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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2년 후배였습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반가운 전화에 결혼 소식이라도 전하려는 줄 알고 웃으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후배는 취해 있었고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형, 뉴스 봤어? 뭐가 이래? 전문대학 나오면 대통령할 재목도 안 되는 거야? 어떻게 이 나라는 내가 대학 입학하던 13년 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냐. 나는 전문대학 나와서 내가 맡은 일 열심히 하고 그런 사람들이 정치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학벌 좋은 사람만 정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봐. 고졸 대통령들도 훌륭하게 일했는데 말이야. 잘난 놈들이 오히려 우리 같은 서민들 등쳐먹고 살았으면 살았지. 형 정말 우리나라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이냐. 어떻게 야권을 지지하고 개혁을 바라는 누리꾼들이 어떻게 학력이 대권후보의 자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후배)

주말 저녁의 달콤함은 후배의 전화를 받으며 가슴 먹먹함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무엇이 이토록 바르고 성실한 후배를 힘들게 만들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자초지정을 들어보니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배가 야권 대선후보들의 면면에 대한 인터넷 뉴스를 보는데 일부 누리꾼들이 야권 대선주자로 분류되는 김두관 경남도지사가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4년제 대학에 편입한 것을 두고, '전문대학 졸업생 주제에 대권에 도전하느냐?', '학력이 부족하면 대통령 나올 생각부터 버려라'라는 식의 댓글을 다수 목격했다고 합니다. 평소 학벌 없는 사회를 주장하던 후배가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는 갔다', '전문대학 졸업생도 우리 국민이고, 그 누구나 대선후보가 될 수 있다'라는 반박댓글을 달았고 결국 자신과 절대다수와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후배는 이날 공고하게 우리 사회 위에 군림하고 있는 학벌의 무게를 다시금 느꼈다고 했습니다. 스무 살부터 감수하리라 마음먹었지만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동안 변치 않은 사람들의 '학벌 맹신주의'가 무섭다고 했습니다.

대선 관련 기사에서 한 네티즌이 학력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자 일부 네티즌들이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 전문대 비하 댓글 대선 관련 기사에서 한 네티즌이 학력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자 일부 네티즌들이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 포털 뉴스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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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가 보내준 해당 기사 링크를 따라가니 전문대학을 비하하거나, 전문대학 졸업생은 대선후보의 자격이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는 누리꾼들이 다수 보였습니다. 후배의 반박 댓글도 보였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저 역시 몇몇 반박댓글을 달았지만, 학력지상주의 누리꾼들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해서 '사'짜 들어가는 직업 정도는 되어야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논리를 쉽사리 접지 않았습니다. 흡사 인도의 카스트 제도만큼이나 공고화되어 있는 학력 카스트를 보는 듯했습니다.

'대한민국판 신분제도, 학력 카스트' 

다음 날 후배와 오랜만에 술자리를 했습니다. 만나자 마자 후배는 쓴 소주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십여 년 전, 저를 찾아와 고민하던 후배의 앳된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살림이 넉넉지 않았던 후배는 괜찮은 내신과 수학능력시험 점수에도 전문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 하나만 잘하면 사회가 인정해 줄 거'라던 후배의 의지와 '세월이 흐르면 전문대학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겠지'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여전히 현실의 장벽에 막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후배에 의하면 전문대학 출신이 사회에서 느끼는 임금과 사회적 대우에 대한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22만 명이 학생들이 전문대학에 재학 중이고, 이미 전문대학을 졸업한 졸업생도 45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전문대학이 전체 대학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41개 대학, 약 42%에 달하지만 학생 1인당 국고지원 지원은 일반대학교 기준 1/2에 불과하고, 2009년 기준 전문대학교 초임 급여(월 144만원)는 일반 대학 졸업생 급여(200만 원)에 비해 56만 원이나 적다고 합니다.

차별은 전문대학 재학 때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방학 때, 공공기관이나 기업의 아르바이트 지원원서나 취업원서에는 언제나 '2년제 대학'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최근 전문대학의 수업연한 자율화가 이뤄지고 전문대학 명칭 사용이 보편화됐지만 '전문대학교=2년제'라는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팽배하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학사학위 전공심화과정을 통해 일반 대학과  마찬가지로 전문대학에서도 '학사학위 취득'이 가능하지만 이를 지원서에 반영한 공공기관이나 기업은 전무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은 곧 평생 학력이라는 주홍글씨로 남게 된다고 했습니다.

현재 전문대학에 재학 중인 후배들에 대한 걱정도 있다고 합니다. 취업률이 곧 지원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면서 4년제 일반 대학도 잇따라 실용학과를 개설하고 있고, 이명박 대통령의 '선취업 후진학' 정책에 따라 특성화․마이스터고를 통한 고졸취업이 장려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끼인 세대'로 전락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2012년 대선, '학력 카스트' 굴레에서 벗어나자

이만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전문대학 졸업생들의 숙명과 같다고 후배는 자조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전문대학 졸업생인 것이 자랑스럽고, 앞으로 전문대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고 합니다. 경북의 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지방대학에 편입한 김두관 경남도지사가 대권후보로 언급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형, 나는 정치 같은 거 잘 몰라. 하지만 전문대학을 졸업한 대통령, 지방대 나온 대통령이 이제는 나와도 되지 않을까? 그동안 똑똑하고 유명한 사람들 서민을 위하는 대통령했지만 그 사람들은 그 똑똑한 머리와 좋은 학벌로 우리 같은 서민을 힘들게 했으면 더 힘들게 했지, 우리 같은 서민들 행복하게 해주진 않았잖아? 그래서 난 이번에는 전문대 출신, 지방대 출신 같은 진짜 서민이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 학력 차별에 대한 아픔도 겪었을 테니 이 지긋지긋한 학력신분제도 없앨 수 있을 테고. 그런데 그 누리꾼들은 안 그런가봐. 아직도 겉만 번지르르한 학력이 그 사람의 실력을 보여준다고 믿나봐."(후배)

소주잔이 수차례 돌고 취기가 오르자 후배는 김두관 경남도지사의 자서전 <아래에서부터>에서 김두관 도지사 자신이 전문대학 졸업생인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이력 가운데 하나라고 기술한 부분을 언급하며 자신과 같은 전문대학 졸업생들이 김 지사처럼 전문대학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채근담>의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채근담>에는 "사람들은 글자가 있는 책은 이해하지만 글자가 없는 책은 이해하지 못한다. 줄이 있는 거문고는 탈 줄 알지만 줄이 없는 거문고는 탈 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난 흔적만 쓰고 정신은 사용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책과 거문고의 참맛을 깨닫겠는가"라고 탄식하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늦은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곰곰이 생각해보니 <채근담>에서처럼 '글자가 없는 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지 못하는' 정치인을 우리는 수 없이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겉은 번지르르 했지만 서민의 아픔과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겉만 '똑똑한' 정치인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결국 그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야만 서울에 취직할 수 있고, '학력'이 좋아야만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6개월여가 남은 대선에서는 그런 번지르르한 정치인에게 다시 속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학력만능주의를 당당히 거부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서민의 길을 걷어온 사람, 대한민국에서 학력의 굴레를 벗어낼 수 있는 정치인을 올해 12월에는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태그:#전문대학, #학력차별 철폐, #대선, #김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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