. 새누리당의 정두언 의원은 지난 2011년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집에서 '공교육 혁신 10대 과제'에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를 포함했다. 전국 국립대의 교육 경쟁력과 책무성을 강화하기 위해 통합 운영체제를 구축, 신입생을 공동 선발하고 졸업자에게는 동일한 학위를 수여하자는 것으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안과 동일하다. 올해 1월 정두언 의원이 박근혜 비대위에 제출한 '서민·중산층을 위한 공교육 혁신 11대 과제'에도 '국립대 통합 운영체제 구축'이 포함되어 있다.

새누리당 의원이 공교육 혁신 주장한 이유

이처럼 진보정당만이 아니라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의 일부 인사까지 평준화를 지향하는 전면적인 대학체제개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대학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어떤 교육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공감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지난 2월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최고의 교육복지는 대학교육 혁신을 통한 초중등교육의 정상화"라고 주장하며 7가지 대학혁신과제를 제안한 것 역시 이런 맥락이다. 최고 명문대에 자녀를 진학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목표를 전국민이 공유하고 무지막지한 레이스를 펼치는 풍경은 이미 경쟁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순기능을 넘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의 논란은 두 개의 패러다임 간의 각축을 예고한다. 하나는 1995년 5.31교육개혁안에서부터 촉발된 '경쟁 패러다임'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대체하려는 '공공성 패러다임'이다.

이 중 대학 간·학생 간 무한 경쟁을 통해 대학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경쟁 패러다임은 19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를 도입한 뒤 2010년까지 일반대는 38개교, 전문대학은 19개교, 대학원대학은 37개교를 늘려 대학진학률을 80% 수준으로까지 끌어 올렸다.

대학과 대학생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기존에 대학과 대학생이 누렸던 사회적 위상은 추락했고, 변별력이 없어진 '대학학력'을 대체하는 학벌체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수도권, 서울, 명문대, 명문대 내의 좋은 과'로 촘촘하게 짜여 있는 서열체계는 수험생에게는 만성적인 불안의 압박을, 낙오자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패배감을 안겨주고 있다.

서열을 평가하는 지표에 따라 각 대학이 등록금 인상을 통한 재정확보에 열을 올리게 만든 것은 부수적 효과다. 12년 동안 진행되어온 무차별 '경쟁 패러다임'은 찬란하고 거대한 대학건물을 우후죽순 만들어냈지만, 학업에 열중해야할 학생들은 그 건물을 짓는 데 들어갈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시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또 다른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강요당하는 각종 '스펙쌓기'로 대학생의 사교육비는 고등학생 사교육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런 참혹한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공공성 패러다임'의 핵심에 자리해 왔던 것이 바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라는 아이디어였다. 그동안 진보교육진영에서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의 기본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도 국립대의 전국계열별 특성화 전략이나 국립교양대학안, 혁신대학네트워크 등 여러 개선책을 제시해 왔다. 

문제는 이런 논의들이 여전히 각 정당의 정책공약 개발 수준에 머물거나 몇몇 교육단체들 간의 논쟁으로만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보와 보수 모두의 고민, 대학 체제 개편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일대의 모습.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일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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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지금의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를 둘러싼 논쟁은 대선 쟁점으로까지 적극 끌고가야 할 의제다. 무엇보다 대학체제 개편을 둘러싼 패러다임 경쟁은 효과적인 주도전략이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로의 재편이 가져다준 온갖 문제들이 한국 교육체제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대안 패러다임의 효과 또한 교육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계급과 계층, 심지어는 진보와 보수도 초월하는 의제라는 점에서 국민적 수준의 논쟁으로 확대되기에도 수월하다. 무상급식 운동이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을 확장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듯, 대안대학체제 개편운동은 사회 전반에서 공공성 패러다임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언론에서 제기하는 서울대의 학부를 폐지하느냐와 같은 문제들은 매우 지엽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패러다임을 선택할 것이냐"는 점이다. 경쟁만능주의에서 '공공성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 동의한다면, 다른 쟁점들은 발생 가능한 문제들과 현실적 적용 가능성 등을 타진하면서 얼마든지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다.

공공성 패러다임을 수용한다면, 이 내부에서 마련해야할 대학체제개편안의 핵심 목표와 방향은 첫째, 강제적이거나 의무적으로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진학하는 대학. 둘째, 경제적 조건으로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는 환경. 셋째, 서열 없이 지역대학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도권 집중구조의 타파. 넷째, 국립대의 대폭 확대와 사립대에 대한 과도기적 지원. 다섯째, 민주적인 대학 운영방식 마련 등이 될 것이다. 이 범위에서 충분히 유연한 정책조율이 가능하다.

또한, 대학체제를 둘러싼 패러다임 경쟁은 이 시점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2018년이면 전체 대입정원이 고교 졸업자수를 초과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자연적인 것이든, 강제적인 것이든 대학체제의 구조개편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응해 전체 대학수를 강제 축소하는 방향의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이미 올해 9월 대학의 특수성을 고려한 기준을 추가하여 부실대학을 발표하고 재정지원을 제한하는 등 구조조정을 강행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종의 수급조절인 셈인데, 전체 대학 규모를 줄이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 1차 대상은 지방 사립대가 될 수밖에 없으며 수도권 중심의 학벌과 서열체제는 그대로 살아남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공공성 패러다임을 수용한다면, 부실 사립대를 적극적으로 국·공립대로 바꾸는 정책을 구사해 현재 20%수준인 국립대의 비중을 비약적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 지금이 교육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주도전략을 구사하기에 가장 적기인 셈이다.

'분노 투표'보다 '희망 투표'가 필요하다

문제는 정당에게만 맡겨두기에는 여전히 불안하다는 점이다. 민주통합당이 대선정책 공약화를 언급했지만, 민주통합당 역시 '경쟁패러다임'의 교육정책을 유지·고수한 당사자였다는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비해 통합진보당은 진정성을 신뢰할 수는 있으나 내부 권력투쟁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논쟁을 계기로 대안적 패러다임을 구현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이 전개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지난 총선에서 야권의 기대 이하 성적표는 대안적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한 결과였다면, 이젠 선명한 패러다임 경쟁을 통해 어떤 한국사회를 추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 역할을 정당만 수행해야할 이유는 없다.

이번 대선이, 패러다임 경쟁을 통해 누군가가 싫기 때문에 감행하는 '분노투표'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감행하는 '희망투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분노가 좌절되면 더 큰 분노만이 쌓이지만, 희망은 좌절되더라도 또다른 도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태그:#서울대 폐지, #서울대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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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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