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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라인드>의 한 장면
 영화 <블라인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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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 저 오늘 너무 기뻐요. 이번달 중으로 회기역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 넓은 간격에 안전 고무발판이 설치가 된다고 하네요. 이렇게 빨리 될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취재차 알게 된 시각장애인 여성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흥분돼 있었다. 그녀는 지난 5월 2일 한국철도공사(코레일) 관리 구간인 회기역에서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가 넓은 탓에 다리가 빠지는 사고를 당했던 피해자다. (관련기사 : 안전시설 없어 사고 나도 일단은 피해자 탓?)

지하철역 사고 후 합의도 거절하며 '안전시설 설치' 요구

A(30, 1급 시각장애인)씨는 사고 후 회기역장과 면담 신청을 하고 안전시설 미비의 개선을 요구했다. A씨와 면담한 역장은 "1호선 라인이 승강장과 지하철 사이가 너무 넓다"면서도 "현재 안전고무발판의 설치를 의뢰한 상태지만 예산상 언제 설치될지 모를 일이다"라고 답변했다. A씨는 사고 후 사후처리를 담당한 보험회사측의 손해배상 합의 제안도 일단 거절했다.

"처음엔 연락도 안 하던 보험회사가 <오마이뉴스>에 기사가 나가고 난 후 연락이 왔어요. 손해배상금액이 확정되었다며 합의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전 배상금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배상보다 안전시설 설치를 해달라고 했죠."

A씨는 사고와 관련해 합의하자는 보험사측 담당자에게 "안전 시설과 관련한 한국철도공사 측의 답변을 듣지 않는 한 합의할 수 없다"고 밝혔고 다시 회기역장을 통해 안전시설 설치에 관한 책임있는 답변을 요구했다.

"당장 설치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어요. 한국철도공사도 예산이나 절차 등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있을 테니 '최소한 언제까지 설치하겠다'라는 대답만이라도 듣고 싶었죠."

A씨와 몇 차례 면담과 전화 통화를 한 회기역장은 "노력하고 있으나 당장은 곤란하다"면서 "공기관에서 개인에게 정식 문서로 답변할 수 없다"며 자신도 난처하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A씨와 한국철도공사 측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다 한국철도공사 동부지역본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A씨가 사고를 당한 회기역의 안전고무발판을 6월말경에 설치하겠다는 대답이었다. A씨는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답변을 공식화해줄 것을 요구했고 담당자는 A씨에게 "인터넷을 통한 정보공개청구를 할 경우 공식적인 답변을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A씨는 한국철도공사 측에 회기역 승강장 안전고무발판 설치에 관련한 사항과 승강장의 안전기준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정보 공개 청구를 하였고 20일 답변을 받았다.

한국철도공사 측이 A씨에게 보내온 회신.
 한국철도공사 측이 A씨에게 보내온 회신.
ⓒ 신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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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도공사 측이 보내온 회신에 따르면 사고역인 회기역의 승강장안전고무발판 설치를 6월 26일부터 29일에 걸쳐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승강장 안전거리에 관한 기준이 도시철도건설규칙 제30조의2(승강장의 안전시설)와 철도시설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 제43조(승강장)에 명시되어 있음을 알려 왔다.

두 기준 모두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의 간격이 10cm를 넘을 경우 실족을 방지할 안전 고무 발판을 설치할 것을 명시했다. 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A씨가 사고를 당한 지점의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의 간격은 15cm이었다.

결국 A씨는 혼자서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힘든 과정 끝에 자신이 매일 이용하는 역의 안전시설을 확보한 것이다. 한 사람의 장애인이 한국철도공사라는 대기업을 상대로 얻어낸 값진 결과다.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제부턴 매일 회기역을 이용할 때 겪었던 공포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건값 흥정하듯 소비자 권리 흥정한 삼성전자

시각장애인 1급의 김용식(40)씨도 A씨처럼 거대기업 삼성전자와 싸워 자신의 권리를 찾은 바 있다. 김씨는 지난해 3월 삼성전자의 외장형 하드디스크(S2 Portable 1TB)를 12만 원에 구입했다. 그러나 김씨가 구입한 제품은 구입한 지 두 달 만에 고장이 났고 하드디스크에 보관하고 있던 자신이 작곡하고 연주한 소중한 음원을 날려 버릴 위기에 처했다. 김씨는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 수리를 의뢰하였으나 "수리가 불가능하다"며 단순히 새로운 제품으로 대체만을 해주었다.

하드디스크보다 저장되어 있던 음원이 더욱 소중했던 김씨는 복구를 요구했으나 삼성측은 "소비자의 과실이므로 복구해 줄 수 없다"고 밝힐 뿐이었다. 김씨는 "제품에 시각장애인이 알 수 있도록 점자나 음성 설명서가 없어 사용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삼성 측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의 거래업체인 데이터 복구 업체가 요구한 복구비용은 27만 원. 이 비용을 삼성측은 소비자의 과실이므로 김씨가 부담할 것을 요구했고 김씨는 앞서의 주장을이유로 삼성이 부담할 것을 요구했다. 삼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김씨는 결국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제15조 1항 '재화·용역 등의 제공자는 장애인에 대해 장애를 이유로 장애인 아닌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과 실질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수준의 편익을 가져다주는 물건, 서비스, 이익, 편의 등을 제공해서는 아니 된다'는 조항을 위배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다. 또 김씨는 같은 이유로 소비자보호원에 고발할 것도 삼성측에 통보했다.

그러자 삼성이 반응이 조금씩 달라졌다. 데이터 복구 비용 27만 원 전액을 김씨가 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삼성은 "20만 원에 처리해 주겠다"고 제안했다가 김씨가 이를 거부하자 다시 "15만 원이면 가능하겠느냐?"고 마치 물건값을 흥정하듯 김씨의 권리를 흥정했다.

김씨의 끈질긴 요구로 결국 복구 비용을 삼성이 부담하고 나아가 현재는 김씨와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금년 4월부터 삼성전자의 모든 제품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사용설명서(텍스트 파일 설명서 포함)을 제공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용 고객센터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김씨의 끈질긴 싸움 끝에 이룬 성과였다.

장애인들 '정당한 요구' 포기하지 말아야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안전고무발판의 설치를 이끌어낸 A씨나 공룡기업 삼성전자와 싸운 김씨를 취재하면서 공통점을 느꼈다. 우선 한 사람의 장애인으로 우리 사회의 거대 기업을 상대로 끈질긴 과정 끝에 권리를 찾았다는 것.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인 점. 그들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애인이 같은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는 연대감이 어려운 싸움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다고 말한다.

A씨나 김씨의 행동은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애인 모두가 이런 작은 몸짓으로 두터운 장벽으로 막아서는 우리 사회를 향해 작은 돌팔매를 던질 때 우리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지 않을까?


태그:#지하철 안전시설, #KORAIL,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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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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